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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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속 어느 장면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던가? 주인공이 심란한 마음에 펼쳐 들었던 책의 한 구절,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걷던 길, 술 한 잔과 함께 들려오던 음악. 어쩌면 이런 장면에 빠져들어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하나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비단 문학 작품만은 아닐 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책이나 음악, 장소는 주인공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니까. 저자는 문학 작품을 번역하면서 마주했던 여러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만나온 문학 속 주인공과 음식을 떠올린다. 그때 그 음식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인간의 성장과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지 묻는 듯하다. 마치 소설 속에서 마주친 장소, 음악, 책 같은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그 순간에 느끼는 모든 것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10월 17일. 키다리 아저씨에게.

체육관 수영장을 레몬 젤리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헤엄을 치려 한다면, 몸이 과연 뜰까요? 가라앉을까요?

친구들과 디저트로 레몬 젤리를 먹다가 그런 의문에 빠졌어요. 삼십 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도 여태 결론이 안 나네요. 샐리는 헤엄을 칠 수 있을 거라지만, 저는 세계 최고의 수영 선수라도 틀림없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해요. 레몬 젤리에 빠져 죽는다면 우습겠죠?

-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레몬 젤리는 주디의 상상력을 키우는 음식이 아니었을까?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쓰는 편지는 그녀가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글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편지 안에 가득한 주디의 일상과 모험, 상상력 같은 이야기는 다시 봐도 생생하다. 주디의 머릿속에 떠오른 레몬 젤리가 가득한 수영장은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생각만 해도 피부에 닿으면 끈적거릴 것 같지만, 그곳에서 수영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싶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면서도 소설이니까 가능한 상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일은 소설 속 주디가 우리를 대신해서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냥 아이였던 시절을 떠올리듯, 어쩌면 잠시 이 장면을 상상하며 마음 놓고 느긋하게 있어도 좋은 시간 말이다. 팍팍한 현실에 지치고 피곤한 몸을 달달함 가득한 수영장에 넣어놓고, 누가 뭐라 해도 좋으니 상관 말고 즐기고 싶다는 깜찍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 같은 낭만?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면서 독자인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읽은 문학 작품의 세계이다. 그 안에서 맛본 음식의 의미, 사연, 문장이 담은 문학의 섬세함을 읽게 한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가 어떤 차이인지, 얼마나 같은지 다 알 수는 없으나, 단어에서 다르게 다가오는 그 분위기를 읽고 즐기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상상의 세계를 누리는 것도 독자에게 주어진 즐거움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게 의역과 직역의 장단점이었다. 전체적인 흐름에 어울리고 매끄럽게 읽히는 게 좋은 것인지, 있는 그대로의 원래 뜻을 담는 게 좋은 것인지. 나도 원서를 읽을 수준이 안 되니 매번 번역본을 기다리는 독자이기에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상황 파악 잘되고 흐름이 매끄러우면 좋은 것 같으면서도, 더욱 정확한 의미와 있는 그대로 전달되기는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도 이럴진대, 원서를 마주하고 번역해야 하는 사람은 이런 고민이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 그래서 번역 일에 대해 고단하면서도 황홀하다고 표현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면서도, 어떤 번역이 작가와 독자에게 가장 좋은 일일까 하는 고민은 계속될 듯하다. 그러면서 독자로 성장한 자기 기억의 순간을 같이 풀어놓으면서 독자로 살아갈 우리들과 공감한다.

 

 

혹시, 고전 명작에서 처음 접했던 낯선 풍경들을 기억하는가? 주인공이 입은 옷이나 시대를 설명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음식이었을 거다. 저자에게 그런 낯선 풍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건 상상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검색 하나로 모르는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스마트하지 못한 옛날을 생각하면 글자 그대로 상상에 의존하여 문학 작품 속 세상을 이해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 저자가 번역가가 되고 얼마나 황홀했을까 싶다. 막연하게 상상하며 소화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하나 직접 확인하면서 이해하는 순간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어색하고 투박했던, 과거 저자가 접했던 작품들의 번역이 우리말로 옮길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였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이상하다고 여기며 읽었던 문장들의 탄생을 비로소 이해한다. 거기에 중심을 둔 게 음식이다. 각종 빵과 수프, 요리들.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이 뭔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제대로 알지 못해서 다 맛보지 못한 아쉬움을 저자의 설명으로 달래게 한다. 링곤베리를 귤로 상상했다는 저자의 기억이 귀엽다. 그때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겠지.

