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읽는데 한계가 있으니 욕심껏 사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느정도가 적당할까. 사상서나 두툼한 문학서들은 예외겠지만 일반적인 책들은 대략 3일~ 5일이면 읽을 수 있다. 따라서 한 달에 10권정도 구입하면 무난하겠다. 하지만 이게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게 문제다. 도대체 절제를 모르는 이 지독한 책 욕심, 지적 호기심을 어찌할것인가. 시간적 여유나 독해력으로보면 도저히 불가능한데도 대책없이 사고 또 산다. 서가에는 빈 공간이 없어 틈새에 찔러넣는다. 이윽고 서가 귀퉁이나 책상에도 쌓여간다. 서가, 책상, 서재에 널부러진 책, 책. 책들.....

 

 언제 읽을지, 읽는다고 이해가 되긴 할지,  호주머니 사정은 어떤지, 한데도 이것저것 따질것 없이 일단 사고본다. 최근 구입한 네 권 짜리 칸트선집이 그런 경우인데,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언젠가 읽어낼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구입부터하고 보는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하튼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지금 당장 안 읽어도 그냥 바라만봐도 좋다. 아마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 한 번쯤은 했을법하다.

 

애초 발단은 왕은철 교수가 엮어 펴낸 <조지프 콘래드>(동인) 때문이었다. 며칠전 우연히 한길문고에서 호주 태생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클라이브 제임스의 에세이집 <죽음을 이기는 독서>(민음사, 쏜살문고)를 발견했다. 독서가 죽음을 이긴다? 제목이 묘하게 끌렸다. 백혈병으로 시한부 삶을 사는 저자가 병상에서 쓴 에세이집인데, 조셉 콘라드의 소설을 세 번이나 언급했다. 콘라드라, 그렇잖아도 언제 시간되면 읽어보려던 차였다. 나 역시 반평생을 뱃생활을 한지라 선장생활까지 한 콘라드의 전력만으로도 족히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전작을 읽어? 이미 그의 소설 몇 권과 연구서 등을 갖고있는 터지만, 혹 다른 번역서가 더 있을지 모른다. 중고도서 전문 '북코아'를 검색하던 중 왕은철 교수(전북대 영문과)가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을 엮은 <조지프 콘라드> 를 발견했다. 특이한것은 양장본 400여쪽에 이르는 이 책의 정가가 28,000원인데비해 판매가는 불과 7,000원이었다. 아무리 중고도서라지만 명색이 학술서인데 이렇게 저렴할 수 있나? 그러다 이 책을 판매하는 북코아의 '나눔마켓책방'이라는 서점에 동인출판사에서 간행한 영미문학 관련서들이 상당수 있는 것까지 알게되었다. <조지프 콘라드>뿐 아니라 대부분의 책들이 전문 학술서치고는 너무 저렴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나눔마켓'은 이곳저곳 기증받은 도서의 판매 수익금으로 사회봉사를 하는 기독교 봉사단체였다.  

 

각설하고. 나눔마켓의 보유도서 중 내 관심은 딱 하나. 영미문학 전문 출판사인 '동인'의 간행 도서뿐이었다. 몇 권만 구입하지 하다가 권 당 평규가격이 불과 4,000~5,000원 내외라니 도저히 자제가 안 되었다. 하지만 꾹 참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꼭 읽을 책 몇 권만 구입하자. 아니지 쓸만한 책이면 나중에 읽기로하고 그것까지만 구입하자. 아니지....이것만, 딱 이것 한 권만만 더 어쩌고 하면서 슬슬 장바구니를 채워나갔다. 실탄은 충분했다. 지난 달 지인에게 중고 트럼펫을 넘기고 받은 일금 백만 원이 착실히 통장에 있는터였다. 여하튼 구입은 나중 문제고 일단 장바구니에 넣고보자. 급기야 장바구니 옆구리가 터지고 쭈그러들건만 개의치 않고 넣고, 넣고 또 넣는다. 이쯤이면 됐지? 한것이 결국 아래의 목록이다.  

