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우선 소설이 펼쳐내는 허구적 상상의 세계, 기기묘묘한 인간들의 삶을 재현해내는 것이 흥미로우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 지적인 즐거움,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몇 가지 이유때문이다. 그런데 곤혹스러운 것은 소설이 단순히 즐거움과 아름다움의 향유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파리대왕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하는 문학은 행복과 즐거움만이 아닌 어두운점, 악한 점, 고통스런 점까지 모두 소설화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소설읽기의 즐거움이 아닌 어려움, 고통이 시작된다.

2
순수했던 젊은시절은 문학과 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매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만큼 독서에 임하는 태도는 진지함을 넘어 책이 삶의 전부인양 착각했다. 하지만 나이들다보니 문학은 그저 문학이며, 책은 책에 불과할뿐 세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책 몇 권 읽는다고 크게 바뀌는 것 같지도 않고, 문학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해서 기껏해야 세상의 많은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읽기는 때로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또한 좋은 소설은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삶에 대해 여러 의문과 문제를 제기한다.

 

3
영화 <파리대왕>을 감상하는내내 우울하고 공포스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만약 책읽기가 일차적으로 예술미의 향유와 쾌락을 맞보기 위해서라면 되도록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만 골라 감상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고단한 세상사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사람살이가 유쾌하고 즐거운것만은 아니듯이 영화, 문학도 마찬가지인거다.

4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리 후크의 <파리대왕>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이 그렇듯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해부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인간을 폭력과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 그런 폭력과 권력에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법과 질서가 있는 평화로운 곳이지만, 우리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떤 곳에 폭력의 위험성이 도사릴 경우가 있다. 전국민에게 악몽같은 사건으로 각인된 윤일병의 죽음’, 어린아이를 삽자루만한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유아원 폭력, 중학 동급생끼리 수년간 돈뺐고, 조직적으로 구타한 학교폭력이 매일같이 자행되건만 부모, 교사 모두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윤일병의 의무대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과 동일한 세계이다. 이 소설에서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은 그들만의 전체주의적 질서를 만든다. 한국 군대는 불시착해버린 고립된 섬이었다. <파리 대왕> 소설과 동일하다. <진짜 사나이> 내무반에서는 자기 상관이 좋아하는 축구팀, 좋아하는 음식까지 시험을 봐야 했다. 폐쇄된 공간, 고립된 인간관계, 서열과 형님문화, 좌표 상실. 이곳에서는 죽거나 저항하거나 비굴하거나,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윌리엄 골딩은 인간 본성이 이타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침팬지와 인간은 차이가 없다. 조카 침팬지가 힘이 세면 삼촌 침팬지를 돌로 쳐서 머리를 박살낸다. 자기 바나나 먹었다고 해서. 여기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이 잔혹하게 자기 또래 아이들을 죽이고 배제해버린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주목하는 동물이고, 자기와 남을 비춰보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울을 닦지 못하게 구조적으로 규정되고, 압박을 받으면, 그 마음의 거울에는 때가 낀다. 반성능력은 사라진다. 내 바나나 먹었다고 삼촌 침팬지 대가리를 부수는 힘과 에너지만 남게 된다."   -  김종대 <지배하는 군대가 악마를 양성한다>

 

5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상륙한 일군의 소년들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 악한 본성을 알레고리로 드러낸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랠프의 역할이 좀 유약하게 묘사되는반면 잭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랠프와 돼지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민주적 사고를 지닌 인물을 대표한다면, 잭과 그의 심복격인 로버트는 비합리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폭력적인 인간을 각각 대표한다.

영화는 초반, 여느 소년집단이 있을법한 일을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잠깐 놀랄일도 금방 어린아이 특유의 일로 여기지만 점점 진행되면서 폭력과 권력이 드러난다. 그런점에서 이 영화는 음악의 속도처럼, 라르고, 아다지오, 알레그로, 프레스토 식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가공할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있던 세상의 황담함내지는 비상식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의 세상은 공평치못하고, 폭력적인반면, 다른 세상은 공평하고 평화롭다. 이 경우 어느 한 쪽이 진실이 아니라 둘 모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한쪽만을 보고믿는탓에 다른쪽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다.

<파리 대왕>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 폭력을, 그것도 평소 상상할 수 없던 가공할 폭력을 경험하는 기분을 느끼게한다.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날 느닷없이 불치병 선고를 받았을때의 기분이 이럴것이다. 평소 건강할때는 세상사람 모두가 건강하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내 자신이 아프면, 게다가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한순간 생각이 달라진다. 폭력도 마찬가지여서 한순간 세상은 부당함과 폭력으로 가득차있다고 생각한다.