 

검고 딱딱한 빵 대신에 할머니에게 하얗고 말랑한 빵을 주고 싶었다는 하이디. 커다란 빵에 건포도가 박혀 있어서 먹음직스러웠던 소공녀 세라의 시선. 거위 구이가 차려진 식탁에 비교되어 갇힌 히스클리프가 더 생생해지는 워더링 하이츠.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가 하나의 음식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건 또 뭔가. (여담이지만, 땅콩버터와 잼을 같이 바른 샌드위치는 정말이지, 너무 맛있고 달달하다. 칼로리가 엄청 높은 음식을 먹었다는 죄책감도 동반한다) 더 많은 작품 속 음식 이야기가 있지만, 계속 들으면서도 선뜻 그 음식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칼칼하고 개운한 뒷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마치 피자를 맛있게 먹어놓고 마지막에 김치 한 가닥 먹어줘야 하는 순간도 있는 것처럼. ^^

 

저자가 소개해준 이 많은 작품을 다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유명한 작품들, 고전이라 불리며 마치 필독서인 것처럼 여겨지는, 언젠가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어서 목록에 넣어둔 작품들의 제목을 다시 마주하고 있자니 반성 아닌 반성 모드가 된다. 무엇보다 저자가 건드려준 작품 속 음식들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모르고 읽었다면 그냥 식탁 위에 차려지고 지나가는 음식 하나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순간에는 주인공의 인생을 좌우하는 음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음식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빵 하나에도 삶이 담긴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자는 이 책으로 번역을 지적하고 오역을 바로잡는 게 아니었다. 번역으로 태어난 글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그동안 만났던 작품에서 발견한 오해의 순간들을 아름다운 되새김으로 저장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는 새로운 마음으로 그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게 한다.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고, 그 음식이 그렇게 번역되었나 하는 궁금증, 그러면서 원작에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마음을 심는다.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한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소설 속 단어 하나로 우리는 또 한 번 상상의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작품을 보는 다른 시선을 갖기도 한다. 섬세한 번역으로 우리가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건 맞겠지만, 어쩔 수 없이 고민에 고민을 더한 단어의 선택으로 우리는 원작의 다양한 해석을 맛보는 즐거움을 저자의 추억 같은 명작 이야기로 듣는다. 때로는 지나가는 행인1처럼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의 세상을 꿈꾸고 다른 삶을 만나는 귀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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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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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든, 비슷한 기준이 있는 듯하다. 독후감이나 리뷰 같은 후기를 쓸 때도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전달되는 글이 좋다고 하는데,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단편 중에 나오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어느 교수가 자기 소설을 읽어봐 달라고 하는 학생에게 요구한 것은, 자기가 쓴 글을 요약하라는 것이었다. 한 줄로 말해보라고 말이다. 하나의 소설이 한 줄로 요약이 될까? 읽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한 줄로 소설의 내용이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울 텐데, 독자가 읽기 위해 쓰인 글이 한 줄로 요약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를 가질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글이든, 그 글을 읽기 전에 마주할 혹은 그 글을 읽고 난 후에 남길 한 줄은 필요한 것 같다. 간단하지만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그렇게 듣고 좀 더 관심 있다면 읽어보게 되는 게 독자의 선택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주 짧은 단편들로 구성된 이 책은 조금 깊이 들어가면 소설의 구성을 설명하고자 배치한 단편들이기도 하다. 소설의 구성 요소인 발단, 전개, 절정(위기), 결말로 챕터를 나눈다. 짧은 소설 한 편에 소설의 모든 구성 요소가 그대로 담겨 있기도 했지만, 그 구성 요소의 특정 부분이 강조된 이야기로 배치하여 소설 작법을 설명한다. 소설의 발단 단계에서는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을 적어놓았다.

아내가 말했다.

