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음습한 뒷골목 기도원이 그렇듯, 우리 주위엔 종교를 단지 힘겨운 인생살이의 도피처로 여기는 유약한 사이비 종교쟁이들이 종종 있다. 마찬가지로 문학이 현실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 현실 부적응자들의 자위수단이거나 현실도피의 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이비 문학인들도 있다. 만약에 문학이 그정도 유약하고 시시한거라면 대체 무엇에 쓸수 있단 말인가. 문학을 향한 구애자들의 스팩트럼은 천차만별이다. 가령 한쪽에 셰익스피어가 있는가하면 다른 한 쪽에는 평생 작품집 한 권 못내고 죽어간 무명 문사들이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위대한 작가로 착각한채 불구로 살아가는 사람들, 습작 수준도 안 되는 글을 명문으로 오해하며 혼신을 다해 습작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다. 하루하루 냉험한 현실은 어김없이 닥아오건만 대책없이 현실을 허비하는 사람들... 하지만 문학은 그들 모두에게 허용되며, 망상과 희망, 헛된 신기루와 환희에 찬 상상력속에 거하게 한다. 아이러니치고는 참 딱한 아이러니다.

2
문화인류학자 호이징거는 <호모 루텐스>에서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이라 정의한 바 있다. 문학의 기능 중 하나는 즐기기, 즉 오락이다. 일찌기 인간은 문학을 유희의 한 대상으로 발명했다. 따라서 문학은 특별한 것이 아닌 그냥 수많은 오락꺼리 중 하나일뿐이다. 그런데 만약 문학이 단지 오락꺼리, 유희수단에만 불과했다면 진즉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어떤 점이 수많은 오락가운데서 위대한 오락으로 격상시켰을까. 좋은 문학은 그럴듯한, 있음직한 허구를 통해 현실을 정확히 겨냥한다. 그리고 문학이 겨냥한 현실은 궁극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현실, 뒤바꿔야 할 현실이며 동시에 현실을 개조한다는 것, 바로 이점이 문학의 위대성이다. 

3
나이들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 이미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 한다는 점이다. 즉 건망증이 심해지는데, 또 다른 이유로는 생활의 단순화로 인한 고정된 사고,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탓도 있다. 나이들면 그래서 자기확신이 강하고, 고집스러워지며 편협해진다. 현실적으로 나이들면 들수록 점점 인간교류가 협소해진다. 더 이상 호기심, 신기한게 없고, 열망도 없으며 찾을것도 없다. 평생 경험했는데 뭘 더 찾아야한단 말인가. 당연히 자기 세계에 굳게 갇힐 수밖에. 그렇다면 스스로 자초한 건망증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있다. 바로 문학이 그것. 문학을 통해서라도 간접경험을 더 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굳어진 상상력을 부드럽게 재생하는거다. 결정적으로는 인간 삶의 정체는 평생 찾고 또 찾아도 결코 전모를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을 통해서나마 계속 찾는 수밖에.

4
매일 아침 고시텔 생활을 하는 군여고 학생들을 싣고 둔율동 구름다리 밑을 왕복한다. 최근 읽고 있는 <탁류>때문일텐데, 평소 별뜻없이 지나치던 구름다리가 요즘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구름다리 정 중앙이 바로 '정주사'의 집터이기 때문. <탁류>는 현재 내가 사는 군산이 주무대인데다, 풍자와 해학에 넘친 문장이 한껏 흥미로워서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흔히 채만식의 <탁류>는 염상섭의 <삼대>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쓰여진 최고의 장편으로 알려져있지만 암흑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하더라도 걸작으로 추켜세우기에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가령  소설 중반부터 끝 부분까지 거의가 초봉이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탓에 피폐한 식민지 조선의 서민 생활상을 대변하는 정주사의 일상 주변이나 미두장 주변을 맴도는 조선인들의 곡절만은 생활상을 알수가 없다. 더욱 문제는 주인공 초봉이라는 캐릭터가 철저히 수동적이며, 한많은 조선조 여인의 일생을 방불케하듯 일방적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작가의 인형 같은 느낌이다. 아마 이렇게된데는 신문연재다 보니 독자들의 흥행을 의식했거나 당시의 가혹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녔을까 추측해본다. 

