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성들이 어울리면서 각자의 취향을 공통분모로 삼아 중년의 삶을 보다 흥겹고 재미있게 보내기 위한 동호인들의 현실이었다. (...)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의 예배를 비롯한 모든 모임에는 한결같이 열성을 내는 편이었다. 도시의 소비자들이 아니랄까, 전일해야할 종교적 희망은 종종 그들의 복잡다단한 세속적 욕망에 떠밀려 종적을 찾을 길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예수의 제자로서 짊어져야할 자기 십자가를 각자의 생활양식에 얹은 채 (마치 스피노자의 인상처럼) “고독한 현자이자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모래밭에 숨은 바늘을 돼지뒷다리로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노릇이 되고 말았다.

예수를 만난 게 위험한 ‘사건’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양식의 실천 속에서 그 사건과의 검질긴 접속을 ‘좁은 문 속의 희망’으로 구체화하려는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철학마저도 당대의 현안을 해결하려는 외교관적 입장과 시각에서 접근했던” 라이프니츠처럼, h와 그들의 친구 기독교인들은 종교신앙마저도 삶의 욕망과 쾌락을 해결하려는 외교관적 입장과 시각에서 멀거니 쳐다볼 뿐이었다.     -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스피노자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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