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없는 기분
구정인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만큼 피곤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에너지를 뿜어대면서 활력이 생기기도 한다. 뭔가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워하는 일이 힘껏 애써야 하는 일이 되는 게,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게 슬프다는 것 말고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거 아닐까 싶었다. 그건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생기는 이상한 마음이기도 했고, 누군가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때도 비슷하게 작용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을 거야, 하는 마음의 다짐이 내 표정을 악하게 만들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받은 그대로를 돌려주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믿었다.

 

혜진에게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버지가 고독사했단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봐도 한참 전이다. 아버지와 혜진은 그런 사이였다. 누군가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 관계라고,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물을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혜진의 마음과 태도가 이해되더라. 나부터도 그랬지만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듯 이해할 수 없는 부모들의 태도가 이런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는 걸 알아서일까. 그렇게 소식을 듣고 언니와 함께 찾아간 경찰서에서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을 처리하는 절차를 알려준다. 황당하지만 부모의 죽음을 알리는 경찰 앞에서 뭐라고 표현할 방법은 없다. 그저 서류상 자식이라는 관계를 부정할 수 없으니 이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면 된다.

 

이런 기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왕래 없던 아버지가 고독사 했고, 3주간 방치된 시신이 이웃의 신고로 발견되었으니 가족이 와서 수습을 하라는 연락을 받는 일. 연락을 받는 순간에는 놀라긴 했겠지만, 곧 화가 나지 않았을까? 혜진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생각도 없다. 그녀가 자란 세월의 흔적들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죽음 따위 관심 밖의 일이어야 했다. 아버지가 평생 가족에게 해왔던 일이 무엇이던가? 가출과 외도를 일삼고, 사업과 주식 투자에 몰두하다 가산을 탕진했다. 그런 이유로 집안의 가장은 엄마가 되었으며, 항상 부족한 생활에 시달려야 했던 가족들이다. 아이였던 혜진과 언니는 따뜻한 가정을 꿈꾸기보다 집을 들락날락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어른 같은 아이로 자랐고, 그런 남편을 아이들의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했던 엄마의 슬픔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힘든 생활을 견뎌오다가 부모님은 헤어졌고, 그렇게 헤어진 뒤에도 아버지는 변한 게 없었다. 툭하면 일을 벌이고 자식들에게 돈을 요구했으며, 마치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당당했다.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지만, 애초에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가족이 이렇게 상처받고 와해할 지경에 이르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오랜 세월 그런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인연을 끊고 지낸 게 2년쯤 전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고독사를 알리는 전화가 혜진에게 반가울 리 없다.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밉고 화가 나지만,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야 할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처리해나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자기 가정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맞는 거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끼니를 제대로 챙길 수도 없었고, 아이를 돌볼 수도 없었다.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도 힘들었다. 남편이 옆에서 집안일을 많이 해주고 아이를 돌봐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혜진의 일상이 있다. 혜진이 움직이고 돌아다니면서 챙겨야 할 그녀만의 일상이 있다. 그것도 해내지 못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은 극단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자꾸만 아버지의 마지막 공간이 생각났다. 오래되어 방치된 시신, 그런 곳을 깨끗하게 치우고 나가야 하는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청소대행업체를 찾았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냄새를 마주해야 했다. 방치된 아버지의 시신이 남긴 건 오래되다 못해 젓갈 냄새가 나는 유품과 빚이었다. 견디고 일어서야 했다. 남편과 병원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주인공의 마음을 생각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오랜 세월 힘들게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럼 다 정리된 기분으로 개운해야 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뭔가와 마주해야 하는 이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말이다. 나는 그걸 아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혜진은 그런 기분을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기분이 없는 기분. 형체가 없는 기분일까? 뭘까?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기분이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내 마음이 없어진 기분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하지 못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 급기야 '나'라는 사람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크게 바라는 것 없었다. 그녀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기 삶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자꾸만 들여다보던 마음은 엉망이었다.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는 게 뭔지,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 상태가 기분이 없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는...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고 가능한 일들. 좋은 거 앞에서는 좋아하고, 싫은 거 앞에서는 싫어하는 기분이 드는 게 당연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당연한 일을 느낄 수 없다는 게,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게 너무 슬프게 들린다. 부모의 부재가 불러오는 상실감 같은 게 아니었다. 미워하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개운함이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는 죽었는데,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다. 그건 아버지의 고독사 때문일까? 아니면 살아오는 동안 아버지 때문에 힘들었던 성장 과정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건, 이 기분이 우울하다는 것과 이 우울을 떨쳐버려야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그 힘든 여정을 혜진은 시작했다.

