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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군산시(인재양성과)가 주관하는 '동네카페' <클래식과 인문학의 만남>을 진행하고, 오늘은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를 감상하는 등 연이틀 분주하게 지냈다. 아무리 바빠도 트럼펫 연습만큼은 거를 수 없어 빠듯한 시간을 트럼펫 연습에 할애해야 한다. 퇴직하면 시간여유가 충분하겠지, 했지만 막상 그게 아니다. 오전 내내 영화 감상 준비하느라 저녁식사 마치고나서야 겨우 조간신문을 읽었다.

한겨레신문은 매주 금요일 '책과 생각' 이라는 신간 서평 기사를 꽤 많은 분량의 별지로 묶어 낸다. 나는 늘 책을 끼고 사는 생활이라 신간 소식이 궁금한데 특별히 구독하는 서평지는 없고, 매주 한 차례 한겨레 리뷰 정보가 유일하다. 전문 서평지와 달리 신문 리뷰는 분량면이나 깊이에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워낙 따근한 정보들인데다 요긴한 읽을거리가 많아 반드시 챙겨 읽는다.  

오늘 기사 중 재야 철학자인 전대호 변역의 헤겔<정신현상학 강독 1>(글항아리, 2019년)에 대한 리뷰가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된 헤겔의 <정신현상학> 중 '서문', '들어가는 말'을포함해 의식에 대해 다룬 1~3장을 번역하고 강독한 내용을 엮었다. 

출판사에 따르면, 앞으로 이 강독 시리즈는 총 5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번역서가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학계에서 통용되던 헤겔 철학의 몇 가지 핵심 개념어들을 다소 파격적으로 번역한 점이다. 예컨대 무매개적(unmittelbar) / 단박, 지양(aufheben)/거둠, 즉자(Ansich)/그 자체, 대자(Fürsich)/자기를 마주함, 즉자대자(Anundfürsich)/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함(또는 ‘다움’)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이와같은 새로운 번역어가 과연 보수적인 학계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못 궁금하다. 여하튼 나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창의적으로 보일뿐 아니라 독서열을 은근히 부추긴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오래 전에 임석진 교수가 번역한 한길사판 <정신현상학>을 구입한 바 있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아트 앤 스터디'에 개설된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 강의> - 김 교수의 강좌는 4장 '자기의식'과 5장 '이성' 등 두 장으로 국한된다 - 를 청취해볼까 했지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함께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서라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새 번역서가 출간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욕심을 한번 내봐야겠다. 다음은 앞에 열거했던 몇 가지 개념어의 이해를 위한 리뷰 중 일부다.     

역자는 이런 새로운 개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홍길동을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먼저 서자로서 자기의식이 없는 꼬마 홍길동의 상태는 ‘홍길동 그 자체’다. 하지만 성장하며 서자라는 자의식을 품고 자신과 불화하게 되어 길을 떠나 외톨이가 된 홍길동, 자기로부터 멀어지면서 ‘자기와 화해한 홍길동’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홍길동이 바로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이다.

그렇다면 ‘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은 무엇일까. 전대호는 일반적인 헤겔 해석자들이 이를 ‘해탈한 홍길동’으로 설명해왔다고 지적한다. 대신 그는 이를 역동적 부정성을 품은 ‘홍길동의 일생’ 또는 ‘홍길동다운 홍길동’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우리말 ‘다움’엔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헤겔 철학적인 의미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저잣거리의 말엔 ‘사람임’이라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사람다움’의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헤겔의 사상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내가 깨달은 바로는, 모든 것이 걸린 관건은 진실을 실체로서뿐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로서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헤겔이 자신의 깨달음을 요약한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내가 깨닫고 보니 사람임에 머물지 않고 사람다움에까지 이르는 것에 만사가 달렸더라.” 감각에 매몰된 인간의 정신이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을 다루며, 정신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자유임을 밝히는 <정신현상학> 전체의 논지가 이미 서문에서부터 예고되는 것이다.

