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가 중에서 누가 가장 위대할까? 라는 물음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면 서양음악의 아버지라 일컫는 바하, 음악천재 모차르트, 악성 베토벤의 방대하고 심오한 음악세계를 서로 비교해서 우열을 따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 호불호에 따라 위대성이 나뉘어질 수밖에 없겠는데, 나는 셋 중에서 베토벤을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모른다. 나는 지금 베토벤이 왜 위대한지 답변할만한 음악적 지식이 없다. 그냥 막연히 그의 심포니,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가 위대하고 좋다고 느낄따름이다. '위대하다' 라고 큰소리로 외치고는 기껏 단순한 느낌, 인상적 소감에 근거했다고? 그렇다. 이렇게 말하는 나부터 좀 떨떠름하다.  

설사 누군가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본들 '그냥 좋아서', 라는 답은 너무 소박하고 막연하다. 하지만 분명 위대하긴 한데, 마땅히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참 딱한 노릇이다. 나는 평생 클래식을 가까이했고, 10여년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서 비록 몇 곡 안되지만 베토벤의 심포니 세 곡, 서곡 등을 연주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그의 위대성을 증명할 길이 없다. 그냥 인상적이거나 심증이 근거할 수밖에.

세상 온갖 일과 지식에 호기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 점에서 불만이었고,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문제라 여겨왔다. 그래서 왜 베토벤의 음악이 위대한지 오랫동안 곰곰히 궁리해봤지만 이 순간까지도 그 답을 알 수 없다. 물론 남의 책과 지식을 들먹이며 위대성을 증명하라면 하루종일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해봤자 남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따라 옮기는데 불과하다. 그러던차 베토벤의 음악을 자세히 알고싶은 계기가 찾아왔다.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온다더니 정말 그렇다.

어느날 베토벤 스케치북 연구의 최고 권위자 루이스 록우드가 집대성한 베토벤 교향곡 해설인 <베토벤 심포니>(바다출판사, 장호연 옮김, 2019년)의 출간 소식을 우연히 알았다. 우선 <베토벤 심포니>라는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간 시중에 베토벤 평전이나 음악을 해설한 책이 없는건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책들은 대부분 평전 위주거나 음악감상을 위한 간단한 곡 해설이나 소개에 불과해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나마 낫다는 '음악세계사'의 명곡해설집 중 한 권인 <베토벤>역시 심포니 해설은 불과 한 쪽이나 두 쪽정도로 소략하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곡이 지닌 양식이나 형식, 혹은 곡 분석을 대략이라도 알지 못한다면 결국 곡을 명확하게 알수 없을것이라 생각된다. 그점에서 최근 출간된 록 우드의 <베토벤 심포니>는 심포니만을 집중 분석하고 있고, 무엇보다 베토벤이 남긴 여러 스케치에 근거해서 작품분석을 한것이 이채로웠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퍼토리다. 베토벤은 음악뿐 아니라 학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연구하는 작곡가인데, 이렇게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가 남긴 스케치 자료들이 있다. 베토벤은 그 어떤 작곡가보다도 방대한 분량의 스케치 자료를 후대에 남겼다. 작품 스케치 악보는 물론이고 완성하지 못한 개념 스케치, 악장 계획, 짧은 메모, 일기, 유서, 편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여기에 현재는 소실되어 볼 수 없는 자료들까지, 그야말로 베토벤은 “내 안에 있다고 느낀 모든 것을 꺼내놓겠다”라는 평생의 다짐을 실천한 작곡가였다.

베토벤은 수첩이나 스케치북을 늘 옆에 두고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적고 다듬고 발전시켰다. 그의 스케치북을 살펴보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교향곡이 탄생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저자 루이스 록우드는 베토벤 연구에 있어 최고 권위를 가진 미국의 음악학자다. 현재 보스턴 대학교 베토벤 연구 센터의 공동 책임자로 있는 록우드는 베토벤의 창조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스케치 자료들을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그는 베토벤이 남긴 스케치북과 자필 악보, 수첩을 바탕으로 아홉 개의 교향곡 하나하나에 얽힌 역사·전기적 사실과 창작 기원을 밝힌다. 이 책 《베토벤 심포니: 베토벤 스케치북에 숨겨진 교향곡의 심연》은 록우드가 80대 중반에 그동안의 베토벤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 출판사 리뷰


   


내가 평소 의문을 갖는 '베토벤의 음악이 왜 위대한가' 라는 문제는 '베토벤 깊이 이해하기' 라고 바꿔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베토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방법이고 뭐고 그냥 독학을 해야하는 판이니 막막하다. 어떻게 해야하지? 전전긍긍하던차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한 독서회 멤버들에게 나의 공부 계획을 밝히자  한 회원께서 함께 공부하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독서회에서 함께 공부 하기로 최종 결정한거다.   

