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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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속 어느 장면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던가? 주인공이 심란한 마음에 펼쳐 들었던 책의 한 구절,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걷던 길, 술 한 잔과 함께 들려오던 음악. 어쩌면 이런 장면에 빠져들어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하나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비단 문학 작품만은 아닐 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책이나 음악, 장소는 주인공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니까. 저자는 문학 작품을 번역하면서 마주했던 여러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만나온 문학 속 주인공과 음식을 떠올린다. 그때 그 음식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인간의 성장과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지 묻는 듯하다. 마치 소설 속에서 마주친 장소, 음악, 책 같은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그 순간에 느끼는 모든 것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10월 17일. 키다리 아저씨에게.

체육관 수영장을 레몬 젤리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헤엄을 치려 한다면, 몸이 과연 뜰까요? 가라앉을까요?

친구들과 디저트로 레몬 젤리를 먹다가 그런 의문에 빠졌어요. 삼십 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도 여태 결론이 안 나네요. 샐리는 헤엄을 칠 수 있을 거라지만, 저는 세계 최고의 수영 선수라도 틀림없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해요. 레몬 젤리에 빠져 죽는다면 우습겠죠?

-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레몬 젤리는 주디의 상상력을 키우는 음식이 아니었을까?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쓰는 편지는 그녀가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글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편지 안에 가득한 주디의 일상과 모험, 상상력 같은 이야기는 다시 봐도 생생하다. 주디의 머릿속에 떠오른 레몬 젤리가 가득한 수영장은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생각만 해도 피부에 닿으면 끈적거릴 것 같지만, 그곳에서 수영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싶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면서도 소설이니까 가능한 상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일은 소설 속 주디가 우리를 대신해서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냥 아이였던 시절을 떠올리듯, 어쩌면 잠시 이 장면을 상상하며 마음 놓고 느긋하게 있어도 좋은 시간 말이다. 팍팍한 현실에 지치고 피곤한 몸을 달달함 가득한 수영장에 넣어놓고, 누가 뭐라 해도 좋으니 상관 말고 즐기고 싶다는 깜찍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 같은 낭만?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면서 독자인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읽은 문학 작품의 세계이다. 그 안에서 맛본 음식의 의미, 사연, 문장이 담은 문학의 섬세함을 읽게 한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가 어떤 차이인지, 얼마나 같은지 다 알 수는 없으나, 단어에서 다르게 다가오는 그 분위기를 읽고 즐기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상상의 세계를 누리는 것도 독자에게 주어진 즐거움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게 의역과 직역의 장단점이었다. 전체적인 흐름에 어울리고 매끄럽게 읽히는 게 좋은 것인지, 있는 그대로의 원래 뜻을 담는 게 좋은 것인지. 나도 원서를 읽을 수준이 안 되니 매번 번역본을 기다리는 독자이기에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상황 파악 잘되고 흐름이 매끄러우면 좋은 것 같으면서도, 더욱 정확한 의미와 있는 그대로 전달되기는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도 이럴진대, 원서를 마주하고 번역해야 하는 사람은 이런 고민이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 그래서 번역 일에 대해 고단하면서도 황홀하다고 표현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면서도, 어떤 번역이 작가와 독자에게 가장 좋은 일일까 하는 고민은 계속될 듯하다. 그러면서 독자로 성장한 자기 기억의 순간을 같이 풀어놓으면서 독자로 살아갈 우리들과 공감한다.

 

 

혹시, 고전 명작에서 처음 접했던 낯선 풍경들을 기억하는가? 주인공이 입은 옷이나 시대를 설명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음식이었을 거다. 저자에게 그런 낯선 풍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건 상상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검색 하나로 모르는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스마트하지 못한 옛날을 생각하면 글자 그대로 상상에 의존하여 문학 작품 속 세상을 이해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 저자가 번역가가 되고 얼마나 황홀했을까 싶다. 막연하게 상상하며 소화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하나 직접 확인하면서 이해하는 순간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어색하고 투박했던, 과거 저자가 접했던 작품들의 번역이 우리말로 옮길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였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이상하다고 여기며 읽었던 문장들의 탄생을 비로소 이해한다. 거기에 중심을 둔 게 음식이다. 각종 빵과 수프, 요리들.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이 뭔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제대로 알지 못해서 다 맛보지 못한 아쉬움을 저자의 설명으로 달래게 한다. 링곤베리를 귤로 상상했다는 저자의 기억이 귀엽다. 그때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겠지.

 

검고 딱딱한 빵 대신에 할머니에게 하얗고 말랑한 빵을 주고 싶었다는 하이디. 커다란 빵에 건포도가 박혀 있어서 먹음직스러웠던 소공녀 세라의 시선. 거위 구이가 차려진 식탁에 비교되어 갇힌 히스클리프가 더 생생해지는 워더링 하이츠.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가 하나의 음식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건 또 뭔가. (여담이지만, 땅콩버터와 잼을 같이 바른 샌드위치는 정말이지, 너무 맛있고 달달하다. 칼로리가 엄청 높은 음식을 먹었다는 죄책감도 동반한다) 더 많은 작품 속 음식 이야기가 있지만, 계속 들으면서도 선뜻 그 음식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칼칼하고 개운한 뒷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마치 피자를 맛있게 먹어놓고 마지막에 김치 한 가닥 먹어줘야 하는 순간도 있는 것처럼. ^^

 

저자가 소개해준 이 많은 작품을 다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유명한 작품들, 고전이라 불리며 마치 필독서인 것처럼 여겨지는, 언젠가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어서 목록에 넣어둔 작품들의 제목을 다시 마주하고 있자니 반성 아닌 반성 모드가 된다. 무엇보다 저자가 건드려준 작품 속 음식들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모르고 읽었다면 그냥 식탁 위에 차려지고 지나가는 음식 하나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순간에는 주인공의 인생을 좌우하는 음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음식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빵 하나에도 삶이 담긴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자는 이 책으로 번역을 지적하고 오역을 바로잡는 게 아니었다. 번역으로 태어난 글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그동안 만났던 작품에서 발견한 오해의 순간들을 아름다운 되새김으로 저장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는 새로운 마음으로 그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게 한다.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고, 그 음식이 그렇게 번역되었나 하는 궁금증, 그러면서 원작에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마음을 심는다.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한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소설 속 단어 하나로 우리는 또 한 번 상상의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작품을 보는 다른 시선을 갖기도 한다. 섬세한 번역으로 우리가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건 맞겠지만, 어쩔 수 없이 고민에 고민을 더한 단어의 선택으로 우리는 원작의 다양한 해석을 맛보는 즐거움을 저자의 추억 같은 명작 이야기로 듣는다. 때로는 지나가는 행인1처럼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의 세상을 꿈꾸고 다른 삶을 만나는 귀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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