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그린파파야'에서 있었던 독서모임이 끝나고나서 두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민음사, 방미경 역)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에 관해서인데 첫째, 코스트카, 헬레나, 야로슬로프가 왜 별도의 쳅터로 등장하며, 그정도 비중있는 인물인가? 이들은 주인공이랄 수 있는 루드비크와 어떤 관계인가. 둘째, 루드비크가 진심으로 사랑한 루치에는 소설 상 중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왜 베일을 쓴듯 모호하게 등장하는가, 또 회원들의 관심사이기도 한데, 루치에는 코스트카와 루디비크 중 누구를 더 사랑했을까? 의문을 따져보기에 앞서 소설의 주제부터 살펴보자.
나는 토론 때 "<농담>은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 파멸하는 한 개인의 운명”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덧붙여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란 1940년 후반 체코 공산정권 수립에서 1960년 후반 '프라하의 봄‘까지 진행된 ‘교조적 사회주의’를 뜻하고, 이런 배경 속에 루디비크의 ‘엽서사건’이 일어났다, 라고 말한바 있다.
즉,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문제삼는다는 거다. 그래서 <농담>은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타킷으로 삼기위해 먼저 여러 형태의 ‘교주주의'를 소개한다. 가령 제마네크, 알렉세이의 교조적 사회주의에 대한 맹신을 비롯, 코스트카의 교조주의적 신앙, 야로슬라프의 시대착오적인 민속예찬, 헬레나의 루디비크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 등이 그것인데, 여러 형태의 교조주의 삽화는 '교조적 사회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한데 독서회가 끝나고 생각해보니 야로슬라프의 민속 예찬이 왜 교주주의적인지, 코스트카의 기독교가 왜 도그마며, 교주주의적 신앙인지, 나아가 헬레나의 사랑을 맹목적이라고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정작 내 자신부터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루드비크는 자신을 파멸시킨 제마네크의 교조적 사회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견지하며, 복수심까지 품지만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엽서사건이 벌어진 대학시절, 당기위원장인 제마네크와 위원회 학생들에게 자신은 결코 사회주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격렬히 항의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회주의를 비난했다는 죄명으로 군대(수용소)에 끌려가면서도 여전히 제마네크, 알렉스의 교조적 사회주의만을 경멸을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교조주의에 대한 몇 개의 삽화들은 루드비크를 파멸케한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의문이긴 마찬가지여서 모임이 끝나고도 영 개운치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사유의 아름다움>(* 청년사, 김병욱 역)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귀절을 발견했다.
“내가 <농담>을 쓰기 시작한 날들을 생각해 본다. 애초부터 완전히 본능적으로 나는 야로슬라프라는 등장 인물을 통해 소설이 자신의 시선을 과거의(대중 예술의 과거의) 심층부 속으로 잠기게 하리란 것을, 그리고 나의 등장 인물의 <자아>가 그 시선에 의해 그 시선 안에서 드러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주역도 이렇게 창조되었다 : 유럽의 네 과거에 접목된, 네 개의 개인적인 공산주의 세계 : 루드비크 : 신랄한 볼테르적 정신 위에서 자라는 공산주의 ; 야로슬라프 : 민속에 보존된 족장적 과거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공산주의 ; 코스트카 : 복음서에 접목된 공산주의 유토피아 ; 헬레나 :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열정의 원칙으로서의 공산주의. 이 개인적 우주들은 모두 그들이 해체되는 순간에 포착되었다. 공산주의 분해의 네 형태 ; 이는 또한 : 유럽의 오랜 네 모험의 붕괴를 의미한다.” -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28쪽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코스트카, 야로슬로프, 헬레나가 등장하는 삽화는 내가 이해했던대로 교조적 사회주의를 부각키 위한 것이 아니라 네 가지 형태의 공산주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좀더 부연해보자.

코스트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정신적 흐름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회 평등과 사회주의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초기 사회주의 시대의 열성적 공산주의자들을 떠올려보면, 가령 루치에를 내게 넘겨준 그 의장같은 사람들은 회의적인 볼테르파들보다는 독실한 신앙인에 가깝게 보입니다." (민음사판, <농담> 374쪽) 라고 루디비크에게 말한다.
그래서 루드비크의 사회주의가 아닌 기독교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종교관은 원시기독교의 주장과 유사하며,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이념과도 통한다. 과거 80년대 국내에 소개된 일본 신학자 다가와의 저서 <원시 그리스도교 연구>가 이런 내용들이며, 작가는 코스트카의 그리스도교를 통해 루디빅크가 신봉하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야로슬라프의 민속에 대한 강력한 애착이다. 루드비크는 야로슬라프의 민속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현대의 민속이 사회주의에 이용되는 점이 불만이다. - 우리나라 민속축제가 민족주의, 국수주의를 배경으로 체제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 - 한데 작가에 따르면, 이런 야로슬라프의 삽화, 즉 <왕들의 기마행렬>을 비롯한 민속의 과도한 열정과 집착은 "민속에 보존된 족장적 과거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공산주의" 한 형태라는 거다.
헬레나의 등장은 상당히 흥미있다. 나는 헬레나를 교조적, 맹목적 사랑의 신봉자로 생각한데반해 작가는 호모 센티멘탈리스 -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도 등장하는 개념이다 - 의 구현자로 설정했다. 즉 "열정의 원칙으로서의 공산주의의 표본"이라는 거다. 인류 역사에서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공산주의 이상에 불타는 지식인들이 적지않았다. 그런데 <농담>에서 헬레나가 그런 인물을 표상하는 점은 재밌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에서 헬레나를 사랑의 교주주의라고 했는데,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점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끝으로, 루치에와 코스트카, 루드비크와의 관계를 살펴볼 차례다.
"코스트카는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의미하였고, 그녀를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하였으며, 그녀를 더 잘 사랑할 줄 알았다.(...) 즉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 쪽으로 향하고, 나에게 와 닿는 쪽에서만 그녀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모든 부분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그녀 자체의 모습, 그녀 혼자만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 그러나 나는 이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 <농담> 420쪽
루치에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코스트카의 기독교와 루디비크의 사회주의 이념과의 대립적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즉 루드비크는 루치에를 진심으로 사랑한게 틀림없지만 코스트카가 보기에는 루디비크가 신봉한 사회주의 이념이 그랬듯이 "일종의 추상이고 전설이자 신화" "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치에는 루드비크가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반면에 코스트카는 기독교적 정신, 사랑의 정신으로 루치에에게 다가섰기 때문에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루치에는 두 사람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여인일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이나 기독교적 이념의 대상, 즉 민중, 인민 등 이름없이 역사의 곁을 스쳐가는 하나의 상징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