나는 이번 학년도에 3학년 몇 개 반 수업을 맡아 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개학을 하고, 개학한 후 며칠 있으면 바로 졸업식이었다. 내 수업은 반별로 두어 차시 정도만 남아 있었기에, 진도도 다 끝났겠다, 마지막으로 의미가 있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어 개학을 코앞에 두고 신간을 부랴부랴 검색하기 시작했다.

 

  1. 아이들은 여학교 학생이다.

  지금은 비록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친구들과 안전하고 의미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상급학교로 가게 되었을 때, 그리고 학교를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을 때, 아이들의 삶은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해도 부정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기 얼마나 힘든지는 모두가 알지 않는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이들은 지금 당장 '여성으로서의 삶'이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내가 남선생이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만). '메갈리아'는 반사회적 집단이 아니냐고 묻는 아이도 있었다(나는 물론 메갈리아=반사회적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답을 따로 해 주지는 않았다). 성추행 의혹을 산 남자 아이돌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 열을 내는 듯한 아이도 있었다(이건 물론 남자 아이돌 팬이 교실에 있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내 과오다).

  가치에 대해서 교육할 때 가장 어려운 지점이 이것일 테다. 학생들이 향후에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해 보아야 할 가치는, 정작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강요'니 '선동'이니 이상한 말이 나오는 일방적인 방식 말고(나는 물론 그 이상한 말들을 하는 이들이 문제라고 본다), 대다수의 학생이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치를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마련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 없다. 현장에서 부딪히고 계속 고민하면서 맞춰보는 수밖에.

  여튼.

  아이들에게 여성주의 입문을 도와주는 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고민하다 찾은 책이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정희진 외 지음, 우리학교, 2017)이다.

 

 

 

 

  '입문서'라는 용도를 증명하듯 서술은 전반적으로 평이하다. 좋았던 부분은 각 장의 말미에 소주제(공동체 생활, 모성, 외모 지상주의, 대중문화, 온라인과 여성혐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성 정체성, 몸과 성, 노동, 과학, 환경)와 관련 있는 여성주의적 콘텐츠가 제시되어 있는 것.

 

 

 

 

  2. 아이들은 이제 곧 졸업을 한다. 내가 이들과 한 교실에서 만나는 것도 이제 끝내야 하고, 이들은 저마다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언가 힘과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식상한 말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내가 창의적이고 톡톡 튀는 인간형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서, 결국 책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우연히도', '졸업식 연설문 모음'이라는 신간을 인터넷 검색 중에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날에 바로 집 근처 서점에서 구입했다. 커트 보니것의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김용욱 옮김, 문학동네, 2017)다.

 

  과문한 탓으로, 커트 보니것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으나(먼 옛날도 아니고, 어쨌든 옛날에는 '커트 보네거트'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쓴 글을 실질적으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말은 뭐랄까, 중세의 광인 같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따르면, 중세에는 광인이 현인이었다고 하더라... 물론 읽지는 않고 어디서 주워섬긴 지식이다). '가족', 그중에서도 '대가족' 언급을 많이 하길래 잠깐 절레절레했으나,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가족' 말고 '공동체'로서의 집단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옛날 사람인데, 옛날 사람 같지 않은 측면도 있고, 그러면서 어떨 때는 옛날 사람 같기도 하고, 그랬다. 책은 아이들이 졸업하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독하지 못했다.

 

3. 두 책을 읽고 아이들에게 해 준 마지막 말은 너무 식상한 말들, 그게 다였다.

커트 보니것의 말은 워낙 독특해서 내가 함부로 모방할 계재가 되지 않았고,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엠마 왓슨의 UN 양성평등 연설을 먼저 보여주고, 그다음에 이런 책이 있다, 정도로만 소개해 주었다.

 

 

4. 그리고 아이들이 졸업했다.

마지막에 아이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없어 아쉬웠는데, 생각해 보면 나도 학생 때는 선생님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사진 찍고 인사 드리고 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졸업하기 며칠 전에 읽은 책들을 정리하며 글을 쓰려 했는데 업무 핑계로 게을렀다.

아이들이 졸업하고도 며칠이 지났다.

글을 쓰며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도 이 학교를 곧 떠난다.

다시 교사 아닌 자리로 돌아간다. 이것도 쓸쓸함의 한 가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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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는 힘이 세다 - 지치지 않는 독서교육을 꿈꾸는 보통 교사들의 새로운 교실이야기 배우는 사람, 교사
경기도중등독서교육연구회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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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쉬우나 현장에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을 온전히 아는 여러 선생님들이 독서교육의 의미 있는 성과뿐만 아니라 잘 되지 않았던 실패의 경험을 책에 오롯이 담았다. 교사가 지치지 않는 방법으로 독서교육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꾸준히 간다. 책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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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국가가 키워라 - 보육원 의무 교육화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한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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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고 그 대안으로 보육원 의무 교육화를 주장한다. 육아는 사회 전체의 수준 향상과 직결되어 있는데, 국가가 출산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육아 대책을 방기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이 다르지 않다. 번역판 제목이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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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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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와 여성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성폭력 피해자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 절묘한 방식의 피해자 동일시는 작가 역시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몰랐다는 사실의 인정으로부터 실마리가 마련되었으리라. 아직도 성폭력을 믿지 못하는 남성에게 묻자. 악어란 누구인가. 당신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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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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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논의에는 일부 한계점도 있지만, 저자 스스로 이상했던 과거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점을 높이 산다. 진보는 이러한 성찰로부터 느리게 온다. 이상함의 사회화가 이미 이루어진, 보편의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신이 이상한 줄도 모르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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