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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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이 되는 '사하맨션'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장소가 아이러니했다. 작가는 '사하'라는 이름은 러시아 사하 공화국에서 따왔다고 한다. 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의 연교차가 100도나 되는 곳, 가장 추운 그곳의 지하에는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절반이 매장되어 있다고. 영하 70도의 추위에 사람이 견딜 수나 있을까 싶은 그곳에 엄청난 양의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 얘기에 어떤 모순을 느꼈다.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그곳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의 존재는 무슨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사하맨션'은 홍콩의 구룡성채를 떠올리며 그렸다고 한다. 청나라 국경의 요새였다가 치외법권으로 남겨져, 홍콩의 옛 거주지로 무법지대였다고.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 생활했던 장소라고 하는 그곳의 설명이 딱 사하맨션이었다. 이렇게 우울하고 아프게만 느껴지는 곳이 역사상 실제 존재했던 곳이라는 게 놀랍기도 하면서, 현실의 세상과 또 얼마나 다를까 싶은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기업이 한 도시를 인수했다. 본국으로부터 독립해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시국가로 변모한다. 사람들이 타운이라고 부르는 그곳은 상당히 비밀스럽다. 타운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타운에서 인정하는 전문 능력을 갖추어 주민권을 가진 L, 주민의 자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범죄 이력이 없고 간단한 자격 심사로 체류권을 가진 L2. L2는 2년 동안 타운에서 살 수 있고, 타운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주민권과 체류권 밖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하'라고 불리며 사하맨션에서 산다.

 

사하맨션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비밀스럽고, 드러내지 못하는 과거가 있다. 주민권과 체류권을 갖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앞으로도 타운에 소속되는 존재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피신하듯 모여든 사하맨션의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규칙과 예의를 지키며 살아간다. 고립된 사하맨션은 타운 안에서도 독립된 공간처럼 보였지만, 타운의 분위기를 해친다면 바로 조치가 취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날, 타운에 살던 한 여자의 죽음에 사하맨션에 사는 도경을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한차례 소란스러워진다. 예상했던 것만큼 길게 끌지 않은 사하맨션의 감시와 경계가 오히려 수상할 지경이다. 그리고 사하맨션의 사람들은 고요하게 자기 몫의 하루를 견디듯이 지낸다.

 

인도를 따라 심긴 벚나무 가지가 자연스럽게 늘어지며 초록 잎들이 터널을 만들었다.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잎들은 초록색으로도, 연두색으로도, 때로는 흰색이나 황금색으로도 보였다. 빛나는 벚나무 터널을 지나는 어린 연인.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진 여름의 벚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봄이 아련한 줄 몰랐고 여름이 반짝이는 줄 몰랐다. 가을이 따사로운 줄 몰랐고 겨울이 은은한 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는, 살았다고 할 수 없겠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겠지. 진경은 혼자 중얼거렸다. (325페이지, 701호 진경)

 

가상의 도시국가라는 데에서 SF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상 속의 국가에서마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그대로 비춘다. 최근 여러 작품으로 만난 작가의 글에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고발하듯 적어간 이 소설에서 마주하는 또 하나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편하지는 않았다. 본국에서 떨어진 작은 타운에서마저 등급이 나뉘듯 사람을 나누는 세상의 방식에 울컥하기가 여러 번, 그 계급의 격차를 줄일 수도 없다는 불행은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다. 애초에 왜 그런 계급이 존재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던 답답함은 이 소설에서 더 심각해지는 것만 같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시장 논리를 거부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나뉘어가는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서글픔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달려가도 안 되는 목적지를 오늘도 의미 없이 계속 가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다. 애초에, 살면서 주어져야 할 어떤 기회도 만나지 못하는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인가 싶은 마음에, 소설이 소설로만 보이지 않은 까닭에...