일단 대략 계획은 이렇다. 먼저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조명한 발터 리츨러 <베토벤>(나부리. 신인선 역, 음악세계)과 메이너드 솔로몬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김병화 역, 한길사)을 숙독한다. 다음은 <실용음악 이론>(가득뮤직)동영상 강좌를 통해 기초적인 음악이론을 공부한다. 마지막으로 최종 목표인 <베토벤 심포니>와 총보를 병행하며 악곡 분석을 시도한다.

그나저나 기초적인 음악이론도 없는 내가 상당한 음악지식이 요구되는 악곡 분석이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시도는 해볼일이다. 다행인건 이론이 밝은 오케스트라 지휘자님이 계시니 조언을 들으며 공부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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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밤 10시 20분. 커피는 커피대로 술은 술 나름의 고유한 맛이 있다. 음악 감상에 앞서 감정을 살짝 고조시키는데는 역시 커피와 술이 제격이다. 조니워커 한 잔들고 음악감상실로 가다.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턴테이블에 올려놓다.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가 노래하는 제 1곡 '아름다운 5월에'. 지인 K씨가 오래전 황학동에서 구입한 중고 LP음반이다.

<아름다운 5월에>

아름다운 5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났을 때
나의 마음 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아름다운 5월에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초조한 마음과 소원을

<Im wunderschonen Monat Mai>

Im wunderschonen Monat Mai,
Als alle Knospen sprangen,
Da ist in meinem Herzen
Die Liebe aufgegangen

Im wunderschonen Monat Mai,
Als alle Vogel sangen,
Da hab' ich ihr gestanden
Mein Sehnen und Verla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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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은 어느 한 지점에 명확하게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즉 찰라적인 순간들이다. 쉼없이 흘러갈뿐이니 세상 그 어떤 것도 고정된게 없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라것도 환상일뿐다. 수많은 과거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덧없는 삶, 의미없이 주어진 삶은 그렇게 하염없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어느 때, 과거의 어떤 한 순간이 지금 내 앞에서 오롯이 되살아날 때, 마치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그 어떤 것처럼 생생하게, 명확하게 되살아난 그것이 오히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건 아닐까? 그러므로 과거란 이미 잊혀진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재보다 더 실재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카뮈 혹은 사르트르와 또 다른 의미에서 실존의 의미를 말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프루스트,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는 동일하게 잃어버린 과거를 현재보다 더 뚜렷한 현재라고 증언한다. 

현실은 마냥 지루하고 덧없다. 반면 문학과 영화, 혹은 음악 속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이런 나를 누군가는 가까운 지인 대신 죽은 이를 더 경배하고, 가깝게 느낀다고 핀잔한다. 현재보다 과거가 더 낯익다는 것.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이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은 현실이 지루하기 때문이고, 이런 나는 또 한 명의 보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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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요시네마

격주로 진행하는 '금요시네마' 첫 번째 상영작은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 참여자 2명.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단순 로맨스물이지만 접근하기에 따라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언급할 수 있다. 사실 상영작 선정은 소수인 참석자들의 형편이 첫 번째 고려사항이다. 

맘 같아서는 타르코프스키, 고다르, 베르히만, 브레송  등의 명작부터 감상하고싶지만 어쩔 것인가. 이 점은 독서회도 마찬가지인데, 제 아무리 단테,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에서부터 카프카, 조이스, 포크너, 나보코프라는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다한들 당장 입에 넣을 수 없으니. 과연 누가 카뮈, 사르트르를 읽고자 할 것이며, 니체를 읽으려 할 것인가. 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태에 도스토예프스키를 과연 권유할 수 있을까? 요원하다. 비록 아쉬움투성이지만 프로젝터는 계속 돌아가야 하고, 독서회 역시 진행되어야 한다.   

