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내, 손주 예준이랑 함께 처가 다녀오다. 여름 같은 봄날, 산에 들에 진달래, 개나리, 벚꽃 만발이다. 아장아장 걷는 예준이 뒤를 따라 시골길을 걷다. 논둑길 민들레, 이름모를 풀잎들, 예준이 머리결을 스치는 바람, 아지랑이, 푸른 창공, 저멀리 까치가 날아간다.

2
짐 자무시의 <패터슨>에 따르면, 비록 다람쥐 챗바퀴 도는 생활을하더라도 짬짬이, 꾸준히 아마추어 예술가로써 문학과 영화를 즐기고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일상을 치루는 현실 속에서도 정신은 늘 예술로 향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현실과 예술이 하나로 동화된다. 생활이 예술이고 예술이 생활로 치환되는거다. 그속에서 우리는 생활인은 생활인이되 생활인과 다른 기쁨을 누리고 고단한 삶으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다. 아~ 일상이 예술이 될 수 있다니!

3
좋은 책과 영화를 보면 글을 쓰고싶다. 감동의 진한탓이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과 홍상수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홍상수의 영화는 두 번 봐야 이해가 간다. 가령 등장인물들이 지나가듯 무심히 던진 말들, 아무렇게나 던져진 어떤 장면들, 혹은 인물들의 평범하게 하는 말들을 허투루 놓쳤다간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역시 따라 놓치기 십상이다. 이번에도 두 번을 보고나서야 겨우 이해하였다. <패터슨>은 한번 더 감상하고,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며칠 더 생각하다 글로 옮겨봐야겠다.

4
이젠 고인이됐지만 이청준은 나에게 특별한 소설가다. 스무살 시작된 원양어선 시절내내 나는 학생때와 마찬가지로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다. 그렇다고 원하는 책은 마땅히 없었지만 조악하나마 이 배 저 배에서 구한 책들이 좀 있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청준의 단편 <이어도>를 발견했다. 아마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을 읽은것도 그 무렵이었을거다. 이청준의 <이어도>는 나에게 소설읽기의 재미를 처음 알게한 단편이었다. 내가 평생 문학비평을 좋아하게된 것도 바로 이청준 때문이었으니 나로서는 특별한 작가가 아닐 수 없는거다.

<이어도>를 읽는 순간 직감적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한 단편으로 생각됐다.  제목부터 뭔가를 상징하는듯 예사롭지않았다. 돌이켜보면 작품 분석을 흉내낸 독후감을 끄적였던 기억이 난다.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이청준의 소설집 <소문의 벽> <별을 보여드립니다> 등을 읽었고, 아마 장편 <당신들의 천국>도 이무렵 읽었을거다.

독서회에서 <당신들의 천국>을 읽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 책을 다시 대하는건 20여년만인듯싶다. 어데 이청준뿐일까. 최인훈의 <광장>을 비롯해서 황석영, 조해일, 박태순, 김승옥, 서정인 등 한국의 현대소설 작품을 읽은것이 지난 70년대~80년대였으니 멀리는 30년, 가까이는 20여년 전이다. 어쨌거나 한시절 소설에서 받은 감동으로 잠 못이루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60중반 나이에 다시 읽으려니 감회가 새롭다.

5
오래전 경음악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C씨, 또 다른 악단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는 G씨와 함께 점심식사하다. 식사 후 커피타임까지 서너 시간은 족히 악기, 연주만을 화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이들어서도 흥미롭게 만나기란 역시 같은 취향을 지닌 이가 단연 최고다.

6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고통과 상처를 받지만 위로와 사랑 역시 사람들로부터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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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은 한 경험의 죽음과 동시에 그 증식을 나타낸다. 그것은 세계가 이미 짜맞추어놓은 여러 가지 주제들의 단조롭고도 열정적인 반복과 같은 것이다 . 즉, 수많은 사원들의 정면에 무수하게 새겨놓은 형상인 육체, 형태나 색채들, 수() 또는 비탄 같은 주제들 말이다. 그러므로, 끝으로 창조자의 위대하고도 순진한 세계 속에서 이 시론의 주된 테마들을 재확인해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어떤 상징으로 보거나 예술작품이 부조리의 한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의 병에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한 인간의 사고 전체에 반향되고 있는 그 병의 한 징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처음으로 정신을 그것 자체 밖으로 나오게 하여 타자와 대면시킨다."    - 카뮈 <시지프의 신화>148쪽 (책세상, 김화영 옮김)

 

1

읽는다 또 읽는다. 탐색한다 또 탐색한다. 절대 멈추지 않는다. 옆길 보지않고 곧장 직진이다. 쉬지 않는다 계속 간다. 결과들을 쓰고 또 쓴다. 비록 예술작품은 아니지만, 끼적끼적 낙서에 불과하지만, 하루치 일기쓰듯 쓰고 또 쓴다. 실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서는 진즉 알았다. 공기마냥 세상은 무의미로 가득하다는걸. 결국 알면서 모른체한거다.

