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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도 못 받은 나라가 무슨 일류국가며, 학문을 숭상하는 나라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나? 라는 해괴한 국민적 열등감에 시달리던차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수상은 일거에 국가적 자존심을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채식주의자>(창비, 2007)는커녕 소설가 한강의 이름조차 모르던 독서계는 한순간에 문학 열풍으로 뜨거웠고, 제풀에 <채식주의자>는 판에 판을 거듭하며 찍어내기에 바빴다. 성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나라답게 우리는 운동선수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메달을 못따면 시시한 선수로 취급되고, 한 나라 최고작가라면 최소한 국제적 수준의 상을 수상해야만 인정받는다

 

한때 맨부커상 수상과는 별도로 일각에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두고 설왕설래한 적이 있다. 과연 <채식주의자>가 상을 탈 정도로 뛰어난 작품인가. 아니면 번역자를 잘 만난건가 등 여러 궁금증과 함께 새삼 번역 소개의 중요성, 우수한 해외 번역자의 발굴 등이 화두로 떠올랐다. 여기서 잠깐 화제를 번역이라는 주제로 바꿔보자.  

 

잘 된 번역은 어떤 번역을 말할까? 흔히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매번 부딪치는게 직역과 의역이다. 그러나 직역과 의역만 하더라도 여기서 단순히 끝나는게 아니다. 직역이라면 어데서 어데까지를 직역이라고 해야하나, 의역은 또 어데까지를 의역이라고 규정해야하나. 이런 문제들은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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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8824일자 김지훈 기자의 <기계에 대항하는 인간의 번역이란> 기사에서 번역가 조영학은 '직역과 의역' 논쟁은 잘못된 구도설정에서 비롯된것이라 주장한 후 이른바 '여백 번역론'을 내세운다. 이어서 번역가 노승영은 조영학의 '여백 번역론'과 같은 맥락에서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번역가 조영학은 직역과 의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구도부터 잘못됐다고 본다. 기호만 번역 대상으로 보고 문법·목소리·언어습관·시대상 등 여백은 무시한 채로 생기 없는 번역을 만들어놓고는 이를 직역이라고 미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번역은 마치 고래를 저수지에 옮겨놓아 죽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여백 번역론은 곧 다시 쓰기. “, 번역이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외국어로 표현한 상황을 우리말로 다시 쓰는 과정’”인거다. 그가 지향하는 번역은 최대한 우리말 체계와 언어습관에 가까운 번역이다. “번역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를 지향한다. 독자의 언어로 번역하라.” 예를 들어, “To understand is to forgive”를 기호만 우리말로 옮기면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번역 투의 죽은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을 이해해야 용서도 한다라고 번역하거나, 한 발 더 나가 이해 없이 용서도 없다로 입말처럼 자연스럽게 옮겨야 비로소 좋은 번역이 된다. “번역은 단순히 기호를 물리적으로 옮겨 적는 과정이 아니라 기호와 기호를 둘러싼 온갖 의미체계를 화학적으로 결합해 우리말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다.”

 

번역가 노승영이 번역 강의를 할 때마다 번역은 복원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번역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말하자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상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존재할 뿐인 무정형의 상태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작가를 일종의 번역가로 볼 수도 있고 번역가를 일종의 작가로 볼 수도 있다.”

 

노승영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스미스의 번역을 내용을 크게 누락하지 않으면서도 원문에 종속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칭찬한다.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어떤 플롯을 한강은 한국어로 번역했고 스미스는 영어로 번역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 작가와 번역가는 대등한 존재가 된다.”

 

이번엔 노승영과 달리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조재룡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그는 최근 저서 <번역과 책의 처소들>(세창출판사, 2018년)에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을 언급하기에 앞서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염두에 둬야할 점을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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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번역은 문학적 요소들을 번역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텍스트를 문학이게 해 주는 것을 번역하기, 다시 말해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문장의 특수한 구성이나, 작가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었을 문체, 고유한 리듬이나 어휘의 독특한 사용 등 우리가 흔히 문학성이라 부르는 요소들이야말로 번역가가 제 모국어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핵심이다. 우리가 문학 번역을 나의 문자로 타인의 문자의 가장 깊은 저변을 파헤치는 작업이자 나의 문장으로 타인의 문장의 가장 조밀한 조직을 길어 올리는 시도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학 번역은 의미의 두께를 결정하는 원문의 특수한 결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정보를 담은 쪼가리나 화장품 사용 설명서와는 다른 것이다. - 조재룡 <번역과 책의 처소들> 17

 

조재룡은 우선 창작적 번역과 창의적인 번역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창작적 번역이고, 창의적인 번역인지, 다시 조재룡의 글을 통해 알아 본 후 <채식주의자> 원문과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문비교를 통해 문제점을 살펴보자.(* 1)<채식주의자> 원문이고, 2)는 데보라 스미스의 영어 번역문을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내용이다.)