 

현실에서 마주치는 너무나 닮은 이야기에 마치 지금 내가 사하맨션에 사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두렵고, 우울하고, 절망적인 오늘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 건 사하맨션의 사람들 때문이다. 주류에서 밀려나고, 사회적 약자들의 집합소 같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음은, 한 번씩 끝에 다다르려는 마음을 붙잡는 힘이 된다. 이렇게 저렇게 꾸려온 사하맨션의 40여 년 세월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만든 인간적인 방식들 말이다. 꽃님이 할머니가 사하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받아주고, 관리실의 영감님은 은근하게 사하맨션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힘이 된다. 조금씩 변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내일을 바꿀지 기대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견디는 것 이상의 오늘의 살아가고 있다. 상처받으면서 사하맨션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을 차별하는 시스템에 맞선다는 것, 그들이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의 연대를 만들어가는 희미한 모습들이 긴장된다. 마치, 내일 있을 시험을 잘 통과하고 싶어서 오늘 한 문제라도 더 풀고 싶은 간절함 같은 게 밀려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간절한 마음들이 묶이면서, 더 단단해지는 구성원으로 조금씩 거듭나는 걸 보면서, 이들이 언젠가 다시 일으킬 나비 혁명을 기대한다.

 

"괜찮아?"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 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112페이지, 214호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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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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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집 안에서 창문 밖 세상을 보는 것뿐이었다. 자기가 절대 발 디딜 수 없는 공간에 오가는 사람들, 작은 공원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는 들어오고 누군가는 나가는 이웃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 마치 갇힌 공간처럼 집 안에서 혼자 하루를 보내는 여자의 일상이었다.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는 애나의 유일한 세상은 집안이다. 밖이 보이지 않게 커튼으로 집안의 밝기를 차단한다. 필요하면 실내의 불을 켜기도 하겠지만, 그녀에게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다. 가끔 컴퓨터로 접속해서 다른 이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상담하는 그녀는, 지금은 쉬고 있지만, 소아정신과 상담의였다.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상담하고 아이들이 정상적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애나가 마음의 병을 앓고,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애나의 현실이 그렇다. 남편과 아이는 떠났고, 애나는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을 언제나 와인과 함께 먹는다. 늘 술에 취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버틸 수 없는 그녀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기에 함부로 단정할 수도 없다. 그녀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아래층의 세입자와 정기적으로 찾아와 몸을 단련해주는 치료사와 주치의뿐이다. 그런 그녀가 살인 현장을 목격했다.

 

그녀의 일상 중 하나인 밖을 지켜보는 일에 고성능 카메라가 필요했다. 평소 자주 사용하던 카메라로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이웃집의 거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본다. 애나와도 안면이 있던, 이웃집 소년 이선의 엄마인 제인 러셀이 누군가가 휘두른 칼에 찔려 쓰러졌다. 누가 찔렀는지까지는 보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 제인의 모습만 봤다. 당장에 이웃집으로 달려갈 수 없던 애나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웃집에 사는 제인 러셀은 다른 외모의 여자였다. 물론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이웃들과 경찰은 애나가 본 것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겠지. 여러 가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 온종일 와인을 들이켜며 사는 여자, 더군다나 애나가 봤던 장면의 주인공들이 증명해주지 못하는 살인의 현장. 누가 애나의 말을 믿어줄 수 있겠는가. 읽으면서 나도 착각할 정도였다. 애나가 계속 지켜보는 이웃집 사람들의 행동이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종일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애나의 눈에 목격한 것들이 사실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지? 그녀가 술에 취해 생각한 것을 직접 본 것으로 여기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애나는 외친다. 봤다고, 자기가 살인사건의 목격자라고, 자기가 상상한 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라고, 미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애나가 본 것은 분명하다고 거듭 말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절망적이지 않았을까? 자기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말이다. 그게 범죄 현장인데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형사부터 이웃 사람들, 그녀의 주치의까지 그녀가 하는 말을 정신이상자의 헛소리로 여겼다. 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 그건 그녀가 보낸 1년이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보면 알 수 있다. 계속되는 심리 상담과 매일 복용하는 약, 끊이지 않는 술,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남편과 딸 이야기. 그리고 정신적인 문제로 한 번도 밖에 나가지 못했던 1년의 세월이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안으로 숨어든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겠지. 직접 목격한 살인사건조차 그녀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게, 더는 살아갈 의미를 잃은 것 아닐까? 이제는 그녀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가 본 것이 상상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이라고 믿는다. 누구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없고, 그녀 역시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혼자다. 그렇게, 혼자인 그대로 그녀는 삶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내가 타인을, 세상을 보는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본 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일까? 진실일까? 전부일까?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진실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진실을 찾는다. 내가 본 것이 맞는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 삶은 보는 그대로를 믿음으로써 흘러간다. 믿지 않으면 어쩔 텐가?