 

가끔 들려오는 고독사가 내 아버지의 이야기가 된다는 상상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고독사는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고독사가 왜 이르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홀로 생활하게 되는 과정이 누구나 비슷하지 않겠지만, 이런 경우의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을 힘들게 하고 가족과 헤어진 아버지가 그런 죽음으로 세상을 마무리했다는 게 안쓰러울 법도 하건만, 왜 나는 혜진의 아버지에게 자꾸 분노가 이는 걸까. 왜 그런 마지막으로 끝까지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떠나는 걸까 싶은 원망이 들었다. 결국은 마음의 병까지 얹어주고 떠난 당신을, 당신이 죽었는데도 용서할 수가 없다는 화가 치밀었다. 이것도 우울이라면 나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겠지만,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그대로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치료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할까 싶지만, 언젠가 혜진도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치유의 결말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경험한 슬픔과 우울은 가슴에 새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한번 내 몸에 들어왔던 병이 나가고 면역력이 생겼을 것 같지만, 사실 언제나 같은 강도로 오는 병이 아니더라도 그 병은 비슷하게 또 마주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는다. 나는 그렇더라.

 

우울증이 생겨서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 된다는 것. 기분이 없는 기분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너무 생생하게 들려온다. 어쩌면 이런 비슷한 기분을 우리도 종종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그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진단받지 못한 병이 되어버려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곤 하지 않았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우울증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하는 우리 앞의 일들에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지 묻기도 하는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의 감정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는...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대부분이겠지만, 그 문제들에 따라오는 감정의 문제는 누가 해결해주기 어렵다. 혼자 견뎌내야 하지만 분명 주변의 도움도 간절해진다. 가족과 친구, 혹은 전문가의 진료까지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방법을 몰랐던 건 아닌데, 선뜻 손 내밀기 어려워서 주저하던 것을 이제는 당당하게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혜진에게 어느 날 닥친 아버지의 고독사는 그동안 혜진의 마음에 담아두었던 산을 하나 넘어가는 일이었다. 이 산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다음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랜 세월 그녀의 삶에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한 사람에 관한 거의 모든 감정을 털어내고 행복을 찾는 일은 너무 어려웠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사람마다 다르고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지금 처한 환경도 달라서 혜진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지 몰라도, 세상을 통과하는 방법 하나를 배운 것만 같다.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감정과 우울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구체적인 위로와 치유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혜진이 방문했던 병원의 선생님이 하는 말처럼, “우리 목표가 약을 끊는 것은 아니잖아요? 잘― 지내는 것. 그게 우리 목표”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게 되는 이 기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이 삶을 유지하고 오늘을 잘 지내는 게 목표가 되는, 행복해질 수 있는 구체적인 위로였던 거다. 나 스스로 잘 지내게 될 일상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듣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할까? 지역의 특색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그 지역 특유의 분위기와 유명한 것들이 있어서겠지.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지역이라는 특성이 분명 작용하는 게 있을 것 같다. 내가 사는 전라도는 이렇다, 충청도는 이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곧잘 즐기는 다코야키, 유명한 한신 타이거즈, 나는 잘 모르겠지만 개그계의 본산 요시모토라는 인물도 자주 언급되는 걸 보면, 마스다 미리는 오사카의 여러 가지를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