6
우리는 애초에 책읽기의 즐거움만을 목표로 할 수 있다. 책과 문학은 일차적으로 쾌락의 대상이니까. 하지좋은 책은 세상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독자의 나이브한 태도를 용인하지 않는다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이 옳지않다고. 부당하고, 폭력적이며, 아름답지 않다고 질타한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이른바 즐거운 책읽기가 아닌 괴로운 책읽기로 바뀐다. 그럼 독자는 어떻게 해야하나? 세상사 내 알바니 여전히 책읽기만을 즐겨도 되나? 아니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는데 일조 해야하나? 것은 각자의 실존적 선택이자 개인의 몫이다. 작가는 단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되어있다고 드러낼뿐이니까.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를 띄고 있다. 우리는 책을 읽듯 세계를 읽을 수가 없다. 세계라는 책은 너무 크고 복잡하여, 그것의 구조를 곧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저마다 무당이며 점쟁이며 교사이어서, 어느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행복스러운 것은 아니다.

 

보바리 부인의 경우에서처럼 책 속에서 본 대로 살려 하다가는 파멸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 키호테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주 '그린파파야'에서 있었던 독서모임이 끝나고나서 두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민음사, 방미경 역)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에 관해서인데 첫째, 코스트카, 헬레나, 야로슬로프가 왜 별도의 쳅터로 등장하며, 그정도 비중있는 인물인가? 이들은 주인공이랄 수 있는 루드비크와 어떤 관계인가. 둘째, 루드비크가 진심으로 사랑한 루치에는 소설 상 중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왜 베일을 쓴듯 모호하게 등장하는가, 또 회원들의 관심사이기도 한데, 루치에는 코스트카와 루디비크 중 누구를 더 사랑했을까? 의문을 따져보기에 앞서 소설의 주제부터 살펴보자.

나는 토론 때 "<농담>은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 파멸하는 한 개인의 운명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덧붙여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란 1940년 후반 체코 공산정권 수립에서 1960년 후반 '프라하의 봄까지 진행된 교조적 사회주의를 뜻하고, 이런 배경 속에 루디비크의 엽서사건이 일어났다, 라고 말한바 있다.

즉,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문제삼는다는 거다. 그래서 <농담>은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타킷으로 삼기위해 먼저 여러 형태의 교주주의'를 소개한다. 가령 제마네크, 알렉세이의 교조적 사회주의에 대한 맹신을 비롯, 코스트카의 교조주의적 신앙, 야로슬라프의 시대착오적인 민속예찬, 헬레나의 루디비크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 등이 그것인데, 여러 형태의 교조주의 삽화는 '교조적 사회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한데 독서회가 끝나고 생각해보니 야로슬라프의 민속 예찬이 왜 교주주의적인지, 코스트카의 기독교가 왜 도그마며, 교주주의적 신앙인지, 나아가 헬레나의 사랑을 맹목적이라고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정작 내 자신부터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루드비크는 자신을 파멸시킨 제마네크의 교조적 사회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견지하며, 복수심까지 품지만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엽서사건이 벌어진 대학시절, 당기위원장인 제마네크와 위원회 학생들에게 자신은 결코 사회주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격렬히 항의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회주의를 비난했다는 죄명으로 군대(수용소)에 끌려가면서도 여전히 제마네크, 알렉스의 교조적 사회주의만을 경멸을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교조주의에 대한 몇 개의 삽화들은 루드비크를 파멸케한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의문이긴 마찬가지여서 모임이 끝나고도 영 개운치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사유의 아름다움>(* 청년사, 김병욱 역)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귀절을 발견했다.

내가 <농담>을 쓰기 시작한 날들을 생각해 본다. 애초부터 완전히 본능적으로 나는 야로슬라프라는 등장 인물을 통해 소설이 자신의 시선을 과거의(대중 예술의 과거의) 심층부 속으로 잠기게 하리란 것을, 그리고 나의 등장 인물의 <자아>가 그 시선에 의해 그 시선 안에서 드러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주역도 이렇게 창조되었다 : 유럽의 네 과거에 접목된, 네 개의 개인적인 공산주의 세계 : 루드비크 : 신랄한 볼테르적 정신 위에서 자라는 공산주의 ; 야로슬라프 : 민속에 보존된 족장적 과거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공산주의 ; 코스트카 : 복음서에 접목된 공산주의 유토피아 ; 헬레나 :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열정의 원칙으로서의 공산주의. 이 개인적 우주들은 모두 그들이 해체되는 순간에 포착되었다. 공산주의 분해의 네 형태 ; 이는 또한 : 유럽의 오랜 네 모험의 붕괴를 의미한다.”   -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28쪽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코스트카, 야로슬로프, 헬레나가 등장하는 삽화는 내가 이해했던대로 교조적 사회주의를 부각키 위한 것이 아니라 네 가지 형태의 공산주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좀더 부연해보자.


코스트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정신적 흐름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회 평등과 사회주의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초기 사회주의 시대의 열성적 공산주의자들을 떠올려보면, 가령 루치에를 내게 넘겨준 그 의장같은 사람들은 회의적인 볼테르파들보다는 독실한 신앙인에 가깝게 보입니다." (민음사판, <농담> 374쪽) 라고 루디비크에게 말한다.

