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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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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시작이다. 하야타는 조국의 재건을 고민하면서 떠돌던 중에, 탄광의 모집인에 이끌려 갈 뻔했다. 그때 하야타의 잘못된 선택을 막아준 아이자토 미노루를 만난다. 아이자토 역시 탄광 모집인이었지만, 탄광도 분위기가 달랐다. 아이자토는 조금 더 인간적이고 덜 힘든 탄광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싶어 하는 이다. 하야토는 처음에 탄광에 관심도 없었지만, 아이자토를 만나고 그를 따라 스스로 탄광으로 간다. 하야토는 아이자토의 무엇에 이끌렸을까. 어차피 같은 일본인, 엘리트인 하야토의 신분을 속이고 탄광에 넣어줄 이, 하지만 분위기가 묘한 아이자토를 믿고 따를 수 있다는 맹목적인 마음으로 그를 따른다.

 

아이자토를 따라간 탄광은 일본인 광부가 전부였다. 때는 패전 후였으니, 조선인들은 모두 떠났다. 그래도 탄광은 유지해야 하니, 정부는 일본인 광부들을 고용하면서 탄광을 이어간다.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탄광은 매 순간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작업 현장이다. 갱으로 내려갈 때마다 다시 온전하게 올라올 수 있을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강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미신에 의지하면서라도 안전을 기도한다. 그들이 믿는 여우 신.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좋다. 광부들의 안전과 그 가족의 안심을 위해서라면 어떤 신이라도 필요했으리라.

 

어느 날, 이 여우 신을 교묘하게 인용하여 살인이 일어난다. 하야타가 믿고 따르는 아이자토가 갱이 무너져 매몰되었다. 곧 탄주에서는 탄광의 '기도'가 죽었다. 금줄에 목을 맨 채로. 기도의 사연을 잘 아는 이들은 그가 자살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면서 광부 기타다가, 그리고 니와가 기도와 같은 모습으로 죽는다. 이쯤 되니 이들 모두가 자살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그들은 모두 자기 방 안에서 죽었고, 그 방의 방문과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죽였다면 도대체 어디로 탈출했단 말인가. 거듭되는 밀실 살인으로 탄광은 분위기기 뒤숭숭하고, 누가 범인일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야타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탄주의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는 순간, 그는 이 죽음이 절대 살인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들을 죽이고 있는지 찾아내야 했다. 하나씩, 차근차근, 하야타는 살인이 행해진 밀실을 살펴본다. 살인에 쓰인 금줄과 밀실로 만들어버린 도구들을 눈여겨본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런 장면으로 스쳐 지나갔을 요소들을 면밀하게 살피며 죽은 이들의 인생과 죽음의 이유를 살핀다.

 

어떤 사람은 면사무소 직원에게 "일본으로 간다"라는 말만 듣고 군청까지 끌려왔다. 거기서 높은 사람의 연설을 듣고서야 자신이 탄광에서 일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444페이지)

 

지금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건.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겪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고통이 바로 연결된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면서 데려간 곳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만들었고, 강제 징용으로 탄광으로 끌고 갔다. 그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한국인으로 채웠고, 그들이 부족한 것을 한국인의 노동력으로 끌어냈다. 인간답지 못한 생활을 제공하면서,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싶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게 했다. 전쟁은 끝났고 우리나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그때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대한민국을 아프게 한다.

 

이 소설이 특이하게 다가오는 건, 태평양전쟁 직후라는 역사적 배경에 호러미스터리의 요소를 완벽하게 녹아내면서, 일본인의 시선으로 보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심정을 담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광부들의 죽음, 시간을 거슬러 찾아낸 그들의 연결고리, 연쇄살인처럼 벌어진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작가의 전작들이 어땠는지 알 수 없는 이 무지한 독자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이 작품으로 미쓰다 신조에게 입문하는 즐거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검은 여우를 모시며 마음속 불안을 잠재우는 사람들의 믿음을 죽음에 덧입히면서, 귀신의 장난인지 누군가의 잔혹한 계획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을 만든다.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범인인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던 걸 보면, 작가가 잘 직조한 이 소설의 짜임새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결론에 다다를 때 느끼는 그 사건의 결말과 원인, 인간적인 복수심에 누가 감히 벌을 줄 수 있을까.