“강물 속에 커다란 문이 있어.” (21페이지, 강물 속에 커다란 문이 있다는 말)

딱 봐도 소설의 시작이라는 게 눈에 보인다. 강물 속에 커다란 문이 있다는 화두를 던져놓고 그 후에 펼쳐질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아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뒤에 이어져야 하겠지. 아니면, 강물 속 커다란 문의 궤적을 찾아가는 흐름이라거나. 흥미진진한 단서를 툭 던져놓으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고, 전개와 절정을 지나 결말을 향해 간다.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콩트나 엽편소설(葉篇小說)로도 불림)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소설 25편으로 작가의 소설론을 표현한다. 마냥 긴 설명이라면 자칫 지루해서 읽다가 덮겠지만, 작가가 앞서 했던 구성의 설명을 생각하면 이야기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같이 보게 되는 게 신기해서 계속 읽힌다. 그러니까 이야기와 소설의 구성이 동시에 들려오는 기분이나 형식. 독특한 구성인 만큼 소설을 쓰고 싶은 이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는 책이 아닐까 싶다.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은근히 소설을 나눠 읽는 느낌이 드는 건, 또 하나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부분을 설명하려고 배치한 소설들에서 이야기의 전과 후의 내용을 상상하게 하니까 말이다. 앞에서 던져놓은 작은 단서로, 뒷부분 읽다 보니 발견하는 전말 같은 거. ‘아하’ 하는 순간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소설 읽는 재미 아니겠나.

 

소설 작법서인 것 같으면서도, 독자가 즐길 수 있는 단편소설집이기도 하다. 작가는 여러 의미로 이 책을 구성했는지 모르겠지만, 독자인 내 시선으로 따라가는 건 이야기의 바탕에 깔린 소설 작법보다는 소설 그 자체로 즐기는 맛이 더 컸다. 단편 하나하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애써 그 의미를 표현하지 않아도 좋다. 단편을 읽는 재미는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자기만의 공감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면서 은근히 강조하는 소설 작법을 눈여겨봐도 좋겠다. 소설을 쓰려는 이가 아니더라도, 어떤 글이 읽는 이에게 편하고 즐겁게 다가오는지 아는 재미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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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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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부피가 한 사람에게 포개지는 날짜의 순환이라면, 그날 다들 어디 있었을까 하는 질문은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겪은 시간의 총합적 부피일 거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떤 부피를 쌓아간다고 생각하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이번 생이 조금은 덜 외롭다. (76페이지)

 

김일성이 죽었을 때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만약 작가가 나에게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상상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충주에 있었는데, 처음으로 며칠씩 집을 떠나있던 때여서 신기했다. 방학이었다. 언니가 살던 곳에 놀러 갔다가 그냥 며칠을 더 눌러 있었는데, 갑자기 TV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이 전해져 깜짝 놀랐다고. 언니는 출근했고, 혼자 있던 나는 무서웠다. 빨리 엄마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김일성이 죽었으니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엄마랑 이산가족이 될 수는 없으니 당장 짐을 꾸리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그런데 언니에게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고, 나는 종일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하게 지냈던 날이었다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어땠더라? 저녁에 퇴근한 언니를 붙잡고 집에 가자고 말했는데, 언니는 콧방귀 뀌면서 잠이나 자라고 했던가?

 

누군가를 알고 싶고 친해지고 싶을 때는 공감의 기운이 필요하다. 굳이 공감을 찾지 않아도 친해질 계기가 생기지만, 좀 더 빨리 친해져야 할 때 공감을 찾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김일성 사망한 날을 공감의 시간대로 찾는다. 누군가의 기억을 꺼내게 하는 거다. 그때, 그 시각.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공감대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는 그 장면이 그렇게 깊게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처음 그 소설을 만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작가가 보여준 문장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지금도 한 번씩 책장에서 꺼내 들춰볼 때가 있는데, 그때는 다 보지 못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하나씩 생겨나곤 한다. 아마 그때의 공진솔보다 나이를 더 먹어서일까. 아무리 와인잔을 들고 봐도 세상이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뭐가 됐든, 우리에게는 시간이 만들어낸 기억이 있고, 기억 속 이야기는 어디서든 꺼내어질 수 있다는 거. 그 이야기를 언제 꺼낼 수 있을까 고민할 때마다 생각나는 건 '밤'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이 산문집을 독자에게 보내온 이유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밤이라는 시간을 열어줄 테니, 그동안 다 하지 못했던 말을 다 꺼내도 좋다고 말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기 좋은 시간,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시간.

