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 잘 만든 영화란 어떤 것을 말할까. 아내와 함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폴링 인 러브>를 연이어 감상했다. 두 편 모두 전형적인 로맨스-멜로, 불륜담이다.  

- <폴링 인 러브>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취향에 맞던데 당신은?
- 두 편 모두 괜찮네요. 깔끔하달까.
- <매디슨...>은 절제감으로 꽉 짜인데반해 <폴링 인 러브>는 좀 자유롭지?
- 그렇긴해요.
- 뭐 좀 영화에 대해 할말 없을까?
- 글쎄 딱히....
- 나도 그래, 마땅히 할 애기가 떠오르지 않아. 마치 당연한 일을 본 느낌처럼. 
- 역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출중한것 같애. 섬세한 감정 표현이 얼굴 표정, 손짓 하나하나까지  전체에 묻어나거든. 
- 여자 배우가 정말 연기를 잘 하네요.
- 워낙 뛰어난 배우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괜찮지? 서부극에 출연을 많이 한 탓이겠지만 강한 남성 이미지에 적역인 배우인데 말야.  마치 두 배우를 위해 만든 영화라고나할까. 연기도 연기지만 우선 캐스팅이 잘 된것 같애. 반면에 <폴링 인 러브>의 로버트 드니로는 좀......남자 역은 약간 부드러운 이미지가 좋지 않을까? 드니로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워낙 강한 이미지다보니 좀 그렇더라구. 나도모르게 자꾸 <대부>가 떠오르는거야. 상대를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빛조차....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이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역할이 많은 탓 같애.    

아내와 나는 두 편 모두 그럴듯한 멜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데 합의했지만 대화는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았다. 두 편 모두가 이미 모범 정답을 제시한 느낌이어서 굳이 답을 찾고자 수고를 할 이유가 없었던거다. 결국 이 말은 어떤 의미나 담론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여하튼 전형적인 로맨스-멜로라는것, 깔끔한 수작이라는것. 딱 여기까지가 감상담의 전부였다. 자, 그렇다면 두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  이 말을 하기에 앞서 안톤 체호프 원작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허진호 감독의<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교해보자.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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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연식 <로마서 8:37> 2017년                        미이케 다카시 <할복, HARA-KIRI> 2011년


신연식 <로마서 8:37>

예술작품에서 종교를 언급할 경우, 대개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하나는 종교철학- 신학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사회적- 제도적 관점이다. 가령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유현목의 <사람의 아들>이 전자의 관점으로 접근했다면, 신연식 감독의 2017년작 <로마서 8: 37>은 후자의 접근법이다. 물론 모든 예술작품이 명확하게 두 관점으로 나뉘는건 아니지만 대개 그렇다는 거다. 

신연식의 <로마서>는 한국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 작품은 한국의 기독교, 더 좁게는 한국의 교회 제도를 향해 매스를 들이댄다. 참고로 최근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몇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성폭력, 교회 세습, 대형화, 교회 재산을 둘러싼 파벌과 분쟁, 비민주적 제도, 교회간의 부익부 빈익빈 등등. / 계속   


                                                니키타 미할코프 <위선의 태양>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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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군산시(인재양성과)가 주관하는 '동네카페' <클래식과 인문학의 만남>을 진행하고, 오늘은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를 감상하는 등 연이틀 분주하게 지냈다. 아무리 바빠도 트럼펫 연습만큼은 거를 수 없어 빠듯한 시간을 트럼펫 연습에 할애해야 한다. 퇴직하면 시간여유가 충분하겠지, 했지만 막상 그게 아니다. 오전 내내 영화 감상 준비하느라 저녁식사 마치고나서야 겨우 조간신문을 읽었다.