그래서 루드비크의 사회주의가 아닌 기독교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종교관은 원
시기독교의 주장과 유사하며,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이념과도 통한다. 과거 80년대 국내에 소개된 일본 신학자 다가와의 저서 <원시 그리스도교 연구>가 이런 내용들이며, 작가는 코스트카의 그리스도교를 통해 루디빅크가 신봉하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야로슬라프의 민속에 대한 강력한 애착이다. 루드비크는 야로슬라프의 민속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현대의 민속이 사회주의에 이용되는 점이 불만이다. - 우리나라 민속축제가 민족주의, 국수주의를 배경으로 체제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 - 한데 작가에 따르면, 이런 야로슬라프의 삽화, 즉 <왕들의 기마행렬>을 비롯한 민속의 과도한 열정과 집착은 "민속에 보존된 족장적 과거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공산주의" 한 형태라는 거다.

헬레나의 등장은 상당히 흥미있다. 나는 헬레나를 교조적, 맹목적 사랑의 신봉자로 생각한데반해 작가는 호모 센티멘탈리스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도 등장하는 개념이다 - 의 구현자로 설정했다. 즉 "열정의 원칙으로서의 공산주의의 표본"이라는 거다. 인류 역사에서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공산주의 이상에 불타는 지식인들이 적지않았다. 그런데 <농담>에서 헬레나가 그런 인물을 표상하는 점은 재밌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에서 헬레나를 사랑의 교주주의라고 했는데,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점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끝으로, 루치에와 코스트카, 루드비크와의 관계를 살펴볼 차례다.

"코스트카는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의미하였고, 그녀를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하였으며, 그녀를 더 잘 사랑할 줄 알았다.(...)  즉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 쪽으로 향하고, 나에게 와 닿는 쪽에서만 그녀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모든 부분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그녀 자체의 모습, 그녀 혼자만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 그러나 나는 이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 <농담> 420쪽

루치에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코스트카의 기독교와 루디비크의 사회주의 이념과의 대립적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즉 루드비크는 루치에를 진심으로 사랑한게 틀림없지만 코스트카가 보기에는 루디비크가 신봉한 사회주의 이념이 그랬듯이 "일종의 추상이고 전설이자 신화"  "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치에는 루드비크가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반면에 코스트카는 기독교적 정신, 사랑의 정신으로 루치에에게 다가섰기 때문에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루치에는 두 사람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여인일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이나 기독교적 이념의 대상, 즉 민중, 인민 등 이름없이 역사의 곁을 스쳐가는 하나의 상징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고대 그리스의 신의 대한 숭배는 '예술적 이야기하기'(비극 공연)를 통해  이뤄졌다. 가령 디오니소스 신의 숭배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하는데, 하나는 먹고마시고 취하는 카니벌적 축제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야기하기, 즉 비극공연이다. 

 

오늘날 한국사회 역시 신의 숭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금연, 금주 등 금욕적인 '극기훈련'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 등 '돈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든 형태의 고등종교는 사람을 좀 외롭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멀리 호메르스의 신화적 세계를 비롯해서 기독교든 불교든 보편적인 종교들은 불가피하게 합리적, 이지적이어서 그로부터 심정적 위로를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보편적인 고등종교와 달리 샤머니즘은 사람들에게 심정적 위로와 공감을 쉽게 주는대신 인간들의 야수적인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유교할것없이 그 어떤 종교든 샤머니즘이라는 블랙혹 앞에 완벽히 무릎을 끓고 말았다. 샤머니즘! 그것은 온갖 반동적인 것의 근저에 똬리를 틀고 있으며, 노예적 세계관에 기생하거나 연명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성들이 어울리면서 각자의 취향을 공통분모로 삼아 중년의 삶을 보다 흥겹고 재미있게 보내기 위한 동호인들의 현실이었다. (...)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의 예배를 비롯한 모든 모임에는 한결같이 열성을 내는 편이었다. 도시의 소비자들이 아니랄까, 전일해야할 종교적 희망은 종종 그들의 복잡다단한 세속적 욕망에 떠밀려 종적을 찾을 길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예수의 제자로서 짊어져야할 자기 십자가를 각자의 생활양식에 얹은 채 (마치 스피노자의 인상처럼) “고독한 현자이자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모래밭에 숨은 바늘을 돼지뒷다리로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노릇이 되고 말았다.

예수를 만난 게 위험한 ‘사건’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양식의 실천 속에서 그 사건과의 검질긴 접속을 ‘좁은 문 속의 희망’으로 구체화하려는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철학마저도 당대의 현안을 해결하려는 외교관적 입장과 시각에서 접근했던” 라이프니츠처럼, h와 그들의 친구 기독교인들은 종교신앙마저도 삶의 욕망과 쾌락을 해결하려는 외교관적 입장과 시각에서 멀거니 쳐다볼 뿐이었다.     -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스피노자가 아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