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은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마세요.” 1) 이민경은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하는 남성에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여성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변의 혐오발언을 저지하기 / 무심코 판단하는 위치에 서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만들어가기 /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누린 특혜를 본인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다른 남성에게 설명하기 / 기득권자란 기본적으로 가부장제의 가해에 동조하는 입장임을 다른 남성에게 설득하기”(빗금 표시는 인용자) 2)
기득권자는 자신이 기득권자인 줄 모른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한다.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자’라는 단어가 ‘정치경제적 상위 지위를 획득한 계층’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다 보니, 정치와 경제 이외의 영역에도 기득권자가 있을 거라 상상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득권은 어디에나 있다. 엄연히 있다. 작년, 피해 호소인들의 고발로부터 점화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생각해 보면 기득권자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문인들은 대개 자신들을 정치경제적 기득권과 대항하는, ‘시대의 양심’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정치경제적 기득권과 적극적으로 야합하는 문인도 있지만). 그러나 문단 그 자체만 보면 어떤가? 최근 징역형을 선고받은 배용재는, 이런 말한다고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끗발 있는’ 문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단 시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과도한 특권을 부여해주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는데, 그깟 등단이 뭐라고 채 인간도 안 된 나부랭이들이 왜 비범한 예술가로 대접받는가? 글을 잘 써서 그렇다고? 웃기지 마라. 미학적 가치로 따지면 예전에 문필 활동 접었어야 할 ‘문인’의 수가 두 손으로 꼽아도 모자라다. 이건 사회문화적 기득권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자면 ‘한국 남자’는 반박할 여지가 없이 사회문화적 기득권자다(물론 한국 여성의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를 생각해 볼 때 정치경제적 기득권자이기도 하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그대가 단지 여자/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결과나 평가가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남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들이 생각하기에 기득권자란 정치경제적으로 ‘끗발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데,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처지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 같이 안정된 직장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도 가는데’, 여성들은 계속 자신들의 삶이 불평등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메갈’을 찾는 것이다. 예전엔 여자들이 이렇게 ‘과격’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운운하면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 그러니까 성 평등 이슈를 틀어막는 용도로 메갈 어쩌고 하는 ‘한국 남자’들을 ‘비겁하다’고 규정한다.
규정하는 것은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나도 ‘한국 남자’인데, 구조적인 성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 ‘한국 남자’인데?
서민 교수는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지향한다. 그에 따르면 여성혐오적 언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동조하거나 (심지어) 침묵한 사람도 큰 틀에서 보면 여성혐오의 ‘공범’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남자’들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국 남자’들의 사례를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왜 이것이 여성혐오인지를 친절하게 해설해 준다. 페미니스트인 이상 여성혐오에 동참할 수는 없으니, 이 책을 쓴 것이 그 나름대로의 페미니즘 실천이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어떻게 페미니즘을 실천했나.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남자’이니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긴 했지만, 저 비겁한 무리들, ‘메오후’와 ‘쿵쾅쿵쾅’을 달고 사는 여성혐오자들을 인터넷에서 보면서, 적극적으로 그것에 대항하거나 맞서지는 않았다. ‘인터넷에서 여혐하는 xx들이 다 찌질하지 뭐’하고 무시했고, SNS에서 내 생각과 비슷한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을 소심하게 공유했다. 집에서는 배우자와 함께 집안일을 분담하고 있지만, 배우자가 좀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의 여혐 발언은, 내가 ‘급’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고 제지하지 않았다(변명이지만, 수험 생활로 인해 만나는 ‘주위 사람’ 자체가 거의 없기는 하다). 아, 그러니까 나는 입만 산 페미니스트였던 거였다. 이러니 ‘페미니즘의 실천에 남성 페미니스트는 필요 없다(또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도.
남성은, 특히나 ‘한국 남자’는 페미니즘을 실천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남자라서 여자에 비해 받은’ 차별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자꾸 군대 이야기하는 ‘군무새’들은, 여자가 군대 보낸 거 아니니까 정부 기관에 정중히 청원을 넣기 바란다. 아, 10만 명 넘게 청원을 넣었는데 대통령이 수석들과의 대화에서 그냥 웃고 넘겼다던가? 그럼 별수 없고.).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존재가 인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 성 불평등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저마다의 속도’가 동일하지 않다면, 후열에 있는 남성들은 모두 ‘도태’되어야 하는가?
페미니즘적 관점은 ‘학습’되어야 한다. 학습은,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르면 외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당장 서민 교수의 이 책에서도, 외우긴 했지만 응용이 완벽히 되지 않아 일부 ‘삑사리’가 난 부분이 있다.
가해자와 싸우는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용기를 내주면 좋겠다. 그 싸움은 자신은 물론이고 직장 내 다른 여성들, 그리고 그 뒤 그 직장에 들어올 여성들을 위한 가치 있는 싸움이니까.(132)
-> 개인적으로 가장 뜨악하게 여긴 부분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대의를 위한 싸움을 종용할 수는 없다. 싸움은 힘들다. 몸과 마음이 갈려 나간다. 싸움의 당사자가 완전 소진되지 않도록, 주위에서는 연대와 지지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있는 저자 자신도 팟캐스트 이후로 여성혐오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 왜 여성이 성희롱을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해결의 공을 피해자에게 넘길까?
남성 페미니스트의 의견은 불완전할 수 있다. ‘나는 무려 남자인데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러니까 어서 날 칭찬해 줘!’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나는 페미니스트에게 과도한 무결함을 요구하는 어떠한 추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페미니스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낄끼빠빠’라는 조어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한국어의 새말은 조어의 원리며 결과물이며 모두 경이롭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의 줄임말인데, 남성 페미니스트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받는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이야기할 때 남성으로서 ‘징징’대지 않는 것,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차별 및 성희롱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함께 연대하는 것. 딱 이 정도다.
ps. 저자가 알라디너,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활동한 알라디너이시라고 들었다(갑자기 존대). 이 책의 ‘비판적 지지자’를 자처하는 입장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해 보자면,
다음부터 ‘나무위키’는 ‘성차별, 집단적 반지성주의, 반달리즘’ 등의 실제 사례로 가져올 게 아니라면, 인용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다른 주제도 아니고, 있지도 않은 ‘이퀄리즘’을 ‘집단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날조한 집단이 나무위키다.
ps2. 배우자가 최근에 이야기하기를, 내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집안일을 ‘도와 준다’”라는 표현을 두세 번 정도 썼다고 한다. 아주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한 번인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배운 대로 실천한다고 하지만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완전히 갱신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또 한 번 반성한다. 내가 누굴 비판하나. 나나 잘 할 것이지. 한국 남자로 태어난 이상, 내 안에 있는 성차별적 인식 및 여성혐오의 무의식, 그러니까 나에게 운명론적으로 주어진 ‘빻음’과는 평생 길항해야 하겠다.
ps3. 늘 멋진 글을 쓰시는, 이 책을 선물해 주신 알라디너 분께, 고작 이런 감상밖에 남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1) 2017년 8월 25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리베카 솔닛 내한 강연에서. 워딩은 정확하지 않으나, 맥락상 이러한 내용의 문답이었다.
2)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페미디아, 2016, p.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