 

그런가… 쓸쓸한가. 새삼 삶에서 찾아오는 쓸쓸함에 대해 돌아본다. 어차피 가까운 이들과 무관하게 인생은 쓸쓸함이 기본값 아닐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한 글자라도 더 쓰고 싶나 봐. 뭐라도 써놓아야 덜 쓸쓸하고 살아 있는 것 같고, 나중에 떠날 때 덜 억울할 것 같아서." (21페이지)

 

그렇게 꺼내놓은 말이 이 책으로 나온 것일 텐데, 작가의 말들은 간결하면서도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축약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것만 같다. 시쳇말로 간단하게 말했는데, 하고 싶은 긴 이야기를 다 알아들은 것 같은 느낌말이다. 작가의 습작 시절 이야기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교수가 내주었다는 과제, 책을 읽고 한 페이지 분량으로 줄이고, 다시 그 한 페이지를 절반 분량으로 줄이고, 다시 비교해서 줄이고... 처음 썼던 것과 같은 의미를 담으면서 문장을 줄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작가와 전혀 상관없는 삶인데도 알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간결하게 전하는 게 얼마나 시원하고 듣기 좋은지. 짧고 굵은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 아니면 이미 한 말을 줄여서 전달하는 일.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말을 길게 하면 듣기 싫고, 아무리 설명이 필요한 일이어도 그 설명이 길어지면 지루해지고 핑계로 들린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아무리 길어도 요점만 간단히, 의미는 놓치지 않게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문장은 깔끔해지고 하고 싶은 말은 그대로 전달되고. 꼭 작가가 아니어도, 소설 속 문장이 아니어도, 우리가 일상에서 배워야 할 삶의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읊조리듯 하는 말은 잔잔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됐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살아가는 방식 하나를 배우기도 한다. 누군가 수놓는 이야기를 하면서 보이던, 병풍을 만들기 위해 놓은 자수의 뒷면을 어쩌면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보게 된다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리라. 어떤 물건 어떤 사람의 보이지 않는 뒷면을 보는 일은 쉽지 않고, 영영 그 뒷면을 볼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살아가면서 그 뒷면을 보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 뒷면은 그 자체로 의미 없을 수도 있지만, 그 모습을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면 또 안쓰러울 테니까.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며 글 속에 녹아내는 이야기에는 미처 다 보지 못한 그 뒷면의 이야기도 있을 거다. 존재하고 있지만, 누구나 다 볼 수 없는 그 이야기들을 애써 들려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게 독자의 마음이 아닐까. 소설이 아닌 산문으로 만나는 작가의 말들은 소설에서 발견했던 막연한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놓으면서, 작가의 기억, 생각, 경험들이 모여 써 내려간 흔적들이라는 것을. 그 흔적들로 누군가의 기억을 또 파고들 것을 알기에 쓸쓸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 거겠지.

 

언젠가 남동생이 집에 다니러 온 적이 있다. 늦은 밤, 출출하다면서 식구들이 치맥을 외치자 남동생과 나는 배달이 아닌 직접 치킨을 사러 갔다. 그때 마침 행사를 한다고, 포장 고객에게는 3,000원씩 할인해준다는 말에 산책한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그래봤자 걸어서 5분 거리. 그냥 다녀오겠다고 나선 사람이 나였고, 어두우니까 같이 간다고 따라나선 사람이 남동생이었을 뿐인데, 대문을 나서니 어색해지더라. 생각해보니 남동생과 단둘이 그렇게 걸어본 적이 없다. 둘이서 어딜 갔던 기억도 없다. 그렇게 혼자 마음속으로만 어색함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들려온 남동생의 한마디.

"이 골목이 이렇게 좁았어? 어렸을 적에는 이 골목이 크고 넓어서 그렇게 무서웠는데..."