 

대부분 신간서나 다름없는 새 책들 총 100권에 구입비 47만원. 권당 4,700원이니 문고판 한 권 값도 안 되는 미안할정도로 저렴한 가격이다. 에라 모르겠다, 장바구니 클릭! 주문한지 불과 이틀만에 책이 도착했다. 대형 박스로 세 개. 30중반인 아들 녀석이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이게 대체 뭐여~ 책 아녀? 임마, 너 아뭇소리 말아. 엄마 알면 나 맞아죽는다.

 

방에 풀어놓으니 책 부피가 어마무시했다. 아흐~ 판타스틱! 무지개, 서산에 걸린 오색빛 찬란한 무지개~ 이게 꿈이여 생시여~ 내 나이 60중반이니 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건만 철부지 마냥 설레이고 또 설레였다. 

 

그나저나 한 두 권도 아닌 이 많은 책들을 읽어낼 수는 있을까? 과용한건 아닐까? 아내가 알면 어떻게하지? 피 같은 돈을 함부로 써버린건 아닐까? 아이고, 아내에게 커피 한 잔도 못사면서 이게 뭔짓이란 말인가.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내린 마지막 결론. 에이, 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데, 뭔 소리여. 지금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평생 마누라, 자식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이 지경인데 이깟것으로 무신, 게다가 트럼펫 판 돈 아닌가. 나팔 모셔놓는거나 책 모셔놓은거나 그게 그거지 뭐. 여하튼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다. 그나저나 이 책들 언제 다 읽지? 그러다 다시 내린 결론. 

 

아니, 샀다고 다 읽으란 법 어딨남? 내키면 읽고 안 내키면 안 읽고, 그냥 쓰다듬어도 좋고, 바라만 봐도 좋은 그대, 사랑스런 그대! 슬쩍 슬쩍 몇 쪽 읽어보다, 이 책도 펴보고, 저 책도 펴보고.....숲 속 산책하듯 느릿느릿 걸으면서 이 책 한 문장, 저 책 한 문장 음미하면 또 어떤가. 나는 지금 어린아이가 무지개 바라보듯 방 가운데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설레이고 설레일뿐이다. 다만 바라건대, 무심하고 덧없는 세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초라한 내 머리 한 올 한 올 백발로 덮여갈지라도 한 권이라도 더 읽고싶은 욕망이, 하나라도 더 알고싶은 지적 호기심이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항상 솟아오르기만을 간절히, 간절히......

 