2부에서 진행되는 강독은 한줄 한줄 해설해나가는 대신 넓은 보폭으로 따라가면서 주제에 대한 해설과 사상사적 맥락을 담은 에세이 성격의 글들이 이어진다. 그는 특히 헤겔을 절대정신, 시대정신처럼 “개인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막강한 힘을 준엄하게 선포한 인물”로 보는 기존의 오해를 벗기는 데 주력한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하는 사람, 바로 그것이 헤겔이 말하려는 진실의 진면목에 가깝다” “헤겔 철학이 그리는 주체는 찢어진 주체이지, 소위 절대자가 아니다”라는 대목들이 그렇다.   - 2019. 4. 12. 한겨레신문,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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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기타
김종구 지음 / 필라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학생시절 브라스밴드를 한 후로 30년가까이 트럼펫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다시 시작한게 10년쯤. 지금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지만 지난 10년, 숙제 같이 늘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게 있다. 어떻게해야 연주를 잘 할 수 있지?

한겨레신문 편집인이자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김종구의 음악 에세이 <오후의 기타>(필라북스, 2019년)가 최근 출간되었다. 아마추어 연주자이니 필경 나와 비슷한 애환이 있지않을까? 더구나 책을 펴낼정도면 연주 실력이 상당한 수준일터여서 귀동량할 요량으로 조촌동 영풍문고로 달려갔다.
 
에세이 풍으로 쉽게 쓴 책이라 술술 재미있게 읽히고 어떤 대목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악기를 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대체로 비슷하다. '어떻게해야 연주를 잘 할 수 있지?'

요즘 중년 남자들 사이에 색소폰 열풍이 일고있다. 나의 학창시절은 기타가 유행이어서 한번쯤 기타를 해보지 않은 이가 없을정도였다. 당시는 쇠줄로 된 통기타로 건전가요니 싱얼롱 등을 주로 했고, 다른 쪽에서는 <장고><파이프 라인><상하이 트위스트> 등을 즐겨 배우고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 <오후의 기타>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영화<금지된 장난>의 주제가인 <로망스>는 세월이 가도 변치않는 명 연주곡이다.  

<오후의 기타> 덕분에 오랫만에 나르시소 예페스의 기타 연주 <알함브르의 회상>과 <아랑훼즈 협주곡>을 감상했다. 기타의 원조는 스페인이다. 작곡가 요아킨 로드리고, 유명 연주자인 안드레아 세고비아, 나르시소 예폐스 등 대부분 스페인 태생인데, 마침 원양어선 생활을 대서양 스페인령 라스팔마스에서 한 탓에 기타 곡은 나에게 친근한 편이다.

책의 중간쯤에서 저자는 <카바티나>라는 곡을 거듭 언급한다. 기타 명곡인듯한데 곡명이 생소하다. 나 같은 기타 문외한은 대개 <로망스>나 <알함브르의 회상>정도는 안면이 있지만 <카바티나>는 좀 낯설다. 어떤 곡이지? 호기심이 일었다. 유튜브를 검색하니 기타리스트 존 윌리엄스의 연주가 있다.

연주를 듣고 알았는데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주제가다. 멜로디 첫 부분이 흘러나오자, 가만, 어데서 많이 듣던 곡이다. 그러니까 제목만 몰랐을뿐  멜로디는 이미 낯익다. 곡을 듣고 있자니 묘하게도 콧날이 찡하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 2악장을 배경음악으로 쓴 <윈터 슬립>도 그렇더니......아마 두 곡 모두 잔잔한 분위기이며, 애상어린 선율 때문인것 같다. 

