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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음습한 뒷골목 기도원이 그렇듯, 우리 주위엔 종교를 단지 힘겨운 인생살이의 도피처로 여기는 유약한 사이비 종교쟁이들이 종종 있다. 마찬가지로 문학이 현실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 현실 부적응자들의 자위수단이거나 현실도피의 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이비 문학인들도 있다. 만약에 문학이 그정도 유약하고 시시한거라면 대체 무엇에 쓸수 있단 말인가. 문학을 향한 구애자들의 스팩트럼은 천차만별이다. 가령 한쪽에 셰익스피어가 있는가하면 다른 한 쪽에는 평생 작품집 한 권 못내고 죽어간 무명 문사들이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위대한 작가로 착각한채 불구로 살아가는 사람들, 습작 수준도 안 되는 글을 명문으로 오해하며 혼신을 다해 습작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다. 하루하루 냉험한 현실은 어김없이 닥아오건만 대책없이 현실을 허비하는 사람들... 하지만 문학은 그들 모두에게 허용되며, 망상과 희망, 헛된 신기루와 환희에 찬 상상력속에 거하게 한다. 아이러니치고는 참 딱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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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 호이징거는 <호모 루텐스>에서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이라 정의한 바 있다. 문학의 기능 중 하나는 즐기기, 즉 오락이다. 일찌기 인간은 문학을 유희의 한 대상으로 발명했다. 따라서 문학은 특별한 것이 아닌 그냥 수많은 오락꺼리 중 하나일뿐이다. 그런데 만약 문학이 단지 오락꺼리, 유희수단에만 불과했다면 진즉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어떤 점이 수많은 오락가운데서 위대한 오락으로 격상시켰을까. 좋은 문학은 그럴듯한, 있음직한 허구를 통해 현실을 정확히 겨냥한다. 그리고 문학이 겨냥한 현실은 궁극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현실, 뒤바꿔야 할 현실이며 동시에 현실을 개조한다는 것, 바로 이점이 문학의 위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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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 이미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 한다는 점이다. 즉 건망증이 심해지는데, 또 다른 이유로는 생활의 단순화로 인한 고정된 사고,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탓도 있다. 나이들면 그래서 자기확신이 강하고, 고집스러워지며 편협해진다. 현실적으로 나이들면 들수록 점점 인간교류가 협소해진다. 더 이상 호기심, 신기한게 없고, 열망도 없으며 찾을것도 없다. 평생 경험했는데 뭘 더 찾아야한단 말인가. 당연히 자기 세계에 굳게 갇힐 수밖에. 그렇다면 스스로 자초한 건망증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있다. 바로 문학이 그것. 문학을 통해서라도 간접경험을 더 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굳어진 상상력을 부드럽게 재생하는거다. 결정적으로는 인간 삶의 정체는 평생 찾고 또 찾아도 결코 전모를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을 통해서나마 계속 찾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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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고시텔 생활을 하는 군여고 학생들을 싣고 둔율동 구름다리 밑을 왕복한다. 최근 읽고 있는 <탁류>때문일텐데, 평소 별뜻없이 지나치던 구름다리가 요즘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구름다리 정 중앙이 바로 '정주사'의 집터이기 때문. <탁류>는 현재 내가 사는 군산이 주무대인데다, 풍자와 해학에 넘친 문장이 한껏 흥미로워서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흔히 채만식의 <탁류>는 염상섭의 <삼대>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쓰여진 최고의 장편으로 알려져있지만 암흑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하더라도 걸작으로 추켜세우기에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가령 소설 중반부터 끝 부분까지 거의가 초봉이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탓에 피폐한 식민지 조선의 서민 생활상을 대변하는 정주사의 일상 주변이나 미두장 주변을 맴도는 조선인들의 곡절만은 생활상을 알수가 없다. 더욱 문제는 주인공 초봉이라는 캐릭터가 철저히 수동적이며, 한많은 조선조 여인의 일생을 방불케하듯 일방적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작가의 인형 같은 느낌이다. 아마 이렇게된데는 신문연재다 보니 독자들의 흥행을 의식했거나 당시의 가혹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녔을까 추측해본다.
* 고태수의 죽음 이후, 즉 무대를 군산서 서울로 옮긴 뒤의 <탁류>는 지극한 통속 소설로 보인다. 장형보 같은 인물의 극악 취미는 초봉의 속물 근성과 함께 통속적 흥미에 봉사할 따름이다. 이와 대비시킨 계봉, 남승재 쪽은 장형보 같은 인물의 극악 취미로 말미암아 오히려 골계적인 흥미거리로 전락한다.(...) <탁류>가 당시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소설다운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전제를 승인하고 난 자리에서라면, 이 작품은 한갓된 세태 소설 혹은 통속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키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가 역사의 방향성을 몰각했거나 적어도 불투명한 상태에 놓였음에서 연유된다. 고쳐 말해, 소설 양식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치 못한 탓이다. 소설은 단편 모양 인생의 단면을 그린다든가 한 사람의 전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작가가 소설 양식의 본질을 익히 파악하고 있더라도, 역사적 사회적 여건에서 방향성을 떠올리지 못한 상태에 처해질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시대도 있는 법이다. - <채만식의 문학세계> (김윤식 편 <채만식> 수록,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