 

소설은 결말 부분에 이르러 이제껏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꺼내놓으며 더 깊은 의문에 빠지게 한다. 애나가 본 것이 정말일까 싶은 궁금증에 살인사건의 장면을 되돌려보고 싶게 만든다. 이대로 애나의 착각으로 머물 것인지, 애가 본 것이 사실일지 확인하고 싶은 간절함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하게 한다. 특히 이야기 틈틈이 애나가 즐겨보는 흑백 영화들, 추리 미스터리 영화들, 대부분 히치콕의 영화이거나 히치콕을 모방한 영화들을 볼 때마다 현재 애나의 상태나 숨겨진 진실들에 관한 힌트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소설 속 영화에까지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애나의 말을 더 믿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영화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평소 즐기던 추리 미스터리한 이런 영화들이 애나의 착각을 더 심각하게 했겠지. 사실 처음부터 애나의 말을 믿을 수 없게 설정한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애나가 본 것이 진실인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누가 왜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독자가 찾아가게 하는 길을 만든 게 아니었을까.

 

창문을 통해, 온라인을 통해 애나가 만났던 사람들과 만들어가는 사건과 진실들이 무슨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씩 채워지는 느낌이다. 이미 에이미 아담스와 게리 올드만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니 더 흥미로운 이야기다. 소설의 끝부분에 애나가 봤던 영화들의 목록도 있으니 참고해서 소설에 푹 빠져들면 좋겠다. 어쩌면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이 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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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유책방 2019-09-18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네요

구단씨 2019-09-18 20:44   좋아요 0 | URL
푹 빠져들어서 읽기 좋아요. ^^
 

가족 간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나는 이 사실을 대학원을 다닐때 배웠다. 
"환자랑 몇 년을 알고 지내도, 그들은 자넬 또다시 놀래킬걸세." 
우리가 첫 번째로 악수를 나눈 날, 웨즐리 교수가 한 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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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9-1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댓글은 처음 드리는 것 같아여 :-)
행복하고 즐거운 추석 되세요~

구단씨 2019-09-17 20:55   좋아요 0 | URL
아이고, 추석이 이미 지나버린 다음에 봤네요.
명절 연휴 잘 지내셨나요? ^^
일교차 심해지는 날들이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행복한 가을 지내세요~
 

 

죽음에도 격차가 있다는 말이 씁쓸하게 들렸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온갖 차별과 부조리를 겪으면서 사는 우리인데, 죽음에도 차이가 있다는 게 아프게 들리는 건 당연하다. 이 세상에서 차별받으며 살아왔더라도, 죽는 그 순간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은 후에 우리는 하나의 시신으로 존재할 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죽은 자들의 말은 그 평등을 한참 비껴가 있다.

 

법의학 현장에 있기 때문에 더 잘 보이는 "현실"이 있다.

같은 의사의 길을 가지만, 법의학자는 직접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임상의들과 거리를 좁혀, 법의학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공유할 필요성을 지금 느끼고 있다. (죽음의 격차 236페이지)

 

법의학자인 저자는 시신을 부검한다. 부검을 통해서 죽음의 원인을 알아낸다. 그 시신은 자살, 타살, 혹은 사고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부검의 결과는 때로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의 일은 부검으로 사건 해결하는 데 있지 않다. 사건과 연관 짓지 않고, 오직 시신이 자기 몸으로 하는 말을 듣는 것뿐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몸 안에서 발생한 문제로 죽음에 이른다던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단서를 몸 안에서 발견하여 죽음의 원인을 밝혀낸다던가. 딱 거기까지다. 그 이외의 일은 경찰이나 부검을 의뢰한 이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죽은 이들의 몸에서 죽음의 원인 그 이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고사, 교통사고, 살해. 죽음의 양상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안타까운 죽음이 저자의 눈에 많이 담겼던 듯하다. 아무리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눈앞의 시신을 봐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어디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간단하던가. 저자는 객관적으로 자기 일을 하면서, 서류에 기록해야 할 것들 이외의 것은 가슴에 담았다. 그가 지켜본 죽음의 모습. 자살이나 고독사, 제때 치료받지 못해서 죽음에 이르는, 화장실에 버려진 신생아 등등. 돈이 돈을 낳는다고 하는 금수저의 인생이 아닌 보통의 삶은 흙수저에 가깝다. 살면서 겪는 환경의 차이가 있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에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듯했다. 살아있는 동안 겪는 그 차이를 죽음에서도 뚜렷하게 전하는 시신들이다.

