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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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입양된 나나는 극작가이자 배우이다. 프랑스에서는 ‘나나’로 불리며 양부모에게 불편함 없이 자랐다. 어느 날 나나에게 이메일 한통이 배달된다. 예전에 나나가 한국 신문에 응했던 인터뷰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젊은 감독 서영의 의뢰였다. 나나는 선뜻 서영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으나, 곧 자기가 헤어진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 곧 엄마가 될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 한 가지, 그녀의 생모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거다. 생모를 만나거나 생모의 실체를 알게 되거나.

 

한국에서 살던 시절 나나에게는 ‘문주’라는 이름이 있었다. 철로에서 기관사가 발견하고 그의 집에서 1년 정도 문주를 돌봐주면서 불렀던 이름. 문주는 서영에게 묻는다. 문주의 뜻이 무엇이냐고. 이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물으며 그 뜻을 읊조리는 문주의 행동이다. 어쩌면 문장에서 그대로 문주의 표정이 그려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주는 누군가의 이름에서 그 사람의 역사를, 의미를 찾는다. 이름의 뜻으로 그 사람의 시간과 이미지 같은 것을 그린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기 이름의 뜻을 먼저 말하면서 문주와의 소통을 이룬다. 어쩌면 문주에게도 분명히 사랑받았던 의미의 시간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체류 동안 문주가 찾아다니던 것들, 그 흔적들의 발자취를 영상에 담으면서 서영의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그 분량을 채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 한 분, 서영의 거처를 내준 문주가 아래층 ‘복희식당’의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된 묘한 기류. 복희식당의 할머니는 문주가 입양아인 것을 알아챈다. 왜 식당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냉담한 할머니가 문주를 대하는 태도는 의외였다. 따뜻한 밥을 내어주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흑인 혼혈 여자아이. 그 아이가 할머니와 어떤 사연을 나누었는지 모르지만, 흔한 인연은 아니었으리라. 소녀를 마냥 그리워하는 할머니, 소녀가 갔다던 벨기에는 어떤 곳이냐며 묻기도 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그리움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를 보는 문주는 원망의 대상이 한 명 더 는 것만 같다. 기찻길에서 발견된 문주는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엄마를 원망했다. 복희식당의 할머니도 버린 아이를 두고 하는 말로 생각하고 마치 자기 엄마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를 버린 사람이 여기 또 한 명 있네?’

 

내가 원한 보상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인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하는 것, 왜 버렸고 왜 다시 찾지 않았느냐고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물어보는 것……. 혹시라도 생모나 기관사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망상이었다.

생모나 기관사를 찾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거나 미비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한 대가였다. 그들과의 만남이 결국 손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나는 더더욱 외로움에 매몰됐다. 외로움의 끝은 무력감이었다. (27페이지)

 

입양된 아이 문주와 입양 보낸 아이를 생각하는 복희식당 할머니.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서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슨 추리소설처럼 과거로 거슬러 간다. 문주는 발견된 그 시점을 찾아가면서 그 시간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복희식당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하나 다른 사연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문주가 자기 근원을 찾아가듯, 복희식당 할머니가 만나고 싶은 이를 그리워하듯 그렇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누군가의 진심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문주는 배속의 아이 우주에게 점점 더 의미를 부여한다. 우주라는 이름부터 삶이라는 완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대신 보여주는 흐름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 문주가 프랑스로 입양된 해가 1986년이다. 1980년대는 한국의 해외 입양이 세계 1위였던 때라고 한다. 특히나 미혼모의 아이가 다수를 차지했고, 혼혈아들이 많았다고도 한다. 소설의 복희식당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아이는 입양아가 맞다. 복희식당 할머니 추연희가 직접 해외로 입양 보낸 아이다. 그 아이가 추연희의 아이는 아니다. 불임으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기지촌의 간호사로 일하던 추연희가 기지촌에서 일하던 백복순과 이룬 대안 가정에 속했던 아이였다. 80년대의 기지촌과 미혼모와 혼혈아. 그리고 입양아.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었다.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성이 임신하고, 그렇게 태어난 혼혈 아이는 아이들의 세상에 속할 수도 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온전한 가정이 아닌 미혼모라는 이름의 엄마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해외 입양.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으며 사는 것보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해외가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차별의 정도나 모양새만 다를 뿐이지, 온전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하는 시간은 그곳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흐름은 입양아와 입양 보낸 사람을 모으고 있다. 한때 해외입양 1위로 불명예를 날리고 있던 시절의 주인공들이, 전혀 다른 부모의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모여서 한때 대안 가족을 만들었던 추연희의 시간을 되돌려준 것 같다. 죽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추연희라는 이름을 한번 되찾은 복희식당 할머니를 문주가 보내주면서 정리하고, 곧 태어날 문주의 아이 우주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의 동그라미가 되어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 소모해 버린 몸을 버리고 이제 곧 무형의 암흑에 도착하게 될 연희는 씨앗이나 연기처럼, 혹은 한 줌의 물질이거나 에너지가 되어 영원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수십억 년의 진화를 거슬러서, 이 세상에 오기 전 하나의 세포로도 존재하기 이전에 그녀가 그러했듯이. 고생했어요. 나는 말했다. (235페이지)

 

자기 이름의 역사를 찾아가는 일. 누구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가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살아있기에 누구의 보살핌이라도 닿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누군가를 원망하며 자랐을지도 모를 그 시간을 조금은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생각하게 한다. 문주의 기억 속 철로는 문주가 버려진 곳이 아니라 그저 발견된 곳이었을 수도 있는 그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 비로소 달라질 삶의 의미들 말이다. 추연희는 떠나면서 자기 이름을 한 사람에게 기억하게 했고,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은 자기 이름의 의미를 새기면서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의도와 손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이 소설 때문에 가끔은 잊고 지내던 따뜻한 타인의 손길을 한 번쯤은 기억하게 된다. 미처 몰랐던 어느 진심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를 만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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