 

이미 미쓰다 신조의 팬이라면, 이 소설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로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처음 접한 나는, 어떻게 이런 소설을 독자에게 내놓을 수 있을까 싶어서 놀랍기부터 했다.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하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 읽으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빠져드는 건 처음이다. 왜들 그렇게 이 작가의 이름을 언급하는지 몰라서, 그 궁금증에 언젠가 한 번은 완독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이제야 그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특이했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에는 그 무게감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하지만 이런 미스터리라면 언제든지 또 펼쳐 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마 작가의 이름을 모르고 읽었다면 한국인 작가가 쓴 소설이 아닐까 착각을 할 만큼, 누구보다 한국 독자에게 더 사랑받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소개글의 어떤 문장처럼, '참혹한 역사와 칠흑빛 공포, 합리적 추리의 완벽한 하모니'였다.

 

역사와 미스터리의 조화가 이렇게 완벽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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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1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호호호~

탐난다.

 

 

 

 

 

 

 

 

 

 

빅머그 자태가 그냥... 탐난다... 책도 머그컵도... 에휴...

https://www.aladin.co.kr/Ucl_Editor/events/book/2019_borntoread53_pop1.html

 

리커버판, 합본, 양장, 한정판....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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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12-2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책 삽화가 후덜덜이더라고요.
삽화때문에 소장하고 싶어졌어요

구단씨 2020-01-02 18:20   좋아요 0 | URL
언제 읽을지도 몰라서, 어차피 장식용(?)이겠지만...
탐나네요. ^^
 

 

오늘 저녁 밥상에 오른 음식은 제육볶음이다. 어제 마트에서 할인 가격으로 사 온 부드러운 돼지고기에, 온갖 야채를 듬뿍 넣어 얼큰하고 달달하게 볶은 게 내 입맛에 딱 맞는다. 고기보다는 야채를 먼저 집어 먹고 있는데, 엄마가 슬쩍 고기를 집어 나 있는 쪽으로 놓는다. 같이 먹자는 의미다. 어제 같이 사 온 밤맛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 마시면서,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된다면서 투덜투덜. 그래도 젓가락질을 멈추지는 않는다. 맛있으니까. ^^

 

일상의 많은 날에서 종종 엄마와 이런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집 앞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오거나, 영화 <겨울왕국>을 보자는 엄마의 말에 더빙판을 예매하거나(엄마는 자막 읽기 힘들다면서 한국 영화나 애니메이션 더빙을 선택한다), 저녁 하기가 귀찮다면서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씩 입에 물고 걸어오거나, 집 근처 기찻길 주변을 돌면서 운동이라고 우기거나... 생각해보면 너무 소소하다. 엄마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참 많을 테지만, 사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맞는 결과를 내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게 언제나 미안하면서도 너무 익숙하다. 엄마니까, 엄마는 자식의 부족한 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줘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언제나 지켜보면서 또 기다려줄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또 그렇게 믿어왔다.

 

 

그게 언제까지일까? 내가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엄마가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고, 엄마가 우리 형제들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우리가 사는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아는데도, 자꾸만 착각하게 된다. 현재 상황에 핑계를 대고 안주하면서 기다려주는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미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떤 순간이 다가오고 후회를 하겠지. 그때는 이미 늦을 테지만, 어리석은 나는 또 그걸 모르고 계속 지금만 보고 있겠지... 우와노 소라의 소설에서 단편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를 읽으면서, 어리석은 자식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게 됐다. 아마도, 어쩌면 나도 가즈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가즈키의 열 살 생일날, 눈앞에 이상한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어머니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하나씩 줄어들었다. 이상하다. 다른 때는 아닌데,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숫자가 줄었다. 가즈키는 숫자가 0이 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눈앞의 그 숫자는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줄어드니까, 언젠가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그 숫자를 다 채우게 된다면 더는 어머니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계속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다. 어머니가 안 계시게 되는 상황이 올 거고,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가즈키는 결심했다.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더는 눈앞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기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안 먹어? 엄마가 얼마나 서운해 하시겠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한집에 살면서 서로 다른 상차림으로 밥을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번거롭기도 하지만, 그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가 없다. 가즈키는 아예 집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밖에서 사먹곤 했다. 그러다가 집을 떠나서 대학에 진학하고, 취직을 하고서도 집밥을 절대 먹지 않았다. 숫자는 328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다짐이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가즈키에게는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할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가까운 곳에서 맡아지는 엄마의 집밥 냄새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리웠다. 엄마의 집밥도, 엄마의 표정과 따뜻한 말도. 하지만 본가에 갈 수는 없었다. 갈 때마다 음식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간절함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은 의외의 결말로 후회와 눈물을 만든다. 설마 그런 상황이었을 줄이야. 왜 한 번도 그런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결말은 잔인했다. 가즈키에게 땅을 치고 후회할 상황을 만들어버린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왜 우리는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를 아프게 하는지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 것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영원하지 않은 시간을 조금 더 아껴두고 싶은 마음을 후회하게 하는 거다.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은 안 되니까’가 아니라, ‘형편이 곤란하니까’가 아니라. 오직 지금만이 가능한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다. 자꾸만 미루다가는, 조금 더 있다가 할 거라는 핑계가 더는 통하지 않은 거였다. 가슴이 알싸했다. 식상하지만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새기게 한다. 가즈키의 선택의 결과는 후회였지만, 후회 그 후의 일상은 다시 소중함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엄마, 집으로 갈 테니까…… 뭐라도 좀 만들어줘.”

