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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우선 소설이 펼쳐내는 허구적 상상의 세계, 기기묘묘한 인간들의 삶을 재현해내는 것이 흥미로우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 지적인 즐거움,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몇 가지 이유때문이다. 그런데 곤혹스러운 것은 소설이 단순히 즐거움과 아름다움의 향유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파리대왕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하는 문학은 행복과 즐거움만이 아닌 어두운점, 악한 점, 고통스런 점까지 모두 소설화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소설읽기의 즐거움이 아닌 어려움, 고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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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했던 젊은시절은 문학과 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매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만큼 독서에 임하는 태도는 진지함을 넘어 책이 삶의 전부인양 착각했다. 하지만 나이들다보니 문학은 그저 문학이며, 책은 책에 불과할뿐 세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책 몇 권 읽는다고 크게 바뀌는 것 같지도 않고, 문학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해서 기껏해야 세상의 많은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읽기는 때로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또한 좋은 소설은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삶에 대해 여러 의문과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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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대왕>을 감상하는내내 우울하고 공포스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만약 책읽기가 일차적으로 예술미의 향유와 쾌락을 맞보기 위해서라면 되도록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만 골라 감상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고단한 세상사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사람살이가 유쾌하고 즐거운것만은 아니듯이 영화, 문학도 마찬가지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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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리 후크의 <파리대왕>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이 그렇듯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해부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인간을 폭력과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 그런 폭력과 권력에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법과 질서가 있는 평화로운 곳이지만, 우리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떤 곳에 폭력의 위험성이 도사릴 경우가 있다. 전국민에게 악몽같은 사건으로 각인된 윤일병의 죽음’, 어린아이를 삽자루만한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유아원 폭력, 중학 동급생끼리 수년간 돈뺐고, 조직적으로 구타한 학교폭력이 매일같이 자행되건만 부모, 교사 모두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윤일병의 의무대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과 동일한 세계이다. 이 소설에서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은 그들만의 전체주의적 질서를 만든다. 한국 군대는 불시착해버린 고립된 섬이었다. <파리 대왕> 소설과 동일하다. <진짜 사나이> 내무반에서는 자기 상관이 좋아하는 축구팀, 좋아하는 음식까지 시험을 봐야 했다. 폐쇄된 공간, 고립된 인간관계, 서열과 형님문화, 좌표 상실. 이곳에서는 죽거나 저항하거나 비굴하거나,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윌리엄 골딩은 인간 본성이 이타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침팬지와 인간은 차이가 없다. 조카 침팬지가 힘이 세면 삼촌 침팬지를 돌로 쳐서 머리를 박살낸다. 자기 바나나 먹었다고 해서. 여기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이 잔혹하게 자기 또래 아이들을 죽이고 배제해버린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주목하는 동물이고, 자기와 남을 비춰보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울을 닦지 못하게 구조적으로 규정되고, 압박을 받으면, 그 마음의 거울에는 때가 낀다. 반성능력은 사라진다. 내 바나나 먹었다고 삼촌 침팬지 대가리를 부수는 힘과 에너지만 남게 된다."   -  김종대 <지배하는 군대가 악마를 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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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은 무인도에 상륙한 일군의 소년들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 악한 본성을 알레고리로 드러낸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랠프의 역할이 좀 유약하게 묘사되는반면 잭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랠프와 돼지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민주적 사고를 지닌 인물을 대표한다면, 잭과 그의 심복격인 로버트는 비합리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폭력적인 인간을 각각 대표한다.

영화는 초반, 여느 소년집단이 있을법한 일을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잠깐 놀랄일도 금방 어린아이 특유의 일로 여기지만 점점 진행되면서 폭력과 권력이 드러난다. 그런점에서 이 영화는 음악의 속도처럼, 라르고, 아다지오, 알레그로, 프레스토 식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가공할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있던 세상의 황담함내지는 비상식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의 세상은 공평치못하고, 폭력적인반면, 다른 세상은 공평하고 평화롭다. 이 경우 어느 한 쪽이 진실이 아니라 둘 모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한쪽만을 보고믿는탓에 다른쪽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다.

<파리 대왕>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 폭력을, 그것도 평소 상상할 수 없던 가공할 폭력을 경험하는 기분을 느끼게한다.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날 느닷없이 불치병 선고를 받았을때의 기분이 이럴것이다. 평소 건강할때는 세상사람 모두가 건강하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내 자신이 아프면, 게다가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한순간 생각이 달라진다. 폭력도 마찬가지여서 한순간 세상은 부당함과 폭력으로 가득차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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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애초에 책읽기의 즐거움만을 목표로 할 수 있다. 책과 문학은 일차적으로 쾌락의 대상이니까. 하지좋은 책은 세상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독자의 나이브한 태도를 용인하지 않는다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이 옳지않다고. 부당하고, 폭력적이며, 아름답지 않다고 질타한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이른바 즐거운 책읽기가 아닌 괴로운 책읽기로 바뀐다. 그럼 독자는 어떻게 해야하나? 세상사 내 알바니 여전히 책읽기만을 즐겨도 되나? 아니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는데 일조 해야하나? 것은 각자의 실존적 선택이자 개인의 몫이다. 작가는 단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되어있다고 드러낼뿐이니까.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를 띄고 있다. 우리는 책을 읽듯 세계를 읽을 수가 없다. 세계라는 책은 너무 크고 복잡하여, 그것의 구조를 곧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저마다 무당이며 점쟁이며 교사이어서, 어느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행복스러운 것은 아니다.

 

보바리 부인의 경우에서처럼 책 속에서 본 대로 살려 하다가는 파멸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 키호테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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