 

마스다 미리가 전하는 오사카는 그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성장 시절을 그리워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오사카'는 꿈을 찾아서 도쿄로 갔던 그녀가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이름이기도 했을 것 같다. 우리에게도 종종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학교나 직장 때문에 집을 떠나서 생활하곤 할 때,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모든 게 외로워질 때, 공부나 사회생활이 힘들어서 마음을 기대고 싶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나 장소 말이다. 그건 엄마일 수도, 친근한 고향일 수도, 오랫동안 함께해온 친구일 수도 있다. 그녀가 전하는 오사카는 이 모든 것이 함께한 장소이다. 동네 상점 주인의 친절한 응대,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다정한 말투, 특정 기념일에 강으로 뛰어들면서 자신감을 뽐내는 이들. 희극을 보러 간 공연장의 화장실에 무료로 비치된 요실금 패드 이야기에는 나도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소변이 찔끔하면 사용하라는 의미인가 싶은 저자의 생각이 그대로 상상이 되어 전해진다.

 

 

지방에 살다 보면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여기를 벗어나면 사투리를 쓰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사투리를 쓰나? 대화 상대에게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써 온 말이기에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장난삼아 엄마가 쓰는 사투리를 일부러 쓸 때가 있는데, 그럴 때가 아니라면 말투에 사투리가 묻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데 저자도 그렇고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대개 고향을 떠나면서 사투리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갈 때, 오사카에서 도쿄로 갈 때.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고향을 드러내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이상하게도 말투는 표준어로 쓰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고향의 말은 점점 잊히고, 현재의 주거지와 고향의 구분이 생긴다. 그러면서 또 우리는 표준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배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표준어로 '부추'라고 부르는 것을 전라도에서는 '솔'이라고 부르곤 한다. 웬만한 대화에서 만물상처럼 '거시기'라는 단어 하나로 다 통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직도 이 단어가 가장 궁금하고 신기하다. 있잖아, 거시기. 거기, 거시기. 저기, 거시기. 그거, 거시기 있잖아. 뭐 이런 말들이 계속 들려오면 정신없는데, 나는 전라도에 살면서도 뼛속까지 전라도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오사카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오사카 성, 도톤보리 거리의 맛집 등 보이는 곳곳이 매력이 넘치는 곳이라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사카의 자랑은 '오사카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저자의 오사카 사랑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곳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것들을 차치하고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최고의 자랑이라고 느낀다는 게 어느 정도의 감정인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따뜻함을 느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애정 어린 인간미를 느꼈으면 이런 마음이 가능할까 싶다.

 

일본과 다르지 않은 우리나라의 환경도 느끼게 된다. 남북으로 길게 생긴 나라라는 공통점에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인 사투리에 놀이문화의 다양성까지. 마스다 미리가 전하는 고향의 풍광과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푸근한 곳이라고 증명하는 듯하다. 여탕과 엄마에 이어 오사카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이 세 가지 때문에 지금의 자기 모습이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아마도 오랫동안 이 세 가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뭔가를 돌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조차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다. 어떻게 키워야 하나, 잘 돌보지 못하면 어쩌나... 엄마가 돌보는 작은 화분 몇 개에서 꽃이 피는 걸 지켜보면서도 내가 돌볼 몫으로 화분을 만든 적은 없다. 애완동물을 곁에 두지 않는 이유도 비슷했다. 이 녀석을 내가 잘 보듬어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내 곁에서 외로워하거나 홀대받다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그랬다. 그러니 내게 애완동물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는 대상이다. 누군가의 강아지 고양이를 그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정도.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게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전부였던가 싶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유는 작은 상자 안에 있던 고양이 초비를 거둔다. 버림받은 고양이였지만 미유에게 속하게 된 초비. 오랫동안 유지한 친구와의 우정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남자친구 사이에서 아픔을 겪는다. 그림을 그리는 레이나의 집에 드나들던 고양이 미미는 떠돌면서도 레이나의 곁을 찾아든다. 시니컬한 레이나 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고양이 미미는 길고양이와 집고양이의 중간쯤 행동으로 레이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한다. 1년 동안 집안에서 나가지 않던 아오이에게 고양이 쿠키가 찾아온다. 아오이의 엄마가 분양받은 고양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고 밖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 아오이에게 대화 상대가 되고 친구가 된다. 노부인 시노의 곁에 까칠하고 힘센 고양이 구로가 애완견 존의 자리를 차지한다. 개인 존과 친구 아닌 친구 사이였던 구로는 어느 날 사라진 존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시노 부인의 활력소가 된다.