최근 내가 진행하는 독서회에서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더구나 회원들이 모두 오케스트라 단원이라 토론작으로 <오후의 기타>는 더없이 안성맞춤일것 같으니 말이다.  저자가 언급한 기타 명곡도 함께 감상하고 책 토론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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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형국이랄까, 요즘하고 있는 발터 벤야민 공부가 그렇다. 인문학 탐구을 하다보면 으레 똑같은 난관에 부딪치곤한다. 다름아닌 철학의 기본 소양이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으면 당최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죽어라 연습해도 방법이 잘못되고, 기본이 안 되다보니 성과가 날리 만무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딜레탕트의 숙명인것을. 뭐 방법이고 뭐고 따로 없다. 그냥 디립다 파는 식인데, 좌충우돌 앞뒤없이 달리다보면 나도모르게 방법이 생긴다. 포기 할 수 없으니 뻘짓하는셈치고 그냥 이렇게 내달린다.

첫 시도는 '아트앤 스터디'에 개설된 몇 개의 벤야민 강좌인데 엉뚱하게도 강의 청취가 아니라 강의록 읽기였다. 독서실 일을 하려다보니 강의를 모두 들을수 없고 강의비는 절약해야겠고, 해서 고육지책으로 택한 방법이다. 최근에 타계한 김진영 선생의 강의는 강의록만으로도 무방하다. 선생의 육성 강의를 채록해서 글로 옮긴듯한 강의록은 현장 강의와 거의 차이가 없다. 원저 읽을 실력은 안 되고 여러가지로 엄두가 안 나니 최대한 2차서에 의존해야 한다. 권용선을 비롯해서 문광현, 최문규, 최성만 교까지 몇 권의 2차서를 대충 훓어봤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이름 석자가 눈에 띄면 아무리 소소한 글, 단문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읽는다. 가령 이택광 선생의 블로그에서 파울 클레의 <앙겔로스 노부스>도 그렇게 읽은 글 가운데 하나다. 평전 읽기도 중요한 순서. 사실 벤야민의 글과 책 중에서<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순서상 맨 나중에 읽어야하지만 맘이 급하니 책을 펴들수밖에. 수잔 벅 모스의 <아케이트 프로젝트> 해설집도 그래서 두서없이 읽은 책이다. 어제 오늘 하워드 아일런드와 마이클 제닝스 공저의 <발터 벤야민 평전>(글항아리)을 열독했다.

강의록과 몇몇 책에서 얻어들은 사전 지식때문인지 예기치않게 제법 진도가 나갔다. 단숨에 150여쪽을 읽다보니 어느덧 300여쪽이 넘어간다. 모두  900여쪽에 가까운 두툼한 분량인데 언제 다 읽지? 했지만 막상 그게 아니다. 이 책의 장점은 벤야민이 살아간 그때그때의 행적과 삶의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동시에 글을 소개하는 식이다. 가령 1920년대 초반무렵의 생활을 소개하면서 첫 번째 책인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개념>과 <괴테의 친화력> <독일 비애극의 기원>을 함께 설명한다. 그렇다보니 어떤 글과 사상이 발생한 배경을 알 수 있고, 저서의 내용을 입체감있게 이해 할 수 있다.

<벤야민 평전>을 그럭저럭 재밌게 읽을 수 있던 또 다른 이유는 지난 세 달에 걸쳐 여러 개의 강의록과 권용선, 최성만, 문광훈, 최문규의 2차서를 읽는 동안 슬슬 맷집이 커진 덕이 아닐까싶다. 평전 읽기를 마치면  또 다른 워밍업을 시도할 생각인데, 이미 구입해둔 게르셈 숄렘의 <한 우정의 역사>와 브루노 아르파이아의 <역사의 천사>, 제이 파리니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 등 두 권의 소설을 읽고, 계속해서 이미 읽은 강의록과 2차서를 한번 더 재독할 작정이다. 그런 후 최종적으로  원전 읽기에 도전할 생각인데, 여전히 의문 부호는 달렸지만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는건 분명하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벤야민에 매달릴까? 글쎄 나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건 끊이지 않는 호기심과 재미 때문이다. 사실 이것아니면 달리 할게 없으니 그렇기도 하다. 하긴 뭐를 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냥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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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 독서는 두 방향이다. 하나는 인문학서고 다른 하나는 세계문학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런 패턴은 계속될게다. 인문학은 현재 3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발터 벤야민 관련 2차서, 세계문학은 조셉 콘라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인데, 국내 번역이 그리 많지않은 조셉 콘라드는 전작을 읽을 예정이다. 현재 <암흑의 핵심> <로드 짐>을 끝냈고, <노스트로모>와 <비밀 요원>을 함께 읽고있다. 안타깝다! 시간은 제한적이고, 읽어야할 책은 무수하게 쌓여가니 마르케스는 <백 년의 고독>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세계문학은 주로 현대소설에 집중하려고한다. 우선 콘라드를 마치면 카프카, 사르트르, 버지니아 울프, 포크너, 카뮈, 헤밍웨이 등의 전작을 읽고, 과거 몇 차례 시도한바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도 재도전해야겠다.