 

출발선이 달라서, 사회적 도움이 부족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점점 고립되어 가는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들려준다. 저자는 죽음으로부터 그 고립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세상의 차별에 살기는 점점 힘들고, 그 차별에 도전하고 열심히 살아가려 하지만 자꾸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그러다 겪는 죽음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쓰라리다.

 

치매를 앓는 아내는 남편이 죽은지도 모르고 그 집에서 일주일 넘게 생활했다. 방문 도우미가 방문했을 때 방치된 시신을 보게 됐지만, 그때까지도 아내는 남편의 사망을 모른 채로 TV를 보고 있었다.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시대. 고령화가 이유이기도 하지만, 시설이나 자녀의 도움을 제대로 받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크다. 그래서 단 둘뿐인 노인의 가정에서 치매 아내를 돌보던 남편은 집안에서 사망했어도 자기 죽음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귀가한 여인은 며칠 후 죽은 채로 발견됐다. 뺑소니는 아니다. 가해자는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피해자가 거부해서 집까지 데려다줬다. 그런 여인이 며칠 후 사망했다. 외상은 없었다. 부검 결과 교통사고로 내상이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해서 죽은 거였다. 그녀는 왜 가해자의 치료를 거부했을까? 그녀는 술을 사 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함께 사는 엄마가 자기가 술을 사 오다가 사고가 난 걸 알게 될까 봐 치료를 거부했다. 멀쩡하게 걸을 만했고 다친 데도 없었다. 인생의 실패 후 우울하고 술에 의존하며 살던 그녀는 술 좀 그만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간 거다. 그녀가 술에 의존해야만 했던 상황이 온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술에 의지하면서 버텨야만 했던 그녀의 삶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저자의 말을 듣다가 놀랐던 건, 의외로 동사가 많았다는 거다.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동사가 많았다. 동사의 대부분은 노숙자나 기초생활수급자 같은, 생활이 여유롭지 못하거나 거리에서 생활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혼자 사는 이들이라는 거. 거리를 헤매며 살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거나, 집안에서 혼자 있다가 죽어서 사망한 경우였다. 특히 집안에서 사망했는데 왜 동사가 발생하는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는데, 그건 의외로 간단했다. 혼자 있다가 넘어졌는데, 다시 일어나지 못해서 추위에 난방을 켜지도 못한 상태로 얼어 죽은 거였다. 만약 그때 집안에 누구라도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금방 연락이라도 할 상황이었다면 그는 동사했을까? 아마도 옆에서 부축을 해주고, 구급차를 불러주고, 병의 치유를 도울 수도 있었겠지.

 

고독사가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상황이 공감이 되지만, 공감이 된다고 해서 그 모든 고독사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이건 개인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 것이기에 말이다. 저자도 이 부분에 많이 마음을 쓰는 듯했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격차가 죽음에게까지 이어지는 걸 많이 아파했다. 저자가 부검한 전체 주검의 약 50%가 독거자였다고 한다. 약 20%가 생활보호 수급자였고, 10% 조금 안 되는 사람이 자살자였단다. 지역마다 차이가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 수치라면 보편적인 상황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들이 독거자가 되기도 하고 삶을 비관해 자살을 하기도 하는 현실 그대로를 목격한 거다. 저자는 죽은 자의 몸에서 발견한 신호, 구조 요청을 하는 것 대신 침묵을 선택하여 죽음에 이른 이들의 간절함을 읽고 우리에게 전한다. 그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그리게 한다. 행복한 죽음이 아니라 변사체가 되어 세상에 드러나는 삶을 선택한 이들이 보여주는 건 사회의 음지 모습이었다.

 

'빈곤에 의한 죽음'이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그 죽음이 참으로 제각각이다. 빈곤 때문에 병이 생겨 사망하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통된 점은 이것이 일본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죽음의 격차 52페이지)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저자가 들려주는 많은 죽음이 무겁게 다가왔다. 저자는 일본인이지만, 이 책으로 본 현실은 일본과 다르지 않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기에 말이다. 빛이 없는 이들의 삶 면면을 보면서 저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지만, 부검 사이사이에 들려오는 저자의 말을 듣다 보면 저절로 알 수 있다. 그가 목격한 죽음의 격차가 삶의 격차와 다르지 않음을, 그 격차를 줄이는 일에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가, 국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많은 사회적 제도가 구제할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는 계속 발생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많은 문제가 우리 삶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파고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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