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좋은 영화, 잘 만든 영화란 어떤 것을 말할까. 아내와 함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폴링 인 러브>를 연이어 감상했다. 두 편 모두 전형적인 로맨스-멜로, 불륜담이다.  

- <폴링 인 러브>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취향에 맞던데 당신은?
- 두 편 모두 괜찮네요. 깔끔하달까.
- <매디슨...>은 절제감으로 꽉 짜인데반해 <폴링 인 러브>는 좀 자유롭지?
- 그렇긴해요.
- 뭐 좀 영화에 대해 할말 없을까?
- 글쎄 딱히....
- 나도 그래, 마땅히 할 애기가 떠오르지 않아. 마치 당연한 일을 본 느낌처럼. 
- 역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출중한것 같애. 섬세한 감정 표현이 얼굴 표정, 손짓 하나하나까지  전체에 묻어나거든. 
- 여자 배우가 정말 연기를 잘 하네요.
- 워낙 뛰어난 배우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괜찮지? 서부극에 출연을 많이 한 탓이겠지만 강한 남성 이미지에 적역인 배우인데 말야.  마치 두 배우를 위해 만든 영화라고나할까. 연기도 연기지만 우선 캐스팅이 잘 된것 같애. 반면에 <폴링 인 러브>의 로버트 드니로는 좀......남자 역은 약간 부드러운 이미지가 좋지 않을까? 드니로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워낙 강한 이미지다보니 좀 그렇더라구. 나도모르게 자꾸 <대부>가 떠오르는거야. 상대를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빛조차....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이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역할이 많은 탓 같애.    

아내와 나는 두 편 모두 그럴듯한 멜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데 합의했지만 대화는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았다. 두 편 모두가 이미 모범 정답을 제시한 느낌이어서 굳이 답을 찾고자 수고를 할 이유가 없었던거다. 결국 이 말은 어떤 의미나 담론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여하튼 전형적인 로맨스-멜로라는것, 깔끔한 수작이라는것. 딱 여기까지가 감상담의 전부였다. 자, 그렇다면 두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  이 말을 하기에 앞서 안톤 체호프 원작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허진호 감독의<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교해보자. /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신연식 <로마서 8:37> 2017년                        미이케 다카시 <할복, HARA-KIRI> 2011년


신연식 <로마서 8:37>

예술작품에서 종교를 언급할 경우, 대개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하나는 종교철학- 신학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사회적- 제도적 관점이다. 가령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유현목의 <사람의 아들>이 전자의 관점으로 접근했다면, 신연식 감독의 2017년작 <로마서 8: 37>은 후자의 접근법이다. 물론 모든 예술작품이 명확하게 두 관점으로 나뉘는건 아니지만 대개 그렇다는 거다. 

신연식의 <로마서>는 한국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 작품은 한국의 기독교, 더 좁게는 한국의 교회 제도를 향해 매스를 들이댄다. 참고로 최근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몇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성폭력, 교회 세습, 대형화, 교회 재산을 둘러싼 파벌과 분쟁, 비민주적 제도, 교회간의 부익부 빈익빈 등등. / 계속   


                                                니키타 미할코프 <위선의 태양> 1994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홍상수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년)은 극중 남자 주인공이 자기가 사귀는 연인이 누구인지, 그녀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을 다룬 내용이라네. 주인공은 자기가 본것,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한채 실망스럽게도 친구가 제공하는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다 결국 자신이 가장 믿고 가까워야할 연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친구의 말을 더 믿는 꼴이 되지.    

이 영화는 거듭해서 관객에게 묻는다네. 당신이 알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 단 타인의 견해나 주장을 믿지 말고, 당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대로,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줏대있게 말해봐라. 어렵쇼! 자기가 본 바를 말하라니 남이 본것을 또 옮기는구만. 당신 앵무새야? 꼭두각시야? 왜 당신의 여자인데도 자신의 생각을 믿지 못하고, 기껏 타인의 견해에 기대나? 그렇게도 줏대가 없어? 그렇담 당신의 소중한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고생깨나 해야겠군.

홍상수에 따르면, 제 아무리 귀한것이 있어도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냐. 만약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의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그걸 알기위한 과정이 비록 험난해도 회피하지 말고, 하나하나 부딪치고, 돌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며 고난의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는거지.   

사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라네. 왜냐면 영화 속 스토리가 바로 내 얘기를 하는것 같아서지. 대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위선적이거나 찌질한 남자들이 대부분인데 영락없이 내가 그렇게 살더라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감독 자신의 생활고백이라도 되는양 그의 사생활을 유추하고 결부시키는데 익숙하더라고. 실은 자신이 그러고 있는데도 말이지. 만약 어떤 작품이 정확히 내 자신과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라고 느낀다면 이 작품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한게 아닐까?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말하든가, 경험, 생각 등을 드러낸다네. 이때 좋은 작품은 예술가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잠꼬대에 불과하겠지.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 유념해야할게 있는데, 제발이지 홍상수의 사생활, 사적인 것들을 영화와 결부시키지 말라는 것이네. 그러다간 영화를 감상하는게 아니라 그의 사생활 탐구가 주가 될수 있으니 말일세. 이점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도 마찬가지일게야. 홍상수의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은 으레 호기심 많은 자들이 그렇듯 굳이 영화와 사생활을 연결시키거나 알리바이 찾기, 퍼즐 맞추기를 하는 등 뻘짓들을 하더라구. 영화는 그냥 영화 아니겠나? 홍상수의 영화는 그냥 영화이고 픽션일 따름이라는거지. 만약 이점을 잊으면 홍상수의 영화를 제대로 즐길수 없다는거 꼭 잊지 말기 바라네. 