 

2

카뮈의 친구였던  모르방 르베스트가 말하듯, "매일매일의 극단한 긴장이라는 고독한 노력을 통해서 인간은 매일매일 자신의 유일한 진리, 즉 도전이라는 진리를 증거해 보일 수 있다."(<알베르 카뮈를 찾아서> 나남, 1987년)따라서 무의미함과 부조리에 대해 반항한다는게 꼭이 예술작품이 아니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시지프처럼 종당에는 도로(徒勞)에 그칠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밀어 올린다는 것. 떨어지면 다시 밀어올리고, 떨어지면 또 밀어올리고.....

 

- 글쎄, 누가 이런 글 읽을랑가?
- 읽긴 뭘, 심심풀이 땅콩이지

- 그럼 뭐하러 쓰남요?

- 이것말고 달리 할일이 없으니까. 심심해서...

- 그래도 그렇지, 차라리 쓰레기라도 줍는게 낫지 않아요?

- 하다보면 애초에 없던 어떤 의미같은게 생길수 있거든. 누가 읽을 수도..

- 읽어서 뭐하게요?

- ....

- 왜 그렇게 자꾸 책을 사들이세요?

- 읽는게 재밌거든. 알아볼것도 있고.

- 평생 읽었으니,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대강 알겠네?

- 아직 모르겠어. 글쎄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모르는게 나오니.

- 희안하기도 하지. 책 한 권 안 읽은 나도 잘만 알겠던데. 

- ....

- 당신 죽으면 이 많은 책 다 어떻게 할거예요?

- 어떻게 하긴, 자식들이나 누구 살아있는 이가 알아서 하겠지

- 그래도 대책은 세우고 사들여야지. 자꾸 짐덩이가 돼가잖아요.

- 글쎄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살아있을때 좋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뭐. 

- 하이고~ 동문서답이 따로 없네.

- 그러게, 자네나 카뮈한테나 동시에 면목 없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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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실존주의 계열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고있다. 사실 실존주의는 철학보다 문학 쪽으로 접근하는 게 효율적인데, 실존적 인식은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실감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어제까지 멀쩡하던 이가 말기암 판정을 받고 며칠 못산다든가, 느닷없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해맨다고 해보자.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길경우, 아무리 이해해보려고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생이 합리적으로 설명 되지 않는다.

세상은 결코 어떤 질서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그동안 굳게 의지했던 신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게 된다. 철석같이 굳게 믿었던 것들이 단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 너무 황당해서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상태, 이게 바로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부조리'(absurd)다. 

좀 진지하게 세상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세상의 무의미함과 부조리하다는 인식은 통과의례처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나는 20대초반무렵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간다.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의 문학작품을 비롯해서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셰스토프의 사상으로 뻗어나간다.  이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에게 설득당하면 필경 교회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대개는 니체를 기웃거리거나 마지막 관문인 하이데거에 도착한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사상은 워낙 난해해서 중도 포기하고 대충 마무리한다. 그러다 점점 나이들면 세상살이에 푹 빠져 실존이고 부조리고 언제 그랬냐는듯 뒷전으로 팽개친다. 우선 눈앞의 먹고사는 일이 급급해서다. 

요즘 사르트르의 <구토>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주자격인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있다. - '존재의 우연성'을 깨닫는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과 세상의 부조리함에 눈을 뜨는<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쌍생아거나 사촌쯤된다 - 인생을 부정의 시각으로 본 <이방인>과 에세이<시지프 신화>를 먼저 읽고, 반대로 인생을 긍정한 <페스트>와 에세이<반항하는 인간> 등을 차례로 읽을 예정이다. 

어제 우연히 알았는데, 카뮈의 단편 <손님>을 영화화 한 다비드 욀오팡 감독의 <신의 이름으로>는 실존주의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 같다. 더 시간이 난다면 사르트르 철학을 전공한 변광배 교수의 저서, 이제는 고인이 된 박이문 교수의<문학과 철학>등 입문자들에게 사르트르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 몇몇 글도 함께 읽어보려 한다.