“뭐라도, 라니……. 언제?”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뭐, 뭘 먹고 싶은데?”

“뭐든지 좋아.”

“…… 그래서, 뭘 먹고 싶니, 가즈키?”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328번 남았습니다 - 42~43페이지)

 

이상한 카운트다운을 마주하게 된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비슷한 선택으로 비슷한 상황을 만든다.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벅차서 일상의 소중함 따위는 잊고 지낸 지 오래일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일에 있을 그 끝을 상상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푸근한 냄새를 풍기는 엄마의 집밥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뭉클했다. 만약 우리 인생에서 무언가가 남은 횟수가 보인다면, 그게 엄마에 관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너무 잘 알고 있는 답마저 당황해서 제대로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런 감정적인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듯 보다 현실적인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게 케스터 슐렌츠의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이다. 갑자기 쓰러진 엄마 때문에 형제들의 일상은 변한다. 엄마를 모실 병원, 비용을 처리할 보험, 치료 후 돌봐드려야 하는 요양원 등을 거치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거기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엄마의 변덕과 괴팍한 성격은 덤으로 감당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엄마라는 걸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항상 우리를 돌봐주는 엄마였는데, 언제 엄마가 우리가 돌봐드려야 하는 대상이 된 거지? 그게 언제였든, 현실은 현실이다. 저자와 형제들에게는 엄마를 돌봐야 하는 현실만이 남아있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나를 돌봐주고 내 삶의 기둥이었던 엄마가, 이제는 내가 돌봐드려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경험하긴 했지만, 저자가 겪은 시간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이 글을 마주하니까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 순간이 생생해진다. 언젠가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이 힘들어지고, 병원에 드나들고 요양원에 머물러야 할 시간이 많아진다면, 나는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 역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을 마주하면서 당황한다.

 

 

케스터 슐렌츠가 엄마를 돌보며 작성한 이 책은 엄마를 떠올리면서 감성적이 되기 쉽고, 부모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 따라오는 일상이 변화를 현실적으로 제시한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기에 앞서 현실에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을 언급한다. 우리가 비켜갈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갑자기 닥친다면 더 당황하겠지만, 언젠가는 닥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던 거다. 혹시나 아프게 되면 병원에 모셔야 할 상황, 그때 간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퇴원 후 돌봄은 어느 시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후로도 계속되는 돌봄 상황에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잘 되어있다는 독일에서도 이런 경우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국가가 해주는 것보다 개인이 준비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거다. (물론 다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저자의 엄마는 잘 치료 받고 적당한 요양시설을 선택해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보고 있자니 적나라한 현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서 웃프더라. 이미 겪어본 일이라 그런지 저 마음이 쓰이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한국과 독일은 아주 다를 줄 알았다. 각자 독립된 생활을 일찍 시작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간섭보다는 독립된 인격의 관계로 유지되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년의 부모를 걱정하고 어느 부분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건 비슷했다.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형제들이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논한다. 각자 역할 분담을 하면서 같이 처리해야 할 문제인 거다. 저자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일이나 요양 시설을 알아보거나 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저자의 남동생은 경제 관련 처리와 계산하는 일을 담당했다.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저자의 누나는 엄마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이루려 노력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아프니 형제들이 모이거나 얘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 아버지 편찮으셔서 병원에 드나들고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면서 겪은 것과 너무 똑같았다. 우리도 그랬다. 문제가 터지니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고,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남동생이나 여동생과 통화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집안의 우환이 생기는 건 걱정이지만, 이런 일이 생기니 형제들 사이에 관계는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참나...