* 고태수의 죽음 이후, 즉 무대를 군산서 서울로 옮긴 뒤의 <탁류>는 지극한 통속 소설로 보인다. 장형보 같은 인물의 극악 취미는 초봉의 속물 근성과 함께 통속적 흥미에 봉사할 따름이다. 이와 대비시킨 계봉, 남승재 쪽은 장형보 같은 인물의 극악 취미로 말미암아 오히려 골계적인 흥미거리로 전락한다.(...) <탁류>가 당시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소설다운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전제를 승인하고 난 자리에서라면, 이 작품은 한갓된 세태 소설 혹은 통속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키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가 역사의 방향성을 몰각했거나 적어도 불투명한 상태에 놓였음에서 연유된다. 고쳐 말해, 소설 양식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치 못한 탓이다. 소설은 단편 모양 인생의 단면을 그린다든가 한 사람의 전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작가가 소설 양식의 본질을 익히 파악하고 있더라도, 역사적 사회적 여건에서 방향성을 떠올리지 못한 상태에 처해질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시대도 있는 법이다.    - <채만식의 문학세계> (김윤식 편 <채만식> 수록,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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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만행, 6·25 동족상잔, 베트남전 민간학살, 박정희 시대의 무자비한 합법적 국가폭력, 광주 만행, 세월호, 한국의 라스푸틴 최순실과 박근혜, 탈북이주민/동남아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유린 내지는 학대, 성소수자에 대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탄압 등 돌아보면 하나하나가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지만 만천하에 내세울 자랑꺼리도 있다. IMF조기졸업과 촛불혁명! 우리는 지난한 역사 가운데 많은 헛발질을 했지만 단 한나,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위대한 촛불혁명을 일으킴으로써 동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임을, 아니 세계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민주주의 국가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유일한 과제는 남북분단 하나뿐이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며칠째 가슴설레이는 나날을 보낸다. 남북회담이 처음이 아니건만 이처럼 손꼽아 기다리기도 처음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크리스마스나 설날을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그러던차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칼럼이 눈길을 끈다.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교수의 글인데 회담을 하루 앞둔 싯점에서 시기적절한 글이라 일부 인용한다.   

"(...)북은 21일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을 중지하고 핵시험장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한국은 23일 대규모 연합훈련인 키리졸브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경찰 3천여명을 동원해 사드기지 공사를 강행했다. 북이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중국과 연합 군사훈련을 시작했다면, 미사일 기지 공사를 강행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전쟁이 끝났다고 선포하는 종전선언을 포함한 평화체제 구축 방안이 논의된다고 한다. 정전상태를 끝내고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찾으라는 것은 환갑이 넘은 정전협정에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자고 한 것은 북이었고 최근까지 한국도 미국도 이러한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한국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도 않았다. 정전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1년이 되어서야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현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며 정전에 합의했다. 북이 정전을 거부하고, 평화협정 협상을 거부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북은 1990년대 들어 핵무기 개발에 나서고 최근 몇년 ‘핵위협’을 가했다. 미국은 1950년 11월30일 “핵무기 사용의 적극적 고려”를 공언한 이후 ‘핵위협’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제 북은 평화체제에 대한 반대급부로 비핵화까지 내놓았다. 중국도 ‘쌍궤병행’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며 같은 제안을 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거부하고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북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만일 미국이 주도적으로 핵위협을 거두겠다며 평화체제 구축을 요구했을 때 북이 그 숨은 의도는 북-중 동맹 와해에 있다고 거부한다면 우리는 북을 어떻게 볼까?

찰스 오스굿은 1962년 ‘전쟁이나 항복이 아닌 대안’에서 분쟁 해소 방안을 제안했다. 점진적이고 상호적인 조치들을 주고받아 긴장을 완화하자는 제안으로 영문약자 ‘GRIT’로 많이 알려져 있다. 분쟁의 한 당사자가 작지만 일방적인 양보 조치를 취하고 상대방에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희망한다고 의사 표시를 하는 것으로 그 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상대방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상호적 조치를 취하면 첫 당사자는 두번째의 양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바야흐로 ‘평화의 선순환’이 시작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긴장완화는 일방의 조치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듯 평화도 서로 바라보며 같이 노력해야 만들 수 있다. 상대방의 손만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손뼉 소리는 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과오만 비난하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는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요컨대 한반도 위기 상태는 쌍방과실이다. 쌍방이 노력해야 평화도 가능하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묻는다. 우리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할 용기가 있는가."    - 서재정(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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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투스오케스트라 제 3회 정기연주회 (2017 7.8.  군산 예술의전당)