1. 왕은철 외 <조지프 콘래드> 동인

2. 황은주 <윌리엄 포크너>

3. 전남대영미문학연구소 <더블린의 하프(아일랜드문학읽기)>

4. 소수만 <어니스트 헤밍웨이>

5. 버지니아 울프 학회 <버지니아 울프. 2>

6. 권성진 <탈식민 정치학(D. H. 로렌스의 소설)>

7. 변재길 <제임스 조이스 모더니즘 식민주의(율리시즈)>

8. 윤영필 <D. H. 로렌스의 소설과 타자성>

9. 조일제 <D. H. 로렌스 문학과 종교적 상상력>

10. 심상욱 <J. D. 샐린저 생애와 작품>

11. 권오경 <현대 미국소설의 이해>

12. 김구슬 <T. S 엘리엇과 브레들리 철학>

13. 정혜옥 <나타니엘 호손의 단편과 주홍글자>

14. 문학과영상학회 <영미문학 영화로 읽기>

15. 로라 젭슨 <고전에서 셰익스피어로> 동인, 이영순 역

16. 고영란 <하디와 로렌스 다시읽기> 동인

17. 루홍스, 슈샤오밍 <차이나 시네마(중국영화 100년의 역사)> 동인, 김정욱 역

18. 장정호 외 <여행하는 이론(포스트모더니즘, 문학비평)>

19. 양영수 <산업사회와 영국소설>

20. 공영수 <미국소설 다시읽기>

21. 변재길 <영상시대의 문화코드>

22. 박정미 <변혁기의 종교체험과 현대소설>

23. 윤천기, 강관수 <영미소설과 상호텍스트성>

24. 이순구 <조지 엘리엇과 빅토리아조 페미니즘>

25. 민태운 <조이스 문학강의/젊은 예술가의 초상>

26. 배종언 <조셉 콘라드의 문학세계> 경북대출판부

27.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 <말로(위대한 작가)> 책세상, 이인철 역

28. 제프리 메이어스 헤밍웨이/2<책세상>, 이진준 역

29. 베른트 비테 <발터 벤야민> 역사비평사, 안소현 외 역

30. 나영균 <조셉 콘라드 연구> 이대출판부

31. 김붕구 <보들레르> 문학과지성사

32. T. S 엘리엇학회 <T. S 엘리엇 시, 사회 예술>

33. 신겸수 <르네상스 영국희곡 표지연구>

34. T. S 엘리엇학회 <T. S 엘리엇 시극>

35. 나희경 <자연과 문명의 분계>

36. 최영승 <시극작가로서의 엘리엇>

37. 강문애 <실비아 플라스 신화시 연구>

38. 양균원 <1990년대 미국시의 경향>

39. 강옥선 <19세기 영국 여성의 글쓰기>

40. 신원철 <20세기 영미시인 순례>

41. 장정희 <SF장르의 이해>

42. 안중은 <T. S. 엘리엇과 상징주의>

43. 고전르네상스드라마학회 <그리스 로마극의 세계> 2

44. 한국현대드라마학회 <뉴 밀레니엄 시대의 영미 극작가 동향>

45. 워즈워즈 <묘비명 글쓰기> 동인. 김명복 역

46. 한국문학과종교학회 <문학 연구의 종교적 상징>

47. 이향만 <미국 소설과 영화의 만남>

48. 정진농 외 <미국 소수민족 문학 : 중심에서 주변으로>

49. 김성곤 외 <미국문학으로 읽는 미국의 문화와 사회>

50. 피터 차일즈 <현대시에 비친 20세기> 동인, 최영승 역

51. 수잔 바스넷 <번역> 동인, 윤선경 역

52. 로만 알바레즈 <번역. 권력. 전복> 동인, 윤일환 역

53. 루이즈 폰 플로토우 <번역과 젠더> 동인, 김세현 역

54. 수잔 바스넷 <번역의 성찰> 동인, 윤선경 역

55. 이은숙 <번역의 이해> 동인

56. 레이너 슐테 외 <번역이론> 동인, 이재성

57. 장정희 <빅토리아 시대 출판문화와 여성작가>

58. D. H. 로렌스 <생명의 불꽃 사랑의 불꽃> 동인, 허상문 역

59. 이경순 <서사와 문화>

60. 존 드라카키스 <셰익스피어 비극> 동인, 최영 역

61. 디오니소스 드라마연구회 <셰익스피어 현대영미극의 지평>

62. 김미경 <셰익스피어와 여성>

63. 박우수 <셰익스피어와 인간의 확장>

64. 김한 <셰익스피어의 인간과 세상 이야기>

65. 홍기영 <스토리텔링으로 본 문학과 인생>

66. 스티픈 앨 해리스, 글로리아 플래츠너 공저 <신화의 미로찾기. 2> 동인, 이영순 역

67. 이영철 <아프리카계 미국문학의 노예서사>

68. 김성환 <에드워드 2>

69. 조애리 <역사속의 영미소설>

70. 영국르네상스 드라마학회 <영국 르네상스 드라마의 세계> 2

71. 새한영어영문학회, 부산대인문학연구소 공저 <영문학 연구의 최근 동향>

72. 김희진 <영화로 읽는 셰익스피어>

73. 이경수 <예이츠와 탑>

74. 이순구 <오스카 와일드 데카당스와 섹슈얼러티>

75. 이정호 <욕망 그리고 텍스트>

76. 김봉률 <이안 와트의 소설발생론과 장르 정치학>

77. 스티븐 스테판쳅 <전후 미국시 평설> 동인, 최영승 역

78. 정형철 <종교적 이미지의 형상적 기능>

79. 이정호 <주이상스의 텍스트>

80. 김현아 <중심과 주변의 정치학>

81. 장정훈 <중심에 선 경계인>

82. 정헤옥 <찰스 브록덴 브라운 소설 연구>

83. 전남대영미문화연구소 <초국가 시대의 역사, 인종, 젠더>

84. 사공철 <토마스 하디의 소설과 시 다시 읽기>

85. 박은정, 박인찬 공저 <토머스 핀천>

86. 톨스토이 <톨스토이가 싫어한 셰익스피어> 동인, 백정국 역