한겨레신문은 매주 금요일 '책과 생각' 이라는 신간 서평 기사를 꽤 많은 분량의 별지로 묶어 낸다. 나는 늘 책을 끼고 사는 생활이라 신간 소식이 궁금한데 특별히 구독하는 서평지는 없고, 매주 한 차례 한겨레 리뷰 정보가 유일하다. 전문 서평지와 달리 신문 리뷰는 분량면이나 깊이에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워낙 따근한 정보들인데다 요긴한 읽을거리가 많아 반드시 챙겨 읽는다.  

오늘 기사 중 재야 철학자인 전대호 변역의 헤겔<정신현상학 강독 1>(글항아리, 2019년)에 대한 리뷰가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된 헤겔의 <정신현상학> 중 '서문', '들어가는 말'을포함해 의식에 대해 다룬 1~3장을 번역하고 강독한 내용을 엮었다. 

출판사에 따르면, 앞으로 이 강독 시리즈는 총 5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번역서가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학계에서 통용되던 헤겔 철학의 몇 가지 핵심 개념어들을 다소 파격적으로 번역한 점이다. 예컨대 무매개적(unmittelbar) / 단박, 지양(aufheben)/거둠, 즉자(Ansich)/그 자체, 대자(Fürsich)/자기를 마주함, 즉자대자(Anundfürsich)/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함(또는 ‘다움’)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이와같은 새로운 번역어가 과연 보수적인 학계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못 궁금하다. 여하튼 나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창의적으로 보일뿐 아니라 독서열을 은근히 부추긴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오래 전에 임석진 교수가 번역한 한길사판 <정신현상학>을 구입한 바 있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아트 앤 스터디'에 개설된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 강의> - 김 교수의 강좌는 4장 '자기의식'과 5장 '이성' 등 두 장으로 국한된다 - 를 청취해볼까 했지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함께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서라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새 번역서가 출간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욕심을 한번 내봐야겠다. 다음은 앞에 열거했던 몇 가지 개념어의 이해를 위한 리뷰 중 일부다.     

역자는 이런 새로운 개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홍길동을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먼저 서자로서 자기의식이 없는 꼬마 홍길동의 상태는 ‘홍길동 그 자체’다. 하지만 성장하며 서자라는 자의식을 품고 자신과 불화하게 되어 길을 떠나 외톨이가 된 홍길동, 자기로부터 멀어지면서 ‘자기와 화해한 홍길동’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홍길동이 바로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이다.

그렇다면 ‘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은 무엇일까. 전대호는 일반적인 헤겔 해석자들이 이를 ‘해탈한 홍길동’으로 설명해왔다고 지적한다. 대신 그는 이를 역동적 부정성을 품은 ‘홍길동의 일생’ 또는 ‘홍길동다운 홍길동’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우리말 ‘다움’엔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헤겔 철학적인 의미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저잣거리의 말엔 ‘사람임’이라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사람다움’의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헤겔의 사상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내가 깨달은 바로는, 모든 것이 걸린 관건은 진실을 실체로서뿐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로서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헤겔이 자신의 깨달음을 요약한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내가 깨닫고 보니 사람임에 머물지 않고 사람다움에까지 이르는 것에 만사가 달렸더라.” 감각에 매몰된 인간의 정신이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을 다루며, 정신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자유임을 밝히는 <정신현상학> 전체의 논지가 이미 서문에서부터 예고되는 것이다.

2부에서 진행되는 강독은 한줄 한줄 해설해나가는 대신 넓은 보폭으로 따라가면서 주제에 대한 해설과 사상사적 맥락을 담은 에세이 성격의 글들이 이어진다. 그는 특히 헤겔을 절대정신, 시대정신처럼 “개인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막강한 힘을 준엄하게 선포한 인물”로 보는 기존의 오해를 벗기는 데 주력한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하는 사람, 바로 그것이 헤겔이 말하려는 진실의 진면목에 가깝다” “헤겔 철학이 그리는 주체는 찢어진 주체이지, 소위 절대자가 아니다”라는 대목들이 그렇다.   - 2019. 4. 12. 한겨레신문,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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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년)은 극중 남자 주인공이 자기가 사귀는 연인이 누구인지, 그녀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을 다룬 내용이라네. 주인공은 자기가 본것,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한채 실망스럽게도 친구가 제공하는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다 결국 자신이 가장 믿고 가까워야할 연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친구의 말을 더 믿는 꼴이 되지.    