한가지 아쉬운건 <실존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조가경 박사의 저서는 워낙 한자가 많아 서재에 그냥 모셔둘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고 했다. 같은 의미에서 만약 검토되지 않은 종교를 믿는다면 우상이거나 미신일 확률이 다분하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이라면 자신의 신앙이 보다 확고하기 위해서라도 실존주의의 세례를 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선다면 세상은 더욱 살기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겠지만 그렇지않고 습관적으로 그저 믿삽네다~ 만 연발하면 필경 현대판 부뚜막 신을 믿는거나 다를바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실존주의와 실존철학을 알아보려고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스케치만 하고 말았다. 물론 주요한 개념이나 핵심 요지는 알고 있지만 디테일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방인>의 뫼르소나 <구토>의 로캉탱,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를 제대로 이해한것은 아마 40무렵쯤이 아니었을까싶다. 어느덧 60중반 나이인 지금, 새삼 실존주의 문학을 읽으려는건 세상에 대한 실존적 고뇌거나 지적 욕구라기보다 마치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는 기분내지는 문학작품을 즐기려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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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온, 예준이의 재롱
2. 아내와의 대화, 커피 타임
3. 아들 부부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4. 독서
5. 영화
5. 트럼펫 연습
6. 청소 마친 후 독서실 풍경
7. 업무 종료된 새벽 1시
8. 등교 차량에서 감상하는 FM 클래식
9. 블로그 글쓰기
10.독서회
11.동네카페
12.Y씨 부부와의 커피 타임
13. 커피 로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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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화사했던 가로수 벚꽃도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국도 주변 산중턱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내와 함께 대야 5일장에 가다. 올해부터는 뒷뜰 텃밭에 채소를 심지 않기로 했다. 그래봐야 손바닥 크기지만, 작년까지만해도 토마도 몇 그루, 상추 쬐금, 부추, 고추 두 세 그루, 가지 등 이것저것 심었다. 하지만 잡풀 뽑아야지, 물 줘야지 여간 공이 드는게 아니어었다. 재미로 키운다지만 재미치고는 공력이 너무 들어갔다. 그렇다고 맨땅을 놀릴 수 없어 과실수를 심기로 했다.

자두, 왕대추, 대봉시 감나무 등 세 그루 35,000원에 구입했다. 점심식사는 가끔 들르는 임피 '금송'에서 갈비탕으로 대신했다. 갈비탕 4인분을 추가로 구입. 하나는 제수씨, 또 하나는 며느리 것. 대야 장터 명물인 도너츠를 살까했지만 워낙 붐벼 포기했다. 모처럼 밖에 나온김에 익산 막내 제수씨 댁에 들르기로 했다. 제수씨것 우리것해서 수국 두 개를 구입했다.  

요며칠 오케스트라 문제로 고민이 컸다. 나름 열심히 연습한다고는 했지만 당최 연주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덩달아 재미도 없고 즐겁지가 않았다. 나로 인해 앙상블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이거 민폐가 아닐까? 노력한다고 무작정 되는건 아닌듯했다. 오케스트라 활동한지 벌써 10년째인데 주눅이 들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럴줄은 정말 몰랐다. 

간혹 '오케' 활동 그만하고싶다는 단원들이 있긴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대수롭잖게 '힘내세요', '조금만 참으세요', 하고 말렸다. 그런데 정작 내가.....최근에는 <오후의 기타>까지 읽으며 잘 해보려고 다짐까지하지 않았던가. 실은 이거 아니라도 책이며 글쓰기, 음악감상 등 해야할게 많다. 이쯤해서 그만둘까? 아니다 미련이 남는다.  

아들 지훈이는 그동안 한게 아까우니 좀 참아보라고 했다. 아내는 휴식기간을 가져보라하고, 은별이는 전공자답게 레슨을 권유한다. 어떻게하지? 잠시 시간을 갖고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오늘이 대야 장날인데, 구경이나 가보자고요". 아내의 은근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역시 밖에 나오니 울쩍했던 기분이 좀 풀린다." 행복이 별것 아니잖아요? 작은것으로도 충분히....."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나이쯤이면 작은것에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열정이 솟는다고 마구 쏟아부을게 아니고, 설사 선의적인것이라해도 분별이 있어야한다. 물러설 때는 과감히 물러서고 주춤주춤 미련을 갖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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