87. 이현우 <한국 셰익스피어 르네상스>

88. 정문영 <해럴드 핀터의 영화 정치성>

89. 박익두 <호손과 역사의 시학>

90. 프랭크 터너 <예일대 지성사강의> 책세상, 서상복 역

91. 발터 뫼르스 <꿈꾸는 책들의 도시> 2권 들녁, 두행숙 역

92. 이규명 <영미시와 철학문화>

93. 이재호 <문화의 오역>

94. 이숙희 <아시아계 미국문학과 주체성>

95. 주혁규 <워스워즈와 시인의 성장>

96.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문학동네

97. 전홍실 <파운드 시와 시론연구>

98. 김현숙 <영미소설 속의 여성결혼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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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도 못 받은 나라가 무슨 일류국가며, 학문을 숭상하는 나라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나? 라는 해괴한 국민적 열등감에 시달리던차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수상은 일거에 국가적 자존심을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채식주의자>(창비, 2007)는커녕 소설가 한강의 이름조차 모르던 독서계는 한순간에 문학 열풍으로 뜨거웠고, 제풀에 <채식주의자>는 판에 판을 거듭하며 찍어내기에 바빴다. 성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나라답게 우리는 운동선수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메달을 못따면 시시한 선수로 취급되고, 한 나라 최고작가라면 최소한 국제적 수준의 상을 수상해야만 인정받는다

 

한때 맨부커상 수상과는 별도로 일각에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두고 설왕설래한 적이 있다. 과연 <채식주의자>가 상을 탈 정도로 뛰어난 작품인가. 아니면 번역자를 잘 만난건가 등 여러 궁금증과 함께 새삼 번역 소개의 중요성, 우수한 해외 번역자의 발굴 등이 화두로 떠올랐다. 여기서 잠깐 화제를 번역이라는 주제로 바꿔보자.  

 

잘 된 번역은 어떤 번역을 말할까? 흔히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매번 부딪치는게 직역과 의역이다. 그러나 직역과 의역만 하더라도 여기서 단순히 끝나는게 아니다. 직역이라면 어데서 어데까지를 직역이라고 해야하나, 의역은 또 어데까지를 의역이라고 규정해야하나. 이런 문제들은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2

한겨레신문 2018824일자 김지훈 기자의 <기계에 대항하는 인간의 번역이란> 기사에서 번역가 조영학은 '직역과 의역' 논쟁은 잘못된 구도설정에서 비롯된것이라 주장한 후 이른바 '여백 번역론'을 내세운다. 이어서 번역가 노승영은 조영학의 '여백 번역론'과 같은 맥락에서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번역가 조영학은 직역과 의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구도부터 잘못됐다고 본다. 기호만 번역 대상으로 보고 문법·목소리·언어습관·시대상 등 여백은 무시한 채로 생기 없는 번역을 만들어놓고는 이를 직역이라고 미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번역은 마치 고래를 저수지에 옮겨놓아 죽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여백 번역론은 곧 다시 쓰기. “, 번역이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외국어로 표현한 상황을 우리말로 다시 쓰는 과정’”인거다. 그가 지향하는 번역은 최대한 우리말 체계와 언어습관에 가까운 번역이다. “번역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를 지향한다. 독자의 언어로 번역하라.” 예를 들어, “To understand is to forgive”를 기호만 우리말로 옮기면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번역 투의 죽은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을 이해해야 용서도 한다라고 번역하거나, 한 발 더 나가 이해 없이 용서도 없다로 입말처럼 자연스럽게 옮겨야 비로소 좋은 번역이 된다. “번역은 단순히 기호를 물리적으로 옮겨 적는 과정이 아니라 기호와 기호를 둘러싼 온갖 의미체계를 화학적으로 결합해 우리말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다.”