 

화자 '나'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세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점 드러나는 '나'는 고양이의 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묘했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의 모습, 고양이가 하는 말들, 고양이가 겪는 감정의 변화들까지.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으로 세상을 보고 고양이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고양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들의 생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화자 '나'는 인간의 시선이다.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네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간은 모두 '그녀', 여자다.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세상 만만하게 살아가도 좋으련만, 각자의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신뢰가 없는 연애 아닌 연애를 했다가 친구도 애인도 잃은 여자, 자기 재능을 너무 믿고 있다가 뒤늦게 좌절하는 여자, 우정에 실패하고 1년 동안 집안에서 파묻힌 여자, 결혼생활에 지친 시집살이에 이제 혼자가 됐지만 외로운 여자.

 

"누가, 누가 좀."

나는 그녀가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잃었음을 알았다.

"누가 좀 나를 구해줘."

그녀는 언제까지고 울었다.

우리를 실은 이 세상이 끝없는 암흑 속에서 계속 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46페이지)

 

처음 생각할 때는 이 여자들이 고양이를 집안에 들이면서 떠돌이 고양이를 거두는 것이 아닐까 했다. 길에서 흔히 보는 고양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먹이를 주고 돌봐주는 일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다른 면이 조금씩 보이면서 누가 누구를 돌보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삶의 여러 가지 것들로 지키고 힘든 인간에게, 고양이는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옆에서 공생하는 대상이었던 거다. 고양이의 언어로 하는 말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된다. 이게 가능할까? 등장인물들과 네 마리의 고양이, 한 마리의 개가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겠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은 굳이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것을. 표정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말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기적(?)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인간이어도 동물이어도 상관없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강하기만 한 인간은 없지만 계속 약하기만 한 인간도 없으니까."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99페이지)

 

네 마리의 고양이가 각자 다른 것 같지만, 고양이들은 또 고양이들과 함께하는 주인들의 사연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슬픔이나 상황이 낯설지 않다.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가 이들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진학 문제, 남녀 문제, 우정 문제, 결혼생활의 문제 등 여자들에게 공통으로 다가오는 고민이 그대로 전해진다.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어른 사람 마음을 흉내 내면서 읽게 되고, 내가 아직 감당하지 못한 문제 앞에서는 그들의 고충을 짐작하면서 읽게 된다. 사는 내내 우리가 털어내지 못할 삶의 힘겨움을 고양이와 여자의 일상으로 공감하게 하는 이야기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적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컷으로 장면들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흥미로운 소재에 평범한 일상이 어우러져 판타지와 드라마 두 가지 장르를 만나는 기분이다. 특히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동물들의 세상이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그냥 길고양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고양이들에게도 나름 관할 구역(?)이 있고 그렇게 정해진 구역에 발을 디디는 것은 남의 구역을 침범하는 게 된다. 바로 전쟁의 시작인 거다. 고양이들의 난투극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본 적이 없어서 다 알 수는 없으나, 인간 세상의 구역 싸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역의 터주대감같이 그 구역의 오래된 노견 존의 지혜가 고양이들끼리의, 고양이와 인간의 교감을 이뤄내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달리고 달리다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세상이란 내 생각과 다르다는 걸.

세상의 크기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무서워.