 

 

 

올해 9월로 예정된 칸투스오케스트라 제 4회 정기연주회 연주곡은 일단 세 곡으로 정해졌다.  1부에서 서곡과 콘첼토 한 곡씩, 2부에서 메인 곡으로 심포니 한 곡이 일반적인 컨셉인데, 이번 역시 모차르트 오페라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서곡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 라단조 K. 466 >, 드보르작 <교향곡 제 9번 '신세계'> 등으로 구성되었다.

 

작년 7월 3회 연주회를 마치고 곧장 드보르작을 시작했으니 심포니 연습은 벌써 9개월째로 접어든다. 현재 1악장, 4악장은 대략 80프로 정도 진척이 되었고, 2악장은 50프로정도, 3악장은 이제 막 시작했다. 문제는 처음에 쉽게 생각했던 모차르트 곡들이다.

 

내가 연주하는 트럼펫의 경우, 모차르트는 지난 정기연주회를 통해 <이도메네오>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을 연주한 적이 있어서 무난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연습이 시작되자 그게 아니었다. 시종일관 정박자에 단순한듯 보이는 모차르트 곡이 왜  어렵게 느껴질까. 비록 아마추어 연주자지만 나름의 이유는 이렇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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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일본 사소설의 사전적 정의 두 가지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글을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사생활을 거의 허구를 섞지 않고 충실하게 재현한 자전적인 산문작품을 일컫는데 20세기 초 일본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됐다. 원래 자연주의는 프랑스의 에밀 졸라에서 보듯이 추악한 사회현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지만 일본의 자연주의는 특이하게도 가치관을 배제한 무조건적인 현실묘사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변형되면서 사회와 유리된 채 작가의 사생활만을 노골적으로 고백하는 모습을 갖게 된다.” - 다음 사전

 

작가가 대개 작품 속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어 서술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소설'20세기 초반 수십 년 동안 일본 문학을 지배했던 자연주의 운동에서 생겨났다. 이 용어는 고백소설과 '정신자세' 소설이라는 2가지 유형의 소설을 가리킬 때 쓰이는데, 고백소설은 흔히 자신을 비하하는 장황한 토로가 특징이며, 정신자세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생각이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마음가짐을 파헤치는 소설이다.” - 박현수 <일본 문화 그 섬세함의 뒷면>, 책세상 

 

직장이나 가정이 없을 뿐 아니라 있더라도 오직 글쓰기 위해서만 있어야 하는 상황에 자기를 놓지 않으면 글쓰기란 당초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글쓰기를 일러 '사소설'이라 한다. 심경소설이라든가 자기를 소재로 한 글쓰기와 '사소설'은 이점에 크게 구분된다. '사소설'이란 인공적인 글쓰기라는 것. 그러니까 놀이의 일종이라는 것. 생활=현실과 무관하면 할수록 투명, 순수해진다는 것, 적어도 이런 원칙 위에서 씌어지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당연히도 독자적인 법칙이 있게 마련이다. 생활이 지닌 가치관과는 별개의 가치관을 가져야 함이 그것이다. 이를 일러 구도 정신으로서의 예술성이라 할 것이다.” - 이태준 <까마귀>(문학과지성사), 작품해설 

 

첫 번째와 두 번째 인용문에 의하면 사소설은 개인의 사생활이나 심경을 쓴 소설이다. 그런데 세 번째 인용문의 <까마귀> 작품해설에서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사소설과 심경소설을 명확하게 구분한 후 일본의 사소설을 "구도 정신으로서의 예술성"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사소설과 심경소설의 구분이다보다시피 위 인용문들은 사소설과 심경소설을 한쪽에서는 구분 하지 않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명확하게 구분한다. 그 이유가 뭘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인용문을 소개한다.