 

흔히 부모가 나이 들어간다는 서글픔을 언급하면,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말한다. ‘더 늦기 전에...’라는 이유로 감정적인 부분의 해결을 먼저 생각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른 의미로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준비하게 했다. 옮긴이의 말처럼, 노부모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다. 노부모를 돌보는 일은 때로 가혹하고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 노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24시간 곁에서 돌봐야 하고, 실제로는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러다가 요양병원을 찾게 되는데, 그렇다고 요양병원이 최고의 답은 아니다. 자식이 있는데 요양 시설에 모셔도 되는지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비용도 발생한다. 그래서 노부모를 돌본다는 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감정적인 것보다, 조금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늙고 거동이 힘들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현실적이고 금전적인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혼자 남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대책보다는 걱정만 앞선다.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닥친 엄마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겁부터 난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노부모에게 일어나는 문제와 그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부딪힘이 그대로 들려왔다.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해결 방법은 다를지 모르지만, 저자의 경험담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내가 이미 경험해서 그런지 공감된 부분이 많다.

 

아버지의 죽음, 엄마의 유방암, 엄마의 늙음. 이 모든 일을 계기로 나는 나의 늙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58세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이렇다 할 불만이 없다. 나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었지만 잘 이겨냈고, 26년째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건강하고 멋진 아들이 둘이나 있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직업도 만족스럽다. 뭘 더 바라겠는가. 글쎄, 나는 무엇을 더 바랄까?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모든 것이 지금처럼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 사진과 지금 거울 속 나를 비교해보면, 시간의 톱니 자국이 확연히 보인다. 주름진 거친 얼굴과 축 처진 눈 밑 지방이 정말 내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 - 203페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부모의 늙음을 외면하지 말고 조금 더 현실적인 상황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모의 늙음과 병듦은 점점 비극적인 상황으로 흘러가겠지만, 그렇다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 책을 통해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씩 시뮬레이션해 보고 언젠가 닥칠지 모를 순간을 준비할 수 있기를,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해결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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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5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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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입양된 나나는 극작가이자 배우이다. 프랑스에서는 ‘나나’로 불리며 양부모에게 불편함 없이 자랐다. 어느 날 나나에게 이메일 한통이 배달된다. 예전에 나나가 한국 신문에 응했던 인터뷰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젊은 감독 서영의 의뢰였다. 나나는 선뜻 서영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으나, 곧 자기가 헤어진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 곧 엄마가 될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 한 가지, 그녀의 생모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거다. 생모를 만나거나 생모의 실체를 알게 되거나.

 

한국에서 살던 시절 나나에게는 ‘문주’라는 이름이 있었다. 철로에서 기관사가 발견하고 그의 집에서 1년 정도 문주를 돌봐주면서 불렀던 이름. 문주는 서영에게 묻는다. 문주의 뜻이 무엇이냐고. 이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물으며 그 뜻을 읊조리는 문주의 행동이다. 어쩌면 문장에서 그대로 문주의 표정이 그려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주는 누군가의 이름에서 그 사람의 역사를, 의미를 찾는다. 이름의 뜻으로 그 사람의 시간과 이미지 같은 것을 그린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기 이름의 뜻을 먼저 말하면서 문주와의 소통을 이룬다. 어쩌면 문주에게도 분명히 사랑받았던 의미의 시간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체류 동안 문주가 찾아다니던 것들, 그 흔적들의 발자취를 영상에 담으면서 서영의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그 분량을 채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 한 분, 서영의 거처를 내준 문주가 아래층 ‘복희식당’의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된 묘한 기류. 복희식당의 할머니는 문주가 입양아인 것을 알아챈다. 왜 식당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냉담한 할머니가 문주를 대하는 태도는 의외였다. 따뜻한 밥을 내어주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흑인 혼혈 여자아이. 그 아이가 할머니와 어떤 사연을 나누었는지 모르지만, 흔한 인연은 아니었으리라. 소녀를 마냥 그리워하는 할머니, 소녀가 갔다던 벨기에는 어떤 곳이냐며 묻기도 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그리움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를 보는 문주는 원망의 대상이 한 명 더 는 것만 같다. 기찻길에서 발견된 문주는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엄마를 원망했다. 복희식당의 할머니도 버린 아이를 두고 하는 말로 생각하고 마치 자기 엄마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를 버린 사람이 여기 또 한 명 있네?’

