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사가 대체로 수다쟁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가장 수다스러운 자들이 그들의 가게로 몰려와 죽치고 앉아 있는 탓에 그들도 자연스레 그런 악습이 몸에 배는 것이다. 아르켈라오스 왕은 어느 수다스러운 이발사가 수건을 둘러주며 "머리는 어떻게 깎아드릴까요, 전하?"라고 묻자 "조용히 깎아주게!"라고 재치 있는 대답을 한 적이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수다에 관하여> 중 표제 에세이 한 장면이다(지금은 그리스 로마 에세이에 포함되어 있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전기 작가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런 그가 이런 철학에세이를 남겼다? 전기 작가는 늘 숨은 신이라야 하는데. 한동안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살피면 '영웅전'에는 숱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고 유머와 위트가 풍부하다, 이제는 내 이야기 좀 해보겠소, 라고 쓴 자신의 글이니만큼 예외일 수 없다. 주제에 걸맞게, 간결한 문체로, 수다스럽지 않게 수다에 관하여 의견 제시, 인용은 그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예다.
넷플릭스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늑대의 살갗 아래 >(The Skin of the Wolf, Bajo la piel de lobo, 2017)다.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냥꾼 인생이다. 콘셉트이기도 할 것인데, 영화는 '텔링'은 거의 없고 '쇼잉'에 집중한다. 때문에 영화 번역가(의 직업 특수가 있다. 영상의 스트리밍 속도에 맞게 짧게 번역해야 하는)가 할 밀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말 없음을 보완하지도 않는다. 아니, 처절하리만큼 인색하다. 묵언수행 선승처럼. 영화의 매력이다.
몇 안 되는 대사 중 주제 문장을 제시하라면, 있다. 여기 밝히고 싶지는 않다. 말하지 않는 가운데 말하고자 했던 숱한 것들을, 말로 표현하는 것 가능하지만, 그 한마디 인용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연인이다>(콘테츠명을 거론해서 죄송하지만) 에피소드 중 하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밋밋하게 시작 밋밋하게 마무리, 그런데 왜 리뷰까지 쓰게 만들 정도로 남는 무엇이 있는 영화인지, 그것이 숙제다.
미용실에 간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묻는 다. 생각한다. '무엇을 해주신다는 얘기신지, 해드리거나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 어떻게 해요'가 더 낫지 않나, 서비스 요금 받는 건 거래고, 암묵계약으로 어떻게 할까요 묻는 것인데, 이 원장님, 자기가 뭔가를 내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 여기까지는 감사, 그런데 해드린다고 말씀하시네. 머리를 잘라주세요.(머리를)' 기타 등등. 그래도 주문은 늘 "짧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공자님 편 읽는데, 동서양이 왜 동서양인가, 그 경계가 무너질 수 있다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구나.
공자의 인(仁)이, '친절'로 대치 가능할까?
그레이트북스를 선정한 시카고대학교의 인문학 커리큘럼이 동양은 동양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유보했던 것 새삼 생각한다.
서양화는 채움, 동양화는 비움, 여백의 미란다.
어느 서양인이 동양화 가격 흥정을 하면서
빈 공간 많으니 몇 호(엽서 사이즈) 만큼은 디스카운트 합시다,
그 여백 . 자막 걱정 없이 거의 읽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볼 수 있었던
영화를 보면서 삶은 거기서 거기 라는 것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