 

번역가 노승영이 번역 강의를 할 때마다 번역은 복원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번역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말하자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상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존재할 뿐인 무정형의 상태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작가를 일종의 번역가로 볼 수도 있고 번역가를 일종의 작가로 볼 수도 있다.”

 

노승영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스미스의 번역을 내용을 크게 누락하지 않으면서도 원문에 종속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칭찬한다.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어떤 플롯을 한강은 한국어로 번역했고 스미스는 영어로 번역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 작가와 번역가는 대등한 존재가 된다.”

 

이번엔 노승영과 달리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조재룡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그는 최근 저서 <번역과 책의 처소들>(세창출판사, 2018년)에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언급하기에 앞서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염두에 둬야할 점을 이렇게 말한다.  

 

 3

문학번역은 문학적 요소들을 번역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텍스트를 문학이게 해 주는 것을 번역하기, 다시 말해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문장의 특수한 구성이나, 작가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었을 문체, 고유한 리듬이나 어휘의 독특한 사용 등 우리가 흔히 문학성이라 부르는 요소들이야말로 번역가가 제 모국어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핵심이다. 우리가 문학 번역을 나의 문자로 타인의 문자의 가장 깊은 저변을 파헤치는 작업이자 나의 문장으로 타인의 문장의 가장 조밀한 조직을 길어 올리는 시도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학 번역은 의미의 두께를 결정하는 원문의 특수한 결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정보를 담은 쪼가리나 화장품 사용 설명서와는 다른 것이다. - 조재룡 <번역과 책의 처소들> 17

 

조재룡은 우선 창작적 번역과 창의적인 번역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창작적 번역이고, 창의적인 번역인지, 다시 조재룡의 글을 통해 알아 본 후 <채식주의자> 원문과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문비교를 통해 문제점을 살펴보자.(* 1)<채식주의자> 원문이고, 2)는 데보라 스미스의 영어 번역문을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내용이다.)

 

(창의적인 번역이 되기 위해서는 창작적 번역이 그렇듯) 원문에 무언가를 덧붙여 가며 번역을 창작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한국어 원문의 특성과 구조, 어휘를 최대한 정확히, 한국어와 상당히 다른 특성과 구조와 어휘로 이루어진 번역어로 살려내려는 시도 자체가 창의적인 재능과 언어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 치열한 노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1) 내가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뜻밖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안방에서 나오는 것, 질문,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까지 모두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다만 무시했을 뿐이다.  - <채식주의자> 14

 

2)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나는 아내가 완벽하게 반응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분명 제정신이었다는 저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사실 그대로 벌어진 것이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거실에서 나오는 것, 아내에게 무얼 하고 있는지 물었던 사실, 그리고 아내에게 다가간 것과 이후부터 한 모든 일을 나는 완벽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원문에서, 모든 걸 의식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의 상태로 그려진 아내는, 번역에서는 정반대 상황에 놓인다. 원문에서 아내는 제 남편이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과 남편의 그러한 태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내가 방에서 나온 이후 나의 모습그녀에게 다가가면서 내가 했던 움직임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었던여성 주체인데, 원문에 주어가 생략되어서 그런지, 번역가는 이와 같은 사실을 포착해 내지 못한다. 오히려 남편이 자신의 행동과 제 행동에 대한 반응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주어가 생략된 구문에 대한 몰이해는 번역에서 소설 전체의 주제를 바꾸어 놓는 데 크게 일조한다.   -<번역과 책의 처소들> 55

 

1) 아내가 씻고 잠옷을 걸친 뒤 안반 대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먼 소도시에서 장모가 전화를 받았다.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는데, 장모의 목소리를 혼곤했다.  -<채식주의자> 34

 

2) 씻고 잠옷을 걸친 뒤 아내는 우리가 항상 그래 왔듯이 거실에서 잠잘 준비를 하는 대신 자기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남겨진 상태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 장모였다.  