이 영화는 거듭해서 관객에게 묻는다네. 당신이 알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 단 타인의 견해나 주장을 믿지 말고, 당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대로,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줏대있게 말해봐라. 어렵쇼! 자기가 본 바를 말하라니 남이 본것을 또 옮기는구만. 당신 앵무새야? 꼭두각시야? 왜 당신의 여자인데도 자신의 생각을 믿지 못하고, 기껏 타인의 견해에 기대나? 그렇게도 줏대가 없어? 그렇담 당신의 소중한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고생깨나 해야겠군.

홍상수에 따르면, 제 아무리 귀한것이 있어도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냐. 만약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의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그걸 알기위한 과정이 비록 험난해도 회피하지 말고, 하나하나 부딪치고, 돌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며 고난의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는거지.   

사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라네. 왜냐면 영화 속 스토리가 바로 내 얘기를 하는것 같아서지. 대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위선적이거나 찌질한 남자들이 대부분인데 영락없이 내가 그렇게 살더라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감독 자신의 생활고백이라도 되는양 그의 사생활을 유추하고 결부시키는데 익숙하더라고. 실은 자신이 그러고 있는데도 말이지. 만약 어떤 작품이 정확히 내 자신과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라고 느낀다면 이 작품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한게 아닐까?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말하든가, 경험, 생각 등을 드러낸다네. 이때 좋은 작품은 예술가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잠꼬대에 불과하겠지.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 유념해야할게 있는데, 제발이지 홍상수의 사생활, 사적인 것들을 영화와 결부시키지 말라는 것이네. 그러다간 영화를 감상하는게 아니라 그의 사생활 탐구가 주가 될수 있으니 말일세. 이점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도 마찬가지일게야. 홍상수의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은 으레 호기심 많은 자들이 그렇듯 굳이 영화와 사생활을 연결시키거나 알리바이 찾기, 퍼즐 맞추기를 하는 등 뻘짓들을 하더라구. 영화는 그냥 영화 아니겠나? 홍상수의 영화는 그냥 영화이고 픽션일 따름이라는거지. 만약 이점을 잊으면 홍상수의 영화를 제대로 즐길수 없다는거 꼭 잊지 말기 바라네. 

아참 깜박한게 있었군. 헤밍웨이가 천하의 바람둥이였다는거 알고 있겠지? 푸코, 마르셀 프루스트, 지드, 서미싯 모옴 등은 게이였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미성년자 강간범으로 법정에 섰으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게이 소년한테 끔직하게도 맞아죽었지. 뿐만인가. 위대한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제불능의 노름꾼이었으며, 예술의 윤리성을 강조한 톨스토이는 만년에 가정불화로 객사했다네. '내로남불'의 원조랄까, 저잣거리 흔하디 흔한 '불륜로맨스'를 인간조건의 아이러니함으로 승화시킨 안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작가 자신의 불륜 로맨스 경험을 소설화한거지만 오늘날 독자들은 체호프의 사생활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이 이 단편의 위대함을 찬양하기에 바쁘더군. 애고~ 예술가들의 별난 사생활을 열거하려면 하루도 부족할테니 이정도로 대충 줄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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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내 경우 좋은 영화의 기준은 주제, 플롯, 형식이 두루 조화된 작품 완성도 여부다. 반면 난해성, 실험성, 대중성/예술성 등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예를들어 어제 하루 동시에 감상한 아핏차퐁 위라 세라쿤의<열대병>과 일디코 엔예디의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를 비교해보자. 일단 <열대병>은 난해성, 실험성, 예술적 요소가 강한 영화지만 작품성에서는 떨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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