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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블로그 sentiment analogique에서 옮김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의 <윈터 슬립 Winter Sleep>에서 주목할 점은 '타인이 보는 나''내가 만든 나' 사이의 괴리감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바라는 나의 모습, 즉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어서 그게 진짜 나인양 생각한다. 자신이 만든 기준에 부합하는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에 단점을 보지 않고 이상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연기하고 가꾼다.

 

그렇게 가짜의 모습으로 가짜 말을 하고, 가짜 인격을 지닌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을 힘들고 지치게 한다. 자신 스스로 빠져버린 위선의 늪이 무서운건 오류를 자신만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모두가 가짜 연극임을 알고 있는데도 자존심 때문에 쉽게 막을 내리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가면 속에서, 최고의 인격으로 존재하는 그에게 오류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내가 상상하는 나의 모습을 현실의 나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에 집착하는 순간 상상 속의 나를 실제의 나로 착각하고, 오류를 보지 못한 채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

 

"나는 옳고 네가 틀려, 왜냐하면 나는 완벽한 사람이니까." 그 누구에게든 어떤 말을 들어도 자기 합리화를 하고, 타인의 지적에 귀기울이지 않으니 결국 정체되고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렇게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를 인지하고 나면, 그 후의 태도가 어쩌면 인생에서 더욱 중요할 수 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의 의견과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의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간극이 가진 부정성을 긍정의 에너지로 변화시킬 자구책이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좌절하기 시작하면, 자칫 열등감에 빠질 수 있다. 반면에 내가 바라는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의 과정으로 간극을 볼 수 있다면, 스스로를 성장시킬 자양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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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출판사 리뷰

1
오늘날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2015년 2월부터 시작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미투 운동 등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으며,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늘 등장하는 작가가 바로 버지니아 울프다. ‘여성과 소설’에 관한 강연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며,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의 제목을 여성 독립을 은유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또한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소설을 쓴 대표적 모더니즘 작가이며, 그녀의 소설은 지금까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막상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려고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좌절하기 쉽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된 울프의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처럼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려워 무척 난해하게 느껴진다. 에세이는 명확하게 주제 의식을 표현하지만, 20세기 초 영국의 사회와 문화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그 의미를 오롯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책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은 이 같은 버지니아 울프 입문자를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로 초대하는 친절한 안내서다.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올랜도》 등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열네 편의 주요 구절과 집필 배경, 사회 상황 등을 종합하여 각 작품의 의미를 차근차근 살펴봄은 물론 지금 왜 울프가 호명되는지 그 실체를 하나하나 드러낸다.

《자기만의 방》은 소설 못지않게 울프에게 유명세를 안긴 작품이다. 울프는 논객이었다. 그는 당대 사회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회를 향하기보다, 그곳에서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해야 할 여성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게 글쓰기는 단순하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주체의 변용 자체를 끌어내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울프는 줄곧 자신의 경험을 소개한다.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울프는 이 책에서 되짚는다. 사상가로서 울프의 면모가 오롯이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자기만의 방》, 여성 주체를 만드는 법’ 중에서(183쪽)

《댈러웨이 부인》은 울프의 대표작으로,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준비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의식의 흐름’이 전체 이야기를 직조한다. 울프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소설 역시 이야기를 따라가려고 하면 금방 흥미를 잃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울프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보면 숨겨진 의미의 지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런던을 산책하기 좋아하는 클라리사는 울프의 모습과 겹치며, 내면의 광기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셉티머스는 울프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듯하다.  - ‘《댈러웨이 부인》, 작가라는 질병’ 중에서(151쪽)

2
버지니아 울프는 물론 뛰어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지만 그녀의 본모습은 모더니즘 작가, 여류 작가, 페미니스트 작가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다. 저자 이택광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울프, 즉 날카롭고 예리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울프를 새롭게 조명한다. 저자는 잘 알려진 울프의 소설과 에세이만이 아니라 26권에 달하는 일기까지 조사하여 그녀의 일상과 단상을 낱낱이 파악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울프가 제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 영국의 식민지 경영과 제국주의, 노동자의 권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 등 당대의 문제들을 치열하게 고민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글로 표현하고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에세이집 《보통의 독자》 서문에서 울프는 비평가나 학자가 아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보통의 독자’를 이야기한다. 이 ‘보통의 독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던 울프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울프는 과거 자신의 문제와 경험을 사회적으로 확장시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노동자들에게 독서를 권장했으며, 개인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출판하고 공공 도서관에 공급하기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울프는 이렇게 성장한 교양 있는 대중이 민주 사회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누구보다 당대를 예리하게 분석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사상가 울프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 외에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반제국주의자 울프, 반전주의자 울프, 문화비평가 울프는 놀랍고 다채롭다.