2. 분주함

별 할일도 없는 사람이 실제 생활은 더 바쁘다.  그들은 놀기에 바빠 당최 시간을 낼 수 없다. 독서할 시간이 없다. 영화볼 시간도 없다. 글쓰기를 할 시간은 더욱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어데어데 다녀왔다. 산책 하려고, 운동하느라, 해외여행 다녀오려고, 누구누구를 만나려고, 화장을 하느라 시간이 없다. 바쁘고 바쁘다. 술마시고, 커피 마시며 잡담할 시간은 있어도 사색할 시간, 독서할 시간은 없다.

3. 그림자 당신

나는 너에게, 당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건네고 또 건넨다. 그러나 너는, 당신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내 글을 읽고 속으로 짐작만 한다. 그러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군. 좀 음흉한데? 거짓말 아냐? 내 생각과 살짝 다르군. 그럴듯하긴한데, 사실은 그게 아니지 등등.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건넨다. 말하고 또 말한다. 급기야 하루 한 꼭지씩 말하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 아마 죽을 때까지도 응답없는 메아리.

그래도 쓰고 또 쓴다. 다시 말을 건넨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떤가하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어느 때는 수줍게, 어느 때는 자만심으로 가득차서, 어느 때는 자신있게, 어느 때는 소심하게, 때로 현학적으로 어느 때는 솔직하게, 어느 때는 과장한 투로 말을 건넨다. 행여 한 마디 답을 하지 않겠냐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영원히 허공 속의 메아리는 아니잖겠냐고. 하지만 누구도 대답이 없다.

다시 말을 건넨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속으로만 가늠하며 읽고 또 읽는다. 가만 속으로 되뇌인다. 거짓말! 건 아닌데! 그럴듯하군! 인형 같은 당신, 너. 그림자 같은 당신, 나에게 의미없는 당신, 죽은 자와 다름없는 그대. 실제는 살아있지만 교통이 불가능한 죽은 그대.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전할 수 없는 그대. 당신. 그래도 나는 쓴다. 쓰고 또 쓴다. 말을 건넨다. 다시 말한다.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다 결국 나는 죽은 당신과 너 대신 나에게 말을 건넨다. 나를 향해 독백한다. 혼자 말하고 혼자 쓴다. 쓰고 읽고, 다시 쓰고 읽고.   -  오늘도 <딜레탕트>를 방문한 당신에게! ^^

4. 문화카페

최 작가가 방문했다. 홍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 담소. 중학 동창생 P가 최 작가에게 맡긴 원고 교정에 대한 의견, '인문산책' 차기 토론주제인 이청준의 단편 <조만득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다. 

비록 회원 몇 안 되는 단촐한 문화 모임들이지만, 평소 원하던 모임을 내가 운영하는 독서실에서 하고 있으니 뭘 더바라랴. 모임의 수준이며 내용이야 차치하고,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 같이 회원들 누구라도 오다가다 들러 차 한 잔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5. 세속화 시대의 종교

독서실에 인접한 골목길은 대략 200여미터. 작은 골목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있다. 길 입구의 타일집, 자동차 수리센터, 빌딩 하나에 교회, 노래방, 중국집이 함께 세들어있고, 유치원, 독서실, 그리고 낡은 주택 몇 채, 마지막은 긴 대나무 끝에 붉은 깃발을 단 ** 보살 점집이다. 요즘 점집은 한창 성수기인데, 군산 경기가 크게 안 좋은 탓이다. 엊그제는 돈깨나 있는 손님이 들었는지 문 앞에 차린 음식이 푸짐하고, 짚신 몇 켤레, 촛불, 떡, 과일 등 평소와 달리 걸졌다.  하긴 절박할수록, 맘이 간절할 수록 음식도 많이 차리고 굿소리도 커야 귀신도 감동할거다.   