 

내가 원한 보상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인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하는 것, 왜 버렸고 왜 다시 찾지 않았느냐고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물어보는 것……. 혹시라도 생모나 기관사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망상이었다.

생모나 기관사를 찾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거나 미비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한 대가였다. 그들과의 만남이 결국 손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나는 더더욱 외로움에 매몰됐다. 외로움의 끝은 무력감이었다. (27페이지)

 

입양된 아이 문주와 입양 보낸 아이를 생각하는 복희식당 할머니.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서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슨 추리소설처럼 과거로 거슬러 간다. 문주는 발견된 그 시점을 찾아가면서 그 시간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복희식당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하나 다른 사연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문주가 자기 근원을 찾아가듯, 복희식당 할머니가 만나고 싶은 이를 그리워하듯 그렇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누군가의 진심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문주는 배속의 아이 우주에게 점점 더 의미를 부여한다. 우주라는 이름부터 삶이라는 완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대신 보여주는 흐름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 문주가 프랑스로 입양된 해가 1986년이다. 1980년대는 한국의 해외 입양이 세계 1위였던 때라고 한다. 특히나 미혼모의 아이가 다수를 차지했고, 혼혈아들이 많았다고도 한다. 소설의 복희식당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아이는 입양아가 맞다. 복희식당 할머니 추연희가 직접 해외로 입양 보낸 아이다. 그 아이가 추연희의 아이는 아니다. 불임으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기지촌의 간호사로 일하던 추연희가 기지촌에서 일하던 백복순과 이룬 대안 가정에 속했던 아이였다. 80년대의 기지촌과 미혼모와 혼혈아. 그리고 입양아.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었다.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성이 임신하고, 그렇게 태어난 혼혈 아이는 아이들의 세상에 속할 수도 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온전한 가정이 아닌 미혼모라는 이름의 엄마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해외 입양.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으며 사는 것보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해외가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차별의 정도나 모양새만 다를 뿐이지, 온전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하는 시간은 그곳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흐름은 입양아와 입양 보낸 사람을 모으고 있다. 한때 해외입양 1위로 불명예를 날리고 있던 시절의 주인공들이, 전혀 다른 부모의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모여서 한때 대안 가족을 만들었던 추연희의 시간을 되돌려준 것 같다. 죽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추연희라는 이름을 한번 되찾은 복희식당 할머니를 문주가 보내주면서 정리하고, 곧 태어날 문주의 아이 우주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의 동그라미가 되어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 소모해 버린 몸을 버리고 이제 곧 무형의 암흑에 도착하게 될 연희는 씨앗이나 연기처럼, 혹은 한 줌의 물질이거나 에너지가 되어 영원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수십억 년의 진화를 거슬러서, 이 세상에 오기 전 하나의 세포로도 존재하기 이전에 그녀가 그러했듯이. 고생했어요. 나는 말했다. (235페이지)

 

자기 이름의 역사를 찾아가는 일. 누구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가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살아있기에 누구의 보살핌이라도 닿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누군가를 원망하며 자랐을지도 모를 그 시간을 조금은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생각하게 한다. 문주의 기억 속 철로는 문주가 버려진 곳이 아니라 그저 발견된 곳이었을 수도 있는 그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 비로소 달라질 삶의 의미들 말이다. 추연희는 떠나면서 자기 이름을 한 사람에게 기억하게 했고,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은 자기 이름의 의미를 새기면서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의도와 손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이 소설 때문에 가끔은 잊고 지내던 따뜻한 타인의 손길을 한 번쯤은 기억하게 된다. 미처 몰랐던 어느 진심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를 만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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