"니 덩치를 봐라. 이 골목이 좁을 수밖에 없겠다."

웃으면서 대꾸한다는 말이 고작 남동생 체격을 탓하는 거였는데, 이 책을 읽다가 생각해보니 우리 남매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 '밤'이기 때문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마 대낮에 그 길을 걸었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동네의 다른 풍경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하는 일 때문인지 원래 성격인지, 남동생은 냉정할 때가 많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아이인데, 뜬금없이 꺼낸 어릴 적 감정의 한 자락에 이상한 울림을 준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좋은 시절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말 지겨운 나날이고 사는 게 엉망진창이라고 투덜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때가 지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돌아보니 참 좋은 날들이었구나. 그땐 왜 몰랐을까 라고. 좋았던 시절은 그 무렵엔 느낄 수가 없지만, 한 시절에 이별을 고하려는 순간 새삼 좋은 날이었음을 알려주어 고맙고 서글프게 한다. (288페이지)

 

그동안 소설로 만나온 작가의 산문을 처음 마주하면서 느끼는 건, 어쩌면 이 책 속의 이야기는 출간된 소설의 연장선인 것만 같다는 거다. 출간작 중에서도 특히 자주 보이는 게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다. 문장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건 PD와 진솔의 연애가 너무 평범하면서도 애틋해서였는지, 언제나 기억에 머물러 있는 문장 몇 개가 저절로 떠오르곤 했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작가의 경험이 녹아든 생각들이 진솔의 대사로 거듭났고, 더 많이 하고 싶은 말은 작가의 또 다른 소설에서 문득 마주치게 된다. 한 권의 소설이 태어나기 위해 작가가 준비해왔던 시간은 이랬던가 싶기도 하고, 작가이자 독자로 살아가는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모든 게 어쩌면 밤에 태어난 싹들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하면서 슬쩍 웃어본다. 우리의 기억은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폭발하듯 뛰쳐나오기도 하니까.

 

작가가 기억하고 꺼내놓은 이야기에 온갖 감정이 묻어난다. 쓸쓸하기도 했던, 마냥 그 순간을 살아가던 청춘이기도 했던, 어느 동네의 풍경에 안착하기도 했던 시간. 그 기억들 속에 담긴 많은 이야기가 밤을 통과해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살아온 이야기가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작가의 작품을 생각한다. 그 상황에서는 이런 경험이 담겼던 거라고, 그 문장은 이런 생각으로 써진 거라고. 하고 싶은 말이 소설 속 인물들의 입을 통해 나왔다고 생각하면, 소설가라는 직업은 정말 괜찮은 것도 있구나 하는 부러움이 살짝 들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 수도 없고, 또 막상 그 말을 꺼내놓고 후회하기도 하는 게 현실 속 우리 모습이지 않은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만 내가 한 말이 되지 않으면서도, 기어이 할 수 있는 말이 된다는 게 얼마나 신나. 하지만 또 작가로 살아가는 고충을 알 것도 같아서 마냥 부러워하지는 않으련다. 독자로, 좋아하는 문장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저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기다리는 즐거움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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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 삶이 흔들릴 때마다 꼭 한 번 듣고 싶었던 말
박애희 지음 / 수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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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는 몇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만남을 조율해야 했고,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야 했다.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까지 생각해두었고, 따로따로 연락을 취하면서 상대방과 만나는 시간까지 확정해야 했다. 늦어도 4월 중순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던 일들을 마무리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3월 말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고, 갑자기 서울로 올라갔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일주일 계획하고 갔지만,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자 단단히 먹었던 마음은 절대 단단해지지 않았다. 날씨는 더웠고 가져갔던 옷들은 두꺼운 것들이라 캐리어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동생 옷을 입고 지냈다. 그까짓 옷쯤 누구 것을 입든 봄에 겨울옷을 입든 그게 뭐 큰일이겠나. 무엇보다 우리 앞에 닥친, 단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던 일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였다. 그저 빨리 무사히 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마음은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아직도 불안함에 걱정은 끝나지 않았지만 2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4월 중순까지 마무리하겠다고 3월에 계획했던 일은 하나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미뤄두었던 일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나간 건…… 잊읍시다. 앞으로가 중요하니까요." (216페이지)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다. 계획했던 몇 가지 일이 2, 한 달 미뤄진다고 해서 사람 목숨이 오가는 일은 아니니까. 그냥,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스러운 것뿐이지 다시 하나씩 해결해나가면 된다. 일상의 며칠이 그렇게 어긋났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면 지금 가장 큰 일인 것만 같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 침범해서 일상을 흩트리는 게 무섭기도 하다. 어느 정도 마음 내려놓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그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또 생각한다.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살다 보면 나를 흔들고 인생에 어긋나는 일들이 또 얼마나 많겠냐고. 그러니 이 순간을 잘 넘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말이다.