울프는 평생 읽고 쓰는 일을 강조했다. 그는 지독한 독서가이자 기록자였다. 이런 노력은 개인의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노동자들에게 독서를 권장했으며, 공공 도서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탁월한 소설가인 동시에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이런 울프의 면모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세상은 울프를 전면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울프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그의 에세이와 일기를 읽은 것은 또 다른 소득이다. 소설만 읽었을 때 뚜렷하지 않았던 울프의 모습이 에세이와 일기를 읽고 나자 선명하게 드러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흑백 사진에 갇혀 있던 창백한 미학주의자가 사실은 뜨거운 심장으로 당대와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살아간 불굴의 활동가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울프가 곁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 ‘프롤로그’ 중에서(6쪽)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울프는 전문직 여성의 출현이라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여성이 어떻게 이 폭력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울프는 전문직이라는 직업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울프가 보기에 전문직은 부르주아 남성 중심주의가 만들어놓은 폐해였다. 울프가 구상한 더 자유로운 사회는 전문화가 없는 사회였다는 점에서 당시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놀랍도록 급진적인 전망이었다.

이런 사상가 울프를 손쉽게 모더니스트 작가로 이름 붙여서 책장에 꽂아버리는 것은 얼마나 게으른 일인가. 울프의 생각은 전문성의 문제가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로 대체되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빛을 발한다.   - ‘《세 닢의 금화》, 자유를 위한 경제 조건’ 중에서(178~179쪽)

버지니아 울프가 가진 정치성의 절정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지식인의 면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울프 문학에 관한 연구들이 이런 울프의 정치성에 집중한다. 울프의 문학을 탈정치적인 모더니즘으로 취급하던 경향에서 차츰 빅토리아 지식인 울프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해온 울프의 면모를 들여다보면 그의 대표작을 다시 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중략) 버지니아 울프의 반제국주의 사상은 초창기부터 모습을 드러내는데, 1915년에 출간한 첫 소설 《출항》부터 이미 영국 제국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 ‘《출항》, 제국에 반대하다’ 중에서(233~234쪽)

3
버지니아 울프는 가장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로 거론되는 동시에,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무지한 중산층 엘리트 여성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울프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온당치 못하다. 그녀는 자유를 위한 물적 토대의 필요성을 정확히 직시했다. 여성이 전문직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런데 울프의 주장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울프는 여성이 자유롭게 전문직에 진출해야 하지만 그곳에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남성처럼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만들어놓은 폭력적인 세계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성이 남성 위주의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한 그녀의 사유는 지금의 영 페미니스트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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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 21세기의 정치 키워드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유튜브 역시 포퓰리즘의 강화에 한몫을 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의 정치는 포퓰리즘이 상수이다. 인류사에서 최초로 포퓰리즘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한 세력은 파시스트들이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파시즘의 과거는 절대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일사분란한 정치적 행동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드러낸 극단적 폭력성은 많은 이들에게 독재에 대한 환멸을 확고하게 자리 잡게 했다. 포퓰리즘과 파시즘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독재자의 인정 여부이다. 포퓰리즘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긴 하지만, 그 지도자가 독재를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은 강력한 지도자가 입안의 혀처럼 굴기 바란다. 자신들의 지지를 받고 집권한 지도자가 독재를 할 경우에는 탄핵시켜버린다. 