발터 벤야민을 어데까지 읽어야할까. 철학이든 문학이든 결국 원저를 읽어야 마땅하지만 아직 벤야민은 힘에 부친다. 이미 구입한 조효원의 <부서진 이름(들)>, 최문규의 <파편과 형세>, 하워드 아일런드 공저 <발터 벤야민 평전>을 마저 읽는게 순서일듯. 아쉽지만 바디우, 지젝, 이글턴, 타우베우스 등의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은 당분간 유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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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강주헌 역, 모멘토/ 출판사 리뷰 옮김  

21세기 들어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이른바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의해 다시 지펴진 신에 관한 논쟁.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정말 무용지물인가? 이성은 믿음 없이 홀로 설 수 있을까?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리즘은 왜 생겨났으며, 세계화된 자본주의하의 고달픈 삶에서 믿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마르크스주이자의 시선으로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 해답을 전개하고 있다.

박학한 좌파 이론가이자 탁월한 논쟁가인 테리 이글턴은 이 책에서 새로운 무신론자들, 이른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세계관을 해부하고 반박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의 앎과 삶 전반에 관한 비판적 관점과 분석틀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무신론을 비판하는 특이한 경우다.)

예수 시대에서 중동의 최근 역사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9.11까지, 에우리피데스에서 토마스 만과 살만 루슈디, 슬라보예 지젝까지,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오가며 그는 과학과 신학, 합리성과 진보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와 인간해방, 문명과 문화와 야만에 관해 예리한 해석을 제시하고 우리가 이뤄내야 할 세상의 비전을 그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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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조은경 역, 알마/ 출판사 리뷰 옮김  
<신의 죽음 그리고 문>는 신이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어떻게 신이 18세기의 합리주의에서 살아남아 믿음이 실종된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시대에 극적으로 재등장했는지를 묻는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에서부터 모더니스트의 예술까지 모든 현상이 한때 신이 있었던 곳의 빈 공간을 메우며 초월을 대체하는 형태를 띤다. 신의 대체자 역할을 하는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문화다. 예술, 문화, 이성이 모두 나름대로 번성하고 있지만 그러면서 때때로 이념적 부담을 져야할 때가 있는데 이는 불공평한 처사다. 테리 이글턴은 이러한 것이 결코 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고 본다.

이 책은 신에 대한 얘기가 아닌 신이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위기에 대한 이야기다. 이 논점을 개진하기 위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는 계몽주의로 시작해 급진 이슬람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어떻게 신이 18세기의 합리주의에서 살아남아 믿음이 실종된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시대에 극적으로 재등장했는지 이야기한다.

신의 대리 역할을 했던 모든 지적 현상은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가 있다. 테리 이글턴은 종교, 예술, 이성, 문화 가운데 어떤 것도 신의 대체자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하며 ‘전능한 신’이야말로 진정 없애버리기 힘든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책을 통해서 전달하는 메시지 중 가장 특별한 부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무신론이 없었다. 무신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는 또다른 쟁점은 문화는 이론과 실제, 엘리트와 민중, 영혼과 감각을 통합하는 종교의 능력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종교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의 민간 문화라는 점을 손쉽게 증명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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