 

틈틈이 어긋나고 비틀리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감정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저자는 그렇게 내 맘처럼 흐르지 않는 삶에서도 나만의 이야기는 만들어지고 있다는 듯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저자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와 같은 흐름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지 않은가. 목 놓아 울어버리고 싶은 날, 우울한데 아무에게도 전화할 수 없는 막막함,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날 챙겨주지 않아서 서글펐던, 예고도 없이 직장에서 퇴사하게 되는 일, 친하다고 여기면서도 은근한 경쟁에 속내를 꺼내놓기 어려웠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일상의 단편들. 순간순간 막막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도 나도, 우리가 걸어온 모든 순간이. 그 마음 꺼내놓지 못해서 답답해하다가, 그래도 살아지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가.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를 가로막는 순간들에 좌절만 하다가 끝날 것 같은데, 어떻게 또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게 희한하다. 어딘가로 자꾸 걸어가게 한다.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게 어떤 일일 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일 때도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힘이 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순간이든 가장 기쁘고 가장 힘들 때 찾게 되는 게 가족일 테니까.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데도 넘어지지 않게 한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지나가면 우리의 인생 경험치가 하나 더 얹어지는 거겠지. 가끔 지나왔던 길을 돌아보며 어떻게 걸어왔나 놀라울 때가 있다. 그렇게 삶을 버텨왔든 묵묵히 걸어왔든, 우리 인생은 지금 여기에 있다. 어딘가를 헤매다가도 언제나 삶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다.

 

어릴 땐 이만큼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게 분명해질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마흔이 넘은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게 꼭 그렇지가 않더라고. (40페이지)

 

각자의 시간과 위치와 상황에 따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달라진다. 나이가 들면 무수한 만남과 이별에 조금은 담담해진다. 어떤 날은 어른스러운 척 중얼거렸다. 어차피 영원한 게 어디 있나. 다 혼자인 거지. (118페이지)

 

일상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매 순간을 시련이라고 여기면서도,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을 마주하면서도 생이 계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헤매면서 찾아내는 삶의 방향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남편이 금연하지 못한다고 불만이지만 밥벌이의 고단함을 견디는 방법으로 생각하니 그 어려운 금연을 함부로 강요할 수 없다. 누군가가 묻는 꿈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밥벌이를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에서 부모에게 '다음에'라는 시간이 생략될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한다. 언제나 '다음에'라면서 쉽게 미루게 되는 부모의 순서를 여기서 또 보게 되니, 습관처럼 그 자리에 머물 거로 여긴 부모의 존재가 새삼 다시 보인다. 언제나 '지금'이어야 하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어느 날 야구장을 찾았다가 글쓰기를 시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생 변화도 놀랍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난 인연에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시간의 흐름이 의미 있다는 걸 봤다. 상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일을 사과하는 걸 보면서 시간은 이렇게 성장하면서 흘러야 한다는 걸 증명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른이 되어가는 거니까, 어떤 어른으로 성장해 가느냐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저자가 들려준 에피소드에서 소소하고 크게 인간의 변화와 성장을 읽게 된다. 읽으면서 순간순간 궁금해지곤 했다. 나는 얼마나 흔들리지 않고 중심 잡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후회하는 일에 사과할 용기는 있는 인간인지를.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정말 우리 인생은 언제나 어디로 갈지 분명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마주친 시선에, 갑자기 넘어진 땅바닥에서 보였던, 누군가가 건넨 한 마디로 바뀔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무심코 찾아온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유한한 우리 삶을 채우는 단편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막상 닥친 그 순간에는 왜 그렇게 막연하고 힘들기만 했던 건지...