 

(창의적인 번역이 되기 위해서는 창작적 번역이 그렇듯) 원문에 무언가를 덧붙여 가며 번역을 창작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한국어 원문의 특성과 구조, 어휘를 최대한 정확히, 한국어와 상당히 다른 특성과 구조와 어휘로 이루어진 번역어로 살려내려는 시도 자체가 창의적인 재능과 언어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 치열한 노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1) 내가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뜻밖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안방에서 나오는 것, 질문,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까지 모두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다만 무시했을 뿐이다.  - <채식주의자> 14

 

2)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나는 아내가 완벽하게 반응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분명 제정신이었다는 저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사실 그대로 벌어진 것이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거실에서 나오는 것, 아내에게 무얼 하고 있는지 물었던 사실, 그리고 아내에게 다가간 것과 이후부터 한 모든 일을 나는 완벽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원문에서, 모든 걸 의식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의 상태로 그려진 아내는, 번역에서는 정반대 상황에 놓인다. 원문에서 아내는 제 남편이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과 남편의 그러한 태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내가 방에서 나온 이후 나의 모습그녀에게 다가가면서 내가 했던 움직임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었던여성 주체인데, 원문에 주어가 생략되어서 그런지, 번역가는 이와 같은 사실을 포착해 내지 못한다. 오히려 남편이 자신의 행동과 제 행동에 대한 반응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주어가 생략된 구문에 대한 몰이해는 번역에서 소설 전체의 주제를 바꾸어 놓는 데 크게 일조한다.   -<번역과 책의 처소들> 55

 

1) 아내가 씻고 잠옷을 걸친 뒤 안반 대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먼 소도시에서 장모가 전화를 받았다.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는데, 장모의 목소리를 혼곤했다.  -<채식주의자> 34

 

2) 씻고 잠옷을 걸친 뒤 아내는 우리가 항상 그래 왔듯이 거실에서 잠잘 준비를 하는 대신 자기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남겨진 상태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 장모였다.  

 

소설 속 아내는 안방에서 남편과 동침하는 대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거실에서 잠을 청하는 행위는 평소 아내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원문은 부부의 생활 공간인 집 역시, 남편이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그린다. 문제는 번역의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실수가, 원문의 이와 같은 설정을 단박에 바꾸어 버린다는데 있다. 번역은 아내가 잠을 자려고 들어간 공간이, 평소에 잠자리로 사용하던 거실 외에 다른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아내는 자기 방도 별도로 있고, 더구나 동침을 거부하면서 내내 거실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독자들은 이 번역을 읽으면서 합리적이고, 타당한 질문, 응당 갖게 마련인 의문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남편은 그럼 그간 어디서 잠을 잤던 것일까? 이처럼 번역은 등장인물의 설정 전반을 바꾸어 버린다. 권력자이며 비겁하기조차 한 남편은 소설에서 집 안의 공간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조심스럽기 마련인 부부생활이 사적인 문제로, 처가를 추궁하고 수시로 고자질 하는 등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집한 남성의 전형처럼 그려진다.

 

아내에 대한 불만을 아내의 부모에게 상의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남성우월주의자인 남편은 그러나 번역에서 이내 제 모습을 감춘다. 번역에서는 장모가 먼저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 딸의 문제 전반을 상의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장모를 이렇게, 동서양 양자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 보더라도, 매우 기이한 성격의 사람으로 번역되었다.     - <번역과 책의 처소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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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독자의 독서 지평에 충실하고자, 한국 문화의 흔적을 과감히 지워 버린 번역은 원문으로부터 승리를 타진한다. 원문보다 뛰어난 번역, 원문보다 풍부한 번역, 원문보다 더 감동적인 번역, 원문보다 더 활력이 있으며, 감정을 실현한 번역이 이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첨언은 부정적인 구문을 더욱 부정적으로 매조지거나 밋밋한 사건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완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번역은 이와 동시에, 원문에다가 번역가의 가치관을 덧씌운다. 번역은 어딘가를 향해 상승을 도모한다.

 

번역이 저 높은 곳으로 날려 할 때, 원문은 땅에 제 두 발을 굳건히 붙들고 서서 가만히 올려다본다. 한국에서가 아니라면 누가 원문을 읽고 또 그 번역을 서로 비교하겠는가? 번역이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원인은 오롯이 수상 덕분이다. 오로지 수상에 의해 이루어진 번역의 승리는 번역을 칭송의 대상으로 전환하며, 저 완성을 제 손에 쥐려한다. 번역가만이 이 승리의 주인은 아니다. 승리를 선언하며 번역가에게 당도한 그간의 충고와 번역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은, 사실을 말하자면, 충분히 역겨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 <번역과 책의 처소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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