 

여기에서부터 예술가 생활이라는 문제, 예술과 실생활과의 상관 관계가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다. 예술가의 경우, 그중에서도 일본의 사소설가와 같은 경우, 예술가 생활의 지속과 가정 생활의 평온과는 종종 일치하지 않는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예술가의 정열을 조금씩 침체시키고, 가정의 위기라는 희생물에 의해, 비로소 그 예술 충동은 절박감을 획득한다. 사소설이 생의 위기 의식에 모티브를 가지고 있고, 그 위기감이 형이상적인 생의 불안과 고독에서 단절된 구체적인 것으로서 성립된 이상, 그러한 경사는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도쿄에서 조촐한 하숙 생활을 시작으로 하여, 그 하숙비를 계속 떼어먹는 데다, 여자를 데려와 동거하고, 그러면서도 남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생활 불능자, 성격 파산자로서 출발한다. 이미 그들은 출발시점부터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생활 실격자였다. 그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긍지는 예술가로서의 진실성 밖에 없었다. 겨우 그 진실성을 알리바이로 삼으며, 그들은 극빈한 생활도 참고 견디어 냈다.

 

그들은 예술가로서 작품의 리얼리티가 아닌, 제작 태도의 성실성에 매달리는 일 이외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라고 한다면, 그들이 근대소설로서의 예술적 방법 따위는 확립할 틈도 없이, 비참한 일상생활의 단편을 그 파멸적인 모습으로 문학 세계에 들여놓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음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일상성의 차원과 예술의 차원을 등가로 묶음으로써, 간신히 직업 작가로서의 생활이 성립된다. 그러나, 그런 작가 생활에서도(혹은 그런 작가 생활이기 때문이야말로), 예술가 생활 고유의 이율배반은, 그런 모습을 통째로 보여준다. '소설을 쓸 수 없는 소설가''소설 쓰기에 번민하는 소설가'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제 거기서는 현실 처리와 예술 처리의 구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다만 꼬리를 삼키는 뱀의 괴로운 듯 또아리를 튼 모습뿐이다.

 

사소설에서는 어디까지나 예술 처리에 악센트가 나타나고, 거기에 예술지상주의적인 마지막 카타르시스를 희구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심경소설에서는 현실 처리를 위해서 예술 처리를 일단 희생으로 삼아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 이토 세이() <일본 사소설의 이해>( 유은경 역, 소화) /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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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이태준의 단편선집 <까마귀>(문학과지성사)를 읽는다. <복덕방> <불우 선생> <까마귀> <달밤> <해방 전후> 등등. 명색이 문학애독자로 자처하는 나로서는 부끄러운 일인데, 한국문학사에서 이효석과 함께 단편소설의 전범으로 꼽는 작가를 이제사 알아보았으니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다. 물론 해방 후 좌파 문학을 한 전력과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백안시되다보니 나 역시 쉽게 접할 수가 없긴 했다. 그렇다고 아예 기회가 없었던건 아니다. 지난 80년대 기민사에서 월북작가 작품집을 출간했을 때 이태준의 단편집도 출간한바 있기 때문이다. 이후 창작과 비평사에서 <문장강화>도 출간했던것으로 기억나는데, 이제사 작품을 접하고보니 참으로 만시지탄일뿐이다.

 

<해방 전후>는 제목 그대로 해방 전후를 배경으로 한 단편인데, 작품성 여부를 떠나 당시 우리 문단, 사회 분위기, 일제 치하에 이어 해방직후 좌우 대립의 혼란스런 상황에 처한 지식인들의 고뇌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어 흥미가 있었다. 

"단편이란 소설 형태 중에서 인물 표현을 가장 경제적이게, 단편적(斷片的)이게 하는 자라 생각하면 고만이다. 인물, 행동, 배경이 전체적으로 균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면 인물에만 치중하고, 행동이면 행동, 배경이면 배경에 강조해서 단일적인 효과를 거두는 것이 단편의 약속이다. 단일적이게 어느 한 가지가 강조되도록만 구상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되도록 절약하는 것이다."    - 이태준 <무서록>

이태준의 전매특허인 휴머니즘, 페이소스 넘친 따스한 시선은 어느 단편이든 어김없이 짙게 배어있다. 절제감있는 문장,  작고 세심한 눈길, 뭔가 미진한듯 여운을 남긴 끝맺음은 더욱 일품이다. 천성이 이런 작가에게 굳이 현실참여니 역사의식이니 하는 타박은 시대상황이 그랬으니 하고 그만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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