 

소설 속 아내는 안방에서 남편과 동침하는 대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거실에서 잠을 청하는 행위는 평소 아내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원문은 부부의 생활 공간인 집 역시, 남편이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그린다. 문제는 번역의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실수가, 원문의 이와 같은 설정을 단박에 바꾸어 버린다는데 있다. 번역은 아내가 잠을 자려고 들어간 공간이, 평소에 잠자리로 사용하던 거실 외에 다른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아내는 자기 방도 별도로 있고, 더구나 동침을 거부하면서 내내 거실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독자들은 이 번역을 읽으면서 합리적이고, 타당한 질문, 응당 갖게 마련인 의문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남편은 그럼 그간 어디서 잠을 잤던 것일까? 이처럼 번역은 등장인물의 설정 전반을 바꾸어 버린다. 권력자이며 비겁하기조차 한 남편은 소설에서 집 안의 공간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조심스럽기 마련인 부부생활이 사적인 문제로, 처가를 추궁하고 수시로 고자질 하는 등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집한 남성의 전형처럼 그려진다.

 

아내에 대한 불만을 아내의 부모에게 상의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남성우월주의자인 남편은 그러나 번역에서 이내 제 모습을 감춘다. 번역에서는 장모가 먼저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 딸의 문제 전반을 상의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장모를 이렇게, 동서양 양자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 보더라도, 매우 기이한 성격의 사람으로 번역되었다.     - <번역과 책의 처소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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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독자의 독서 지평에 충실하고자, 한국 문화의 흔적을 과감히 지워 버린 번역은 원문으로부터 승리를 타진한다. 원문보다 뛰어난 번역, 원문보다 풍부한 번역, 원문보다 더 감동적인 번역, 원문보다 더 활력이 있으며, 감정을 실현한 번역이 이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첨언은 부정적인 구문을 더욱 부정적으로 매조지거나 밋밋한 사건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완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번역은 이와 동시에, 원문에다가 번역가의 가치관을 덧씌운다. 번역은 어딘가를 향해 상승을 도모한다.

 

번역이 저 높은 곳으로 날려 할 때, 원문은 땅에 제 두 발을 굳건히 붙들고 서서 가만히 올려다본다. 한국에서가 아니라면 누가 원문을 읽고 또 그 번역을 서로 비교하겠는가? 번역이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원인은 오롯이 수상 덕분이다. 오로지 수상에 의해 이루어진 번역의 승리는 번역을 칭송의 대상으로 전환하며, 저 완성을 제 손에 쥐려한다. 번역가만이 이 승리의 주인은 아니다. 승리를 선언하며 번역가에게 당도한 그간의 충고와 번역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은, 사실을 말하자면, 충분히 역겨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 <번역과 책의 처소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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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황현산 선생이 최근 타계했다. 생전의 선생의 글은 전문성과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였고, 특히 시평과 불문학 번역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를 지니셨다. 그러기에 선생의 번역서나 문학평론집은 되도록 찾아 읽으려고 한 편이다. 가령 문학평론서인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을 비롯해서 번역서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는 이미 읽은바 있고 역시 선생이 번역한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등도 언제 시간되면 읽어보려고 했었다. 특히 베스트셀러로 한창 줏가를 올린바 있던 산문집<밤이 선생이다>와 최근 출간된 <사소한 부탁>은 마침 칸투스독서회에서도 한번 읽어보려고했던 차다.  

 

 

비록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역시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김현 선생이 타계했을 때와 흡사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그만큼 선생의 글에 공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우연히 서평가인 로쟈(이현우)의 블로그에 들렀더니 선생에 대한 짧은 글이 있어 옮긴다.