종종 한국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와 혼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민주주의가 확고한 정치적 대의를 갖는다고 한다면 포퓰리즘은 대의를 갖지 않는다. 물론 포퓰리즘도 절대다수의 대중을 위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대중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전제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 추상적 대상은 기득권 엘리트라는 대상을 설정해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포퓰리즘의 대중은 그러므로 기득권 엘리트와 짝패를 이루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포퓰리즘은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그 지평 위에서 형성되는 원한 감정(resentment)의 산물이다. 물론 20세기 이후 민주주의는 일정하게 포퓰리즘과 함께 뒤섞여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바로 이런 모습을 띠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유튜브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매체를 통해 형성되어 있는 성과가 없다면 유튜브 역시 이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성제도가 제공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시청자들은 유튜브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유튜브가 기존의 매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고 본다. 다만 기존의 매체를 통해 만들어졌던 구조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지식과 정보생산, 그리고 소비의 헤게모니가 유튜브로 옮겨올 것은 확실하다. 유튜브와 유사한 플랫폼이 넷플릭스이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영화라는 일정한 장르에 부합하는 영상물을 제공한다. 유튜브는 이를 넘어 자기의 영화를 업로드해서 관객과 직접 만날 수 있다. 유튜브가 대세가 되는 시대에 영화의 완성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완성도 높은 영화를 보려고 관객들은 기꺼이 입장료를 지불하고 영화관에 간다. 구매체와 신매체는 공존하겠지만, 주도권을 쥐는 매체는 신매체일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우리는 변화의 와중에 있다. 앞선 매체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유튜브에 이르러 결정적 변화가 생겼다. 이 결정적 변화는 완전한 1인 미디어의 구현이다. 누구든 진짜 같은 영상물을 만들어 보급할 수 있다. 방송국 시청률보다 더 정확하게 ‘구독자 수’가 공개되는 투명한 세계가 유튜브이다. 방송인의 인기도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완벽한 감시의 시스템이다.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야말로 기술이 만들어놓은 다크 유토피아의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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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루 A cousin of human being 에서 퍼온 박철의 시인데, 나에겐 시 보다 블로그 주인의 평이 흥미로웠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이 시의 타자는 뭘까. 이 시와 긴장하고 있는 질서는?  쑥국새, 나무 같은 자연 따위도 영진설비나, 럭키슈퍼 같은 자연과 다를 게 없다. 나무니 숲이, 시의 타자로 중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시적인 주체 같은 건 없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 그런 자리 따위가 그곳에는 없다. 시적 긴장이 과연 시인의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정치 지형도처럼 철저하게 사회적 산물이며, 근대적 풍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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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현성환 역, 새물결(2008년)

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바울을 종교라는 층위에서 읽어내지 않는다. 그에게 바울은 “보편성의 반철학적 이론가”이며 보편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는 행동가이자 투사, 그리고 조직가이다(바디우는 바울을 “모호한 마르크스를 그리스도로 삼은 레닌에 비교”한다).

예컨대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대인,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신앙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를 직접 수행했던) ‘역사적’ 사도들과 의례 문제(그리스도교도가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 등의 유대 의례를 행하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벌였던 갈등은, 바디우가 보기에 바울의 보편주의와 역사적 사도들의 특수주의(유대 공동체주의) 사이에 벌어진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사상과 그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성경 구절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해낸다. 우선 그는 바울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과 부활은 결코 생물학적인 사태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육체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생각은 생명입니다”(「로마서」, 8장 6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하나의 사유이자 분열된 주체의 두 갈래 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며, ‘죽음을 향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분열적 구성 안으로 진입하는) 죽음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활 역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승리, 이러한 “죽음을 죽여버리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그 승리의 가능성을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죄, 율법,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등의 개념이 정교하게 다시 해석되며, 너무도 유명한 세 단어 ― 믿음, 희망(소망), 사랑 ― 가 확신, 확실성, (보편적 힘으로서의) 사랑 등으로 다시 명명되고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얼굴의 바울, 우리 사회를 향해 말 건네고, (신자건 아니건) 우리 모두를 향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눈물짓고, 위협하고, 용서하고, 공격하며, 부드럽게 포용하는 바울과 만나게 된다.

‘하나의’ 진리(그리고 일신론)에서 ‘하나’란 바로 “예외가 없음”, “모두에 대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을 통해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미명하에 보편적 진리에 대한 탐구는 애초에 포기되고, 자본이라는 추상적 보편성만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시대를 뚫고 헤쳐 나갈 사유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 출판사 리뷰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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