아오이도 분명 이걸 두려워했던 거야.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141페이지)

 

단순히 인간의 시선으로 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면서 교감하고 성장하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괜히 더 착해지고 싶은, 누군가를 더 이해하고 싶은, 내 인생을 조금 더 아껴주고 싶게 하는 이야기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한 뭔가를 엿본 기분이다. 이제 길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들이 다시 보일 것 같다. 그들의 사연과 사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길을 걷게 될 것만 같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작가가 그랬던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자기 이야기를 한번 써보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이 한 마디가 계속 생각나는 건,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감정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몇 편을 접하면서, 그녀의 작품이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흡수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경험한 그대로 사실대로 적어야만 했는지 읽으면 저절로 느끼게 된다. 이건 그녀의 이야기이고, 그녀가 느낀 그대로 적어내려 애쓴 흔적이며, 그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이면서, 그녀가 작가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말이다.

 

1952년의 어느 여름, 그녀의 열두 살 일요일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때렸으며, 심지어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치면서 낫을 들었다. 공포의 순간,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날의 사건은 그대로 끝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탁에 앉는 부모. 흔한 부부싸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렇게 행동했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의 일은 열두 살의 아니 에르노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부끄러움』 117페이지)

 

'부끄러움'이라는 제목에서 인간적이지 못한 인간의 행동을 떠올렸다. 흔히 어떤 행동이나 말투를 보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혐오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 말이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할 때는 대개 그런 순간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가 전하는 부끄러운 순간은 충격이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삶의 곳곳에서 묻어났던 어떤 감정이 생각났다. 부유하지 못한 우리가 세상에 부딪히면서 느끼는 순간순간들 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며 싸우던 그때. 아마도 그녀 가족이 중산층도 되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계층이라는 자각에서 그녀의 부끄러움은 시작된 것 같다. 싸우다가 자기 아내를 죽이겠다고 낫을 손에 휘두르는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트라우마가 된 건 아니었을까. 특히 그녀가 공립학교가 아닌 기독교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생활 수준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던 순간 그 부끄러움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기독교 사립학교는 그녀와 다른 아이들 사이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게 했다. 결국, 가난하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부모가 부끄럽고, 그런 부모가 자기 존재의 뿌리라는 게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 거다.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지만, 소녀스럽고 괜찮은 외출복을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 우아하고 예쁘게 자랄 거라는 긍정적인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사람들의 시선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아름다우며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하는 대상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게 그녀에게는 상처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버지와 둘이 떠난 여행지에서도 그녀의 부끄러움은 계속됐다. 여유롭게 여행 준비를 하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부족함에 시달렸다. 때가 낀 운동화를 신고 계속 다녔고, 넉넉한 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에 가서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했고, 우아하게 식사할 줄 몰랐다. 비슷한 또래의 여행객에게서 매 순간 다른 점을 볼 때마다 그녀는 좌절했다. 자기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배경을 가졌고, 또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갈지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게 그녀에게 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녀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근원이 시작된 그곳에서부터 이어져온 부끄러움이 사라질 곳이 있던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137페이지)

 