공교롭게도 한 빌딩 위 아래 층에 나란히 세든 노래방과 교회는 일요일 낮이든 밤이든 노래소리가 교대로 크게 들린다. 교회는 찬송가,  노래방은 대중가요. 마이크 소리 요란한 노래는 가사도 창법도 서로 다르지만, 노래하는 목소리만은 간절하다. 일상의 찌든 힘겨운 속내들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불경기 탓에 중국집은 지난 달 폐업했고, 임대라고 써붙인 건물이 여러 채다. 심야 노래방은 불빛만 환하지 손님이 없어 보인다. 반면 점집과 교회는 그럭저럭 현상 유지를 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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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 '여.순항쟁'과 '4. 3 항쟁'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연과 책자를 접하면서 역사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특히 한길사에서 간행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시리즈,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송남헌의 <해방 3년사> 등을 읽으면서 그동안 애매하게 알았던 해방 전후사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새롭게 안 사실인데, 해방 전후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및 한국전쟁의 기원의 첫 번째 요인은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이다. 물론 한국전쟁의 기원과 '여.순항쟁', '제주 4. 3항쟁' 모두 그것이 촉발된 계기는 여러 복합적 요인일테지만, 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친일파 청산이 무산된 점을 꼽는다. 친일파 문제와 관련해서 김지석의 칼럼 <시대의 담론>(한겨레신문)중 일부를 인용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1947년 초 결국 좌초한다. 의견 대립의 핵심 사안이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벌이었던 것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특히 친일파 문제는 이후에도 민주주의 발전에 최대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된다.

(...) 신탁통치 문제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친일 세력은 힘들 게 없는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즈음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미-소 냉전이 시작될 조짐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남쪽 정치세력이 그 분위기를 활용하며 분단을 고착화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잘못이다. 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왜곡해 반탁운동을 벌인 것에 못잖게 외세 의존적이며, 이런 분단 고착화 추세의 연장선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단정이라는 한계 속에서 법적인 형태로 분명한 민주공화국이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행태는 애초부터 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194810월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한 국가보안법 제정과 무리한 확대 적용, 소장파 의원들을 제압하기 위한 19495~8월 국회프락치사건, 19496월 친일 경찰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습격, 19494월 국민보도연맹 결성과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한 연맹원 학살 등은 전형적인 독재정권의 모습이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기원 역시 배후에 민족 갈등을 의도한 일제의 농간으로 비롯되었고 - 당시 사회주의자는 일제에 항거한 지식인들이다 -  이 단어가 우리사회에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여순항쟁' 때부터다. 특히 여순항쟁은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이승만 정권때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친미,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보수정권의 이데올로기, 혹은 권력 유지를 위해 '빨갱이'라는 단어를 우리사회에 고착화시키는데 골몰했다.

어제 문 대통령의 3. 1절 기념 경축사에서 관심을 끈 대목은 일제하 친일 청산의 무산과 그로인한 '빨갱이'라는 단어의 유래, 또 이것이 오늘날 어떻게 변형되어서 계속 판을 치고 있는지 언급한 점이었다. 

오늘자 한겨레신문 역시 이 점을 부각하고 있는데, 특히 조선일보 선대 사주 방응모와 동아일보 선대 사주인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거론하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오늘자 한겨례신문의 사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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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100주년 경축사에서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하는 과정에서 빨갱이란 말이 생겨났다’며 ‘좌우의 적대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정치적 공격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분단 현실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매우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분단과 냉전은 친일파들이 활개칠 수 있는 음습한 토양을 제공해왔다. 최근의 ‘5·18 망언’은 물론 역대 선거 때마다 되풀이돼온 색깔론은 곳곳에 뿌리박은 친일 잔재의 또다른 몰골이다. 이런 색깔론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것은 친일 청산은커녕 친일파의 후예들이 정치·언론·군·학계 등 우리 사회 기득권 체제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미를 폄훼하는 뉴라이트적 건국 사관이 판쳤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일부 보수언론이 여기에 중심적 구실을 하고 있는 사실은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조선일보>의 선대 사주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는 정부가 공인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2009년 11월까지 4년여 조사 끝에 확정한 1006명에 포함됐고 후손들이 소송까지 걸었으나 대법원은 이들을 친일행위자로 확정 판결했다.

그럼에도 두 언론사는 1985년 서로의 친일행적을 둘러싸고 이전투구의 논쟁을 벌였을 뿐 한번도 국민과 독자 앞에 진지하게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계기마다 한때의 ‘항일’만 부각하고 홍보할 뿐 ‘친일’의 부끄러운 역사는 여전히 감추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최근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섣불리 ‘김성수 재평가’ 운운한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선대의 ‘항일’ 공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발언에 신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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