 

"(...) 육성을 들어본 독자라면 이 산문집(<사소한 부탁>)이 음성지원이 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경우라서 조리 있으면서 말의 기품이 살아있는 글들을 선생의 육성을 직접 듣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육신과 이렇듯 분리돼 있으면서도 실재하는 이 음성의 주인은 누구인가? 손택이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말하는 사람은 쓰는 사람과 다르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 바르트의 원의와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다름을 ‘같지만 다름‘으로 이해한다.

황현산 산문집에서 우리가 듣는 목소리의 주인은 황현산 선생이면서 또한 그렇지 않다. 만약 같다면 그건 우리가 환청이라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쓰는 사람의 목소리, 곧 저자의 목소리이고 이는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며 다른 운명의 삶을 산다. 우리 곁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라고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바로 그 존재다. 선생은 떠났지만 또한 그대로 남아있다.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익숙한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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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도 막상 착수하지 못하고 미룬 책들이 있다. 조셉 콘라드의 소설도 그중 하나인데, 작가가 뱃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 <암흑의 핵심> <로드 짐> <나르시스호의 검둥이>를 비롯해서 단편 <청춘>, <문명의 전초지>등은 단순히 소재로서의 배나 바다가 등장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과 심층을 파헤친 소설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해야할 작품들이다.

더구나 나 역시 오랫동안 뱃생활을 한 터라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명칭과 용어들은 친숙하기조차하다. 요즘 발터 벤야민의 저서와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 소로의 <월든>을 읽고있기 때문에 조셉 콘라드에 집중할 수는 없지만, 이번 기회에 전작을 한번 읽어볼까싶다. 

실상 콘라드의 작품 자체가 많지않은데다 그나마 국내 번역도 몇 권 되지 않는다. 가령 위 작품을 빼고나면 <비밀요원>(문학과지성사), <노스트로모>(한길사), <서구인의 눈으로>(중앙일보사), 단편집 <청춘> 등이 거의 전부다. 연구서나 전기도 마찬가지인데, 평전으로는 제프리 마이어스의 <조셉 콘라드>(책세상)가 가장 충실하고, 서울대 이상옥 교수의 <조셉 콘라드 연구>(서울대출판부), 부피가 얇은 나영균 교수의 <조셉 콘라드>(정우), 전북대 왕은철 교수를 비롯 국내 전공자들의 논문을 엮은 <조셉 콘라드>(동인)정도다.

내가 콘라드의 작품을 처음 접한것은 소설이 아니라 <암흑의 핵심>을 원작으로 한 포란스시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다. 워낙에 유명한 영화인데다 당시 이 영화를 보고난 감동이 거의 충격 수준이어서 그 즉시 <암흑의 핵심>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은 영상 예술이 지니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보여주는 영화로서 우리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베트남을 소재로한 반전 영화라면 <디어헌터>, <플래툰>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지옥의 묵시록>은 단연 그 위에 있다.

이 영화의 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J.프레이저의 인류학 저서 <황금의 가지>와 원작인 J.콘라드의 <암흑의 핵심>(단편 <문명의 전 초지> 역시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다.) 를 비롯해서 '묵시록적 역사관'에 대한 일차적 정보가 필요하다.

기실 사물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느낄 수밖에 없으므로. 인류학의 고전인 <황금의 가지>의 57∼59장에는(김상일 번역의 을유문화사, 83년판을 필자는 소장하고 있음) 고대인들의 희생제식으로서 집단의 속죄를 위해 그들의 속죄양을 선택, 그로 하여금 전체 집단을 대신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공적 속죄양' 의식이 기술되고 있다.(기독교의 예수는 공적 속죄양의 대표적 케이스)

영화 속에서 원주민들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전직 미군 대령 출신인 키츠(마론.브란도)는 바로 미국이라는 공적 집단의 속죄양으로 지목되어 특수부대 요원인 윌러드 대위(마틴 쉰)로 하여금 처단될 운명이다. 또 한가지 J.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은 아프리카에 대한 서양 제국주의 정책의 비판적 소설이다.