열두 살의 그녀가 체험한 1952년은,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리 부유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전쟁 후에 안정적인 나라가 얼마나 되었으려고.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부와 가난은 뚜렷하게 구분되기 마련이니, 그녀 가정의 가난이 쉽게 변할 환경도 아니었던 거다.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테니, 그리 아파하거나 차별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번 눈에 들어온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경험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그 체험의 감정을 그녀는 오랜 세월 담아두고 살았다. 부끄러움은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으며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년이 된 그녀의 어느 날, 그녀는 1952년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낸다. 오랜 세월 그녀를 부끄럽게 했던,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그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자기의 기억을 꺼내면서도 객관적인 그녀의 감정은 때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이기에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인간이기에 가능하고 허용될 것 같은 그 주관적인 느낌을 그녀는 철저히 배제하며 적었다. 그 순간의 상황이나 현상에 감정을 넣지 않는다. 오랜 전의 기억을 꺼내면서 추억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와서 이 기억을 꺼내놓아야만 했던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져서다. 이런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기어코 이걸 써 내려가지 않으면, 이 순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자기 존재의 불편함을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하며 넘어서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 한 번쯤은 찾아올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옥죄며 단단히 묶어놓고, 어떤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살아왔기에 완전하지 못했던 순간을 다시 마주할 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하게 세상으로 보게 했던 기억에, 지금 그 기억과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결국은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에 몸부림칠 때.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언젠가 한 번은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만 같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는 말과 기억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게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글이 더 충격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다들 비슷하게 경험하는 어떤 감정과 충격들일 텐데, 그 비슷한 경험과 영향에서도 비슷하지 않게 드러내는 방식들. 누구는 해냈고 누구는 해내지 못한 채로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차이를, 그녀는 이렇게 통과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뿌리를 수치스러워했던 기억에서 벗어났다. '나는 기어코 이렇게 쓰고 말았어.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 이제 벗어날 수 있어서 홀가분해. 이렇게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냈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 You win!

 

전작들에서와 다르지 않은 그녀의 쓰기 방식이 가슴에 파고든다. 『단순한 열정』에서 사랑의 절절함을 목 놓아 우는 것처럼 기록해내더니,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서술하더니,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기억을 들추며 비루하며 수치스러웠던 솔직한 기억을 폭발시키는 듯하다. 그녀다운 글쓰기 방식이 혹시 언제 변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 방식을 끝까지 고수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일기처럼, 기록처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느낌을 얻고 싶어서다. 아무리 솔직해도, 아무리 객관적으로 쓴다고 해도, 이렇게 자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은 부족한 우리들일 테니까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번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는 게, 아직은 그녀의 작품을 가까이하고 싶은 이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05-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과 얼마전에 이 책이 나온 걸 알게 되었는데 구단씨 님은 벌써 읽고 이렇게 근사한 리뷰를 쓰셨네요. 역시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 좋아요.
:)

구단씨 2019-05-30 14:29   좋아요 0 | URL
<세월>과 <사진의 용도>는 읽는 중이라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 <단순한 열정>은 좋아하는 글이거든요.
이번 <부끄러움> 역시 짧은 문장 읽으면서 숨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더라고요.
이제까지 읽은 그녀의 글 중 가장 있는 그대로, 솔직한 문장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레삭매냐 2019-05-3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나온 책의 재개정판
이더라구요.

구판으로 도서관에서 한 번 봐야겠네요.

구단씨 2019-05-30 15:5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기존 출간작을 몰랐어요.
번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의 글을 만나는 데는 구판 신판 구분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
 
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이었던가. TV로 본 어떤 남자는 하루를 버티는데 26알의 약을 삼켜야 한다고 했다. 여기가 아파서 이 약을 먹으니 부작용이 생겼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다시 저 약을 먹고, 저 약을 먹고 생기는 또 다른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을 먹다 보니 그렇게 많아졌다고 한다. 약이라고 하면 몸의 독을 빼는 데 쓰는 거 아닌가? 그 독을 빼기 위해 먹은 양은 몸속에 또 다른 독을 만들고, 그 독을 빼려고 또 다른 약을 쓴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지만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내 독과 약의 엎치락뒤치락, 흡입하고 쏟아내고.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들어온 독을 내보내기 위해 먹는 약, 그로 인해 쌓이는 독을 내보내는 일의 반복. 우리 몸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틸 것이다.

 

한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다.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의료진의 추측이 있지만, 사실 화자인 ‘나’는 그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뿐이다. ‘나’가 눈을 뜬 곳은 3인실 병실이었는데,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는데, ‘나’는 점차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독을 다스리던 남자 조몽구의 이야기를 쓴다.