아참 깜박한게 있었군. 헤밍웨이가 천하의 바람둥이였다는거 알고 있겠지? 푸코, 마르셀 프루스트, 지드, 서미싯 모옴 등은 게이였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미성년자 강간범으로 법정에 섰으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게이 소년한테 끔직하게도 맞아죽었지. 뿐만인가. 위대한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제불능의 노름꾼이었으며, 예술의 윤리성을 강조한 톨스토이는 만년에 가정불화로 객사했다네. '내로남불'의 원조랄까, 저잣거리 흔하디 흔한 '불륜로맨스'를 인간조건의 아이러니함으로 승화시킨 안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작가 자신의 불륜 로맨스 경험을 소설화한거지만 오늘날 독자들은 체호프의 사생활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이 이 단편의 위대함을 찬양하기에 바쁘더군. 애고~ 예술가들의 별난 사생활을 열거하려면 하루도 부족할테니 이정도로 대충 줄이겠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내 경우 좋은 영화의 기준은 주제, 플롯, 형식이 두루 조화된 작품 완성도 여부다. 반면 난해성, 실험성, 대중성/예술성 등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예를들어 어제 하루 동시에 감상한 아핏차퐁 위라 세라쿤의<열대병>과 일디코 엔예디의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를 비교해보자. 일단 <열대병>은 난해성, 실험성, 예술적 요소가 강한 영화지만 작품성에서는 떨어진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2003년)에 대한 인터넷 감상평을 일별하다보니 게중 이런 평이 있었다. "과장된 연출과 감정 유도장치 없이도 관객이 분노, 슬픔, 허무, 무력감까지 온전히 느끼게 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특유의 연출기법이 가장 빛나는 영화".

 

정말 그럴까? 미안하게도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우선 스타 배우답게 자연스런 연기로 극찬받은 숀 펜, 팀 로빈스의 연기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부자연스러웠고, 극적 반전과 스릴러 장르에다 무거운 메시지를 뒤섞으려는 연출은 과장도 이런 과장이 따로 없었다. 딸애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아빠 지미(숀 펜), 어릴적 성폭행에 따른 트라우마로 시종일관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인 데이브(팀 로빈스)의 연기는 거의 TV 드라마 수준이고, 연출자의 감정유도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가족의 왕'이라는 아버지의 도덕적 알리바이를 위해 - 연출자의 의도는 강력한 미국비판이겠지만 - 떠들석한 퍼레이드 신을 배치하고, 잔인하게 친구를 죽인 지미가 환한 얼굴로 퍼레이드 대열에 동참하도록 하는데, 아무리 픽션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노골적이고 상투적인 장면이 어데있단 말인가. 

또 있다. 데이브의 아내 셀리스트(마샤 게이 하든)가 남편을 의심(배신)한 대가로 어쩔줄몰라하며 군중 속에서 서성거리는 장면은 전형적인 현대판 권선징악이다. 오호라~ 그럭저럭 반전과 스릴로 유지되던 영화는 이 지점에서 완벽한 3류 통속극, 예외없이 할리우드 제품으로 전락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배경에 단골로 등장하는 퇴폐적인 원색 배경, 이른바 액션 페인팅의 화가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대중적, 상업적 화사한 이미지들. 글쎄, 이래서 나는 영화든 그림이든 문화상품으로서의 메이드인 USA 제품이 좀 껄끄럽다. 마지막으로 꼴불견 하나 더.  

봉준호의 미국판 <마더>랄까, 파이널 신에서 <마더>의 엄마 격인 지미(혹은 그의 아내)를 손가락 총으로 저격하는 형사 친구 숀(케빈 베이컨)의 모습은 지구촌 헌병이자 빅브라더 미국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자 도덕적 비판인것쯤은 알겠는데, 이게 또 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자고로 '비판'이란 관객이나 독자가 눈치못채도록 은근슬쩍해야 하거늘 천하가 다 알게 드러내놓고 해야 맛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동안 이어지던 숨막히는 스릴, 반전과 반전- 후반부 절묘한 교차편집(cross cutting)도 한 몫 거든다 -  이 무색하리만치 노골적이고 교훈적인 연출은 거듭 할리우드 제품임을 여실히 확인케 한다. 여하튼 분명한것은 할리우드 제품은 제아무리 기발하고 아이디어가 넘쳐도 절대 A. 히치코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있다. 즉 아카데미상에 최적화된 영화라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