암흑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의 가공 할 타락에 의해 인간이 저지른 참혹함이며 지옥의 모습이다.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은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탐욕스런 그들의 식민지 정책이 저지르는 인간 욕망의 타락된 모습을 제시한 것인데 <지옥의 묵시록> 역시 마찬가지로 미국의 탐욕스런, 전쟁에 대한 광신적, 타락된 욕망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암흑의 오지, 즉 속죄양으로 지목된 커츠대령이 있는 곳을 향하여 윌러드대위는 보트를 타고 밀림 지대를 끝없이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거의 직선적 코스이다. 이것은 서양인들의 역사관이 직선적 시간관(동양은 순환적이다.)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유 구조로서의 '이데아'로부터 근세 서양 철학의 종합이랄 수 있는 칸트의 '물 자체' 그리고 헤겔의 '절대정신', 마르크스의 미래의 '공산 사회' 등등은 직선적 역사관, 시간 관이라는 공통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부정되어야 하는 세계이다. 우리가 지향할 곳은 저 미래의 이데아의 세계이며 절대정신, 공산 사회가 구현되는 세계이어야 한다는 것이 서양인들의 역사관인 것이다. 그러나 F.포드 코플라가 <지옥의 묵시록>을 통해 제시하는 이상적 세계, 암흑의 오지는 바로 미국의 타락된 욕망이 존재하는 지옥의 세계이다.

코폴라 역시 지금 이곳이 부정되어야 할 곳으로 본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미래 역시도 희망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 비극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대부>시리즈 역시 코플라의 암울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결국 <지옥의 묵시록>은 현대 미국인들의 일그러진 욕망, 타락한 욕망을 고발한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를 시종일관하여 공포감 속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토록 인간의 광신적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공포의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커츠대령은 윌러드에게 묻는다. "너는 베트남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 물음을 커츠는 스스로 대답한다. "끔찍한 공포!!, 공포!!"였다고. 전쟁은, 미국은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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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맹은빈 번역의 동서문화사판, 박형규 번역의 문학동네판, 연진희 번역의 민음사판 등 세 가지인데, 최종적으로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하는 민음사판을 읽기로했다.  

며칠에 걸쳐 민음사판 <전쟁과 평화> 전 4권을 통독했다. 통독이라곤 했지만 지루한 전쟁 장면과 3, 4권에 집중된 톨스토이의 역사관, 전쟁에 대한 논평 부분은 대강 건너뛰었다. 역시 예상했던대로 큰 감동은 없었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온갖 인간군상의 모습을 세세할정도로 그려낸 작가의 필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아니면 결코 쓰여질 수 없다할 정도로 스케일있는 대하소설이고, 전쟁을 테마로 이만한 작품을 쓴 작가는 아직 없다. 물론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거론할 수는 있지만 역사, 사상 스케일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때 <전쟁과 평화>에 비교할 수 없다. 다만 예술성 차원에서 <안나 카레니아>와 <전쟁과 평화>를 비교했을 때 <안나 카레니나>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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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다시 읽는 중이다. 국내 첫 소개는 명번역으로 유명한 문학사상사의 안정효 번역판인데 당시 이 책도 구입하고 읽긴했지만 결국 완독하지 못했다. 비교적 마르케스는 국내 애독자가 많은 편이지만 역시 애독자가 많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달리 <전쟁과 평화>마냥 수많은 등장인물, 발음하고 기억하기 까다로운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인명, 그리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기법탓에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작품이다.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게된건 민음사에서 간행한 특별판이 계기였다. 수많은 문학작품 중에서 어떤 한 작품을 읽는다는건 개인적 관심, 흥미 여부가 첫째 이유이지만 마지막으로 책을 손에 들기까지는 여러 우연적 요소가 개입된다. 바로 <백년의 고독>이 그런 경우인데, 사소할지 모르지만 특별판이 풍기는 장정의 고급한 매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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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여인을 못잊어 51년 6개월 하고도 4일을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 일견 로맨스 소설 같은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남녀의 낭만적 사랑 외에도 여러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마이크 뉴웰 감독의 영화를 먼저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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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oent 2019-12-3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의 생애를 다룬 영화 <카잔자키스>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