 

함부로 손대기 어렵기도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게 독이 아니던가. 음식에서, 자연에서 만나는 동식물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독은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 독을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사는 남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그 자신이 지닌 독의 존재를 조몽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는 아버지(실은 할아버지에서부터)로부터 이어져 온 독과 그 해독을 위해 존재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가진 독의 근원, 독을 향해 손을 뻗는 일, 독에 관한 관심 같은 것을. 어머니가 그렇게 해독하려고 애쓰던 모든 상황을 지켜본 그로서는 이 운명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두통마저 소화하려고 애쓴다. 두통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등장한 삼촌 조수호는 그가 독에 가까이 가는 다리가 된다.

 

소설에서 줄곧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한 가지 정의로 향해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독이면서 약이라고. 그렇게 접근하면 소설 속 인물들이 가까이하는 독은, 독이면서 약이다. 그들은 식물에서 찾은 독으로 연구와 실습(?)을 한다. 독과 독이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떤 독이 서로 만났을 때 강해지는지 또는 약해지는지, 독이라고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용할 때 약이 되는지 직접 독에 닿으면서 확인한다. 온갖 꽃, 동물, 광물에서 얻는 독으로 인간의 몸이 반응하는 것 역시 확인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 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하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을 탄다.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100페이지)

 

“삼촌도 독이 무서웠어?”

“그럼 무서웠지. 늘 무서웠지. 세상도 무서웠어.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198페이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식물에 독이 있다는 것인지 놀랍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이곳의 구석구석에 자리한 위험을 감지하게 되기도 한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안전(?)할 수 있지만, 한번 알게 되면 그 위험을 우리는 또 어떻게 이용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그 독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조몽구의 엄마는 아들의 두통을 낫게 하려고 독에 손을 댄다. 어릴 적부터 병치레했던 자경은 자해를 일삼는다. 자경의 오빠 정우는 오래전부터 약에 중독되었던 때가 있다. 군대에서 만난 광수는 아버지가 술로 살아왔고 술로 죽었다. 결벽증에 걸렸던 소화는 페인팅에 참여하면서 독의 변화를 확인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평범하지 못한 삶을 가졌고, 그 시간 동안 독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 안에 조몽구가, 그 역시 독에 감염되었고, 그 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있다. 독과 약을 동시에 품게 된 거다.

 

‘나’가 서술하는 조몽구의 인생은 한마디로 독과 약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어디 조몽구뿐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과 닮지 않았는가? 소설은 독과 약의 적절한 사용을 시사하면서 독을 독으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독은 단지 물질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 역시 들려준다. 인간의 분노와 욕심, 이기심, 공포, 어긋난 신념 같은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것 역시 독과 약이 같이 작용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를 일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듯이. 어느 한 곳, 한 사람에게 머문 게 아닌 거다. 물질과 정신에 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상 모든 일에 스며들어 우리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지켜보게 한다. 모든 물질은 독이고,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고.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분한다는 정의를 이렇게 확인한다.

 

대체 독이 뭐야? 그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몸 안에 들어와 생체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게 독이야. 몸에 꼭 필요한 호르몬, 비타민, 히스타민, 세로토닌 같은 생물활성물질도 내부에서 과도하게 분비되거나 외부에서 대량으로 투여되면 독이 된다는 걸 너도 모르지 않잖아. (467~468페이지)

 

“모든 물질은 독이며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별한다.” (177페이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그들이 독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와 과정을 보면서 낯설지 않았다. 그 ‘올바른 용량’을 지키기가 어려워 우리는 극단적으로 독과 약으로 치닫는 거 아닐까 싶다. 살아가다 보니 피할 수 없는 독의 세계의 혹독함에서 약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만난 인물들 역시 독과 약, 극과 극을 오가면서 대립하기도 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다다르는 지점이 그 ‘올바른 용량’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약에 가까워지는 경우보다 독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계속 보여줄 뿐이다. ‘해독과 정화’를 마지막 장에 배치하면서 ‘해독’보다는 ‘정화’의 삶으로 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