 

인생은 너무나 자주 내가 기대한 엔딩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이가, 나보다 더 운이 좋은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현실. 어느 순간, 남들이 함부로 버린 팝콘과 쓰레기들로 엉망이 된 내 자리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꾸었던 꿈들 중 몇 가지나 이룰 수 있을까. 아니, 인생이라는 무대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한 걸까. (150페이지)

 

삶에 적응해야만 하는 우리가 무엇을 애써야 하고 어떻게 오늘을 지켜가야 하는지 듣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봄날에 어울리는 표지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듯 읽어질 거로 생각했던 책이었는데, 의외로 무게감이 있어서 놀라기도 했다. 서울에 갈 때 책 두 권을 가지고 갔는데, 그 중 한 권이다. 밤에 몇 페이지씩 읽으면서, 때로는 투박하게 느껴지는 일상을 그리면서 공감했다. 우리 인생에 수시로 끼어들어 일상을 어긋나게 하는 일들이 그나마 견딜 것 같더라. 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단편들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누군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대로 가슴에 꽂히면서 건네져오는 느낌, 참 오랜만인 듯하다. 각박하게 버티던 일상이 조금은 부드러워질 것도 같고, 세상과 싸우며 나를 단단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조금 알 것 같다. 여전히 우리의 하루는 불안할 수 있고 매 순간에 적응하느라 힘들겠지만, 삶의 곳곳에 숨어있던 다정함이 뛰쳐나와 오늘을 다독여 줄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다.

 

 

아이로 태어나 노인으로 늙어가는 인생.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소멸해가고 있다. 순간이 계속될 것처럼 살다가,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생의 숙명을 불현듯 떠올릴 때면 내게 숙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가. (328페이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만의 길이 찾아지기도 한다. 저자가 영화나 책, 드라마나 다른 TV 프로그램에서 마주한, 주인공들의 삶에 비춰 들려준 이야기에는 우리와 닮은 걸음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 저자의 이야기, 그리고 더해질 우리의 이야기. 순간순간 어긋나는 인생에 계속 묻고 생각하다 보면 답은 찾아지겠지. 그렇게 우리 삶의 의미가 하나씩 쌓여갈 때마다 뭔가를 배우는 것 같지 않을까. 후회나 실수가 가르쳐줄 것들, 아픔과 상처가 새겨주는 것들이 훗날 내 이야기가 되어 꺼내질 날을 상상한다. 오늘의 이 순간도 언젠가는 나의 이야기가 되겠지. 지금 이 책을 만나고 있는 게, 시기를 놓친 꽃구경 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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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다. 험한 말을 막 쏟아내고, 앞뒤 가리지 않고 지금의 것만 보면서 순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들 말이다. 작정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어느 순간 내 안에 머무는 성격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이 성격이 어떤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에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시행착오의 순간이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내려놓음, 차분한 마음을 갖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니, 갖고 싶은 게 아니라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이 순간을 내면의 고요라고 말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단어로 우리는 스틸니스라고 부른다.

 

살면서 굳이 이 스틸니스가 필요한 건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소개해주는 여러 인물 사이에서 공통된 것이 바로 스틸니스였다. 타이거 우즈나 나폴레옹, 윈스턴 처칠이, 안네 프랑크, 케네디 대통령 등 유명인에게 내재한 내면의 고요가 그들의 성공과 성장을 이끌었다.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경지의 인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하고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신을 만든 것이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였던 케네디 대통령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던 나폴레옹 같은 이들에게는 냉정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판단하면서 흥분하는 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이야기들에, 우리 삶에서 스틸니스의 영역이 얼마나 광대하게 작용하는지 알 것 같다.

 

나폴레옹이 받은 편지를 바로 뜯어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데, 그에게 오는 편지를 나중에 뜯어보라고 지시하고, 나중에 그 편지를 뜯어볼 때쯤이면 편지 속에 적힌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된 후라고 한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는 일들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까운 시간을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들이 어떤 양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니 해결되는 것들. 안다. 당장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지만, 결국은 해결된 문제들이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못하면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면서 조급해하는 게 또 우리의 성격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조급하게 발을 동동 굴러봤자, 해결될 것은 해결되고 해결되지 않을 것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하느냐에 그 순간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음의 고요가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시때때로 선택의 순간에 서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현명하고 냉정한 판단으로 좋은 결과를 도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니었나 싶다.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결정해봤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날 수는 없다는 것.

 

요즘의 나에게 때맞춰 잘 와주었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갑작스러운 일로 서울에서 몇 주를 보내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보니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오지도 못했고,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해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했다. 일상이 불편했고, 무엇보다 해결되지 않은 현재 상황이 불안만 증폭시켰다. 어떻게 하면 될까 계속 걱정하면서도, 막상 명확한 답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또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살면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어쩔 수 없지’였는데,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거였다. 어쩔 수 없지. 저자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보면서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냉정한 시선과 판단보다는 감정의 시선으로 결과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고요한 내면을 마주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리가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또 순간순간 감정이 앞서는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고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또 한 번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현명한 판단이 무엇인지 다시 배울 것만 같다.

 

저자는 앞서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들려주면서, 그들이 내재한 고요의 모습을 보게 했다. 집중력과 창조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주변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파고드는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말한다. 그 힘을 스틸니스라고 부르며, 그들은 내면의 고요 힘으로 인생을 이끌어나간다.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의 성장을 이끄는 좋은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안에 스틸니스를 장착하는 게 쉬워 보이는데, 사실 처음부터 내면의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이 방법을 배우는 게 문제의 해답이 되면서, 우리가 잘 성장하고 좋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열쇠가 되는 거겠지. 이 책에서 처음 들은 이름인 야구선수 숀 그린은 슬럼프를 겪으면서도 조급함보다는 불교의 사상에 기댔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지면 시선이 좁아지기 마련인데, 그는 머릿속을 비우면서 내면의 고요를 찾았던 거다. 빌 게이츠가 혼자 숲에 들어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윈스턴 처칠이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것, 나폴레옹이 편지를 바로 읽지 않으면서 중요한 일을 고를 수 있었던 것 등을 보면 무슨 상황에서건 우선순위를 제대로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집중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가장 잘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고만고만해 보이는 여러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 문제들은 저마다 자기가 중요하고 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경쟁하는 목소리와 신념에 이끌린 채 너무 많은 방향으로 끌려간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적이 깔려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선하고 악한 충동 사이에서, 야망과 원칙 사이에서, 우리가 되고 싶은 존재와 실제로 그 존재가 되기까지 겪어야 할 어려움 사이에서 격렬한 내전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투에서 이러한 전쟁에서 고요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는 강이자 철로의 교차점이다. 고요는, 열쇠다.

그러니까 고요는, 거의 모든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더 나은 부모, 더 나은 예술가, 더 나은 투자자, 더 나은 운동선수, 더 나은 과학자,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인생에서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인 것이다. (스틸니스, 23~24페이지)

 

우리 안의 스틸니스가 발휘하는 때는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직면했을 때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내면의 고요를 잘 찾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와 선택의 순간을 현명하게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가 아직 다 찾지 못한 내 안의 가능성을 찾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 영혼, 몸의 영역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영혼이 분노나 욕망에서 멀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생각한 것을 몸으로 움직이며 실천하면서 우리 안의 고요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책이나 걷는 것, 충분한 휴식과 수면은 우리 몸을 진정시키고 편하게 만든다. 그때 생기는 고요가 또 한 번 우리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누구나 바란다. 내 인생이 더 완전해지기를, 누구보다 만족한 삶이었기를. 언젠가 죽음을 마주할 우리지만, 지금 마주해야 할 현재의 우리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잘 채우고 싶어진다.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가는 것인지 묻고 싶을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건너가는 방법이 듣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았고, 특히 지금처럼 힘들다고 여기는 때 내 안의 고요를 찾는 것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조급해할 게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서 지금의 상황을 마주하는 시선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다. 거리를 두니 보이는 것들, 시간을 두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고요를, 현명한 판단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인생이 흐르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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