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 삶이 흔들릴 때마다 꼭 한 번 듣고 싶었던 말
박애희 지음 / 수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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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는 몇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만남을 조율해야 했고,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야 했다.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까지 생각해두었고, 따로따로 연락을 취하면서 상대방과 만나는 시간까지 확정해야 했다. 늦어도 4월 중순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던 일들을 마무리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3월 말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고, 갑자기 서울로 올라갔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일주일 계획하고 갔지만,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자 단단히 먹었던 마음은 절대 단단해지지 않았다. 날씨는 더웠고 가져갔던 옷들은 두꺼운 것들이라 캐리어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동생 옷을 입고 지냈다. 그까짓 옷쯤 누구 것을 입든 봄에 겨울옷을 입든 그게 뭐 큰일이겠나. 무엇보다 우리 앞에 닥친, 단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던 일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였다. 그저 빨리 무사히 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마음은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아직도 불안함에 걱정은 끝나지 않았지만 2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4월 중순까지 마무리하겠다고 3월에 계획했던 일은 하나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미뤄두었던 일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나간 건…… 잊읍시다. 앞으로가 중요하니까요." (216페이지)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다. 계획했던 몇 가지 일이 2, 한 달 미뤄진다고 해서 사람 목숨이 오가는 일은 아니니까. 그냥,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스러운 것뿐이지 다시 하나씩 해결해나가면 된다. 일상의 며칠이 그렇게 어긋났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면 지금 가장 큰 일인 것만 같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 침범해서 일상을 흩트리는 게 무섭기도 하다. 어느 정도 마음 내려놓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그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또 생각한다.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살다 보면 나를 흔들고 인생에 어긋나는 일들이 또 얼마나 많겠냐고. 그러니 이 순간을 잘 넘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말이다.

 

틈틈이 어긋나고 비틀리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감정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저자는 그렇게 내 맘처럼 흐르지 않는 삶에서도 나만의 이야기는 만들어지고 있다는 듯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저자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와 같은 흐름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지 않은가. 목 놓아 울어버리고 싶은 날, 우울한데 아무에게도 전화할 수 없는 막막함,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날 챙겨주지 않아서 서글펐던, 예고도 없이 직장에서 퇴사하게 되는 일, 친하다고 여기면서도 은근한 경쟁에 속내를 꺼내놓기 어려웠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일상의 단편들. 순간순간 막막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도 나도, 우리가 걸어온 모든 순간이. 그 마음 꺼내놓지 못해서 답답해하다가, 그래도 살아지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가.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를 가로막는 순간들에 좌절만 하다가 끝날 것 같은데, 어떻게 또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게 희한하다. 어딘가로 자꾸 걸어가게 한다.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게 어떤 일일 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일 때도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힘이 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순간이든 가장 기쁘고 가장 힘들 때 찾게 되는 게 가족일 테니까.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데도 넘어지지 않게 한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지나가면 우리의 인생 경험치가 하나 더 얹어지는 거겠지. 가끔 지나왔던 길을 돌아보며 어떻게 걸어왔나 놀라울 때가 있다. 그렇게 삶을 버텨왔든 묵묵히 걸어왔든, 우리 인생은 지금 여기에 있다. 어딘가를 헤매다가도 언제나 삶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다.

 

어릴 땐 이만큼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게 분명해질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마흔이 넘은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게 꼭 그렇지가 않더라고. (40페이지)

 

각자의 시간과 위치와 상황에 따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달라진다. 나이가 들면 무수한 만남과 이별에 조금은 담담해진다. 어떤 날은 어른스러운 척 중얼거렸다. 어차피 영원한 게 어디 있나. 다 혼자인 거지. (118페이지)

 

일상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매 순간을 시련이라고 여기면서도,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을 마주하면서도 생이 계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헤매면서 찾아내는 삶의 방향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남편이 금연하지 못한다고 불만이지만 밥벌이의 고단함을 견디는 방법으로 생각하니 그 어려운 금연을 함부로 강요할 수 없다. 누군가가 묻는 꿈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밥벌이를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에서 부모에게 '다음에'라는 시간이 생략될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한다. 언제나 '다음에'라면서 쉽게 미루게 되는 부모의 순서를 여기서 또 보게 되니, 습관처럼 그 자리에 머물 거로 여긴 부모의 존재가 새삼 다시 보인다. 언제나 '지금'이어야 하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어느 날 야구장을 찾았다가 글쓰기를 시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생 변화도 놀랍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난 인연에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시간의 흐름이 의미 있다는 걸 봤다. 상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일을 사과하는 걸 보면서 시간은 이렇게 성장하면서 흘러야 한다는 걸 증명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른이 되어가는 거니까, 어떤 어른으로 성장해 가느냐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저자가 들려준 에피소드에서 소소하고 크게 인간의 변화와 성장을 읽게 된다. 읽으면서 순간순간 궁금해지곤 했다. 나는 얼마나 흔들리지 않고 중심 잡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후회하는 일에 사과할 용기는 있는 인간인지를.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정말 우리 인생은 언제나 어디로 갈지 분명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마주친 시선에, 갑자기 넘어진 땅바닥에서 보였던, 누군가가 건넨 한 마디로 바뀔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무심코 찾아온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유한한 우리 삶을 채우는 단편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막상 닥친 그 순간에는 왜 그렇게 막연하고 힘들기만 했던 건지...

 

인생은 너무나 자주 내가 기대한 엔딩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이가, 나보다 더 운이 좋은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현실. 어느 순간, 남들이 함부로 버린 팝콘과 쓰레기들로 엉망이 된 내 자리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꾸었던 꿈들 중 몇 가지나 이룰 수 있을까. 아니, 인생이라는 무대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한 걸까. (150페이지)

 

삶에 적응해야만 하는 우리가 무엇을 애써야 하고 어떻게 오늘을 지켜가야 하는지 듣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봄날에 어울리는 표지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듯 읽어질 거로 생각했던 책이었는데, 의외로 무게감이 있어서 놀라기도 했다. 서울에 갈 때 책 두 권을 가지고 갔는데, 그 중 한 권이다. 밤에 몇 페이지씩 읽으면서, 때로는 투박하게 느껴지는 일상을 그리면서 공감했다. 우리 인생에 수시로 끼어들어 일상을 어긋나게 하는 일들이 그나마 견딜 것 같더라. 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단편들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누군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대로 가슴에 꽂히면서 건네져오는 느낌, 참 오랜만인 듯하다. 각박하게 버티던 일상이 조금은 부드러워질 것도 같고, 세상과 싸우며 나를 단단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조금 알 것 같다. 여전히 우리의 하루는 불안할 수 있고 매 순간에 적응하느라 힘들겠지만, 삶의 곳곳에 숨어있던 다정함이 뛰쳐나와 오늘을 다독여 줄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다.

 

 

아이로 태어나 노인으로 늙어가는 인생.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소멸해가고 있다. 순간이 계속될 것처럼 살다가,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생의 숙명을 불현듯 떠올릴 때면 내게 숙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가. (328페이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만의 길이 찾아지기도 한다. 저자가 영화나 책, 드라마나 다른 TV 프로그램에서 마주한, 주인공들의 삶에 비춰 들려준 이야기에는 우리와 닮은 걸음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 저자의 이야기, 그리고 더해질 우리의 이야기. 순간순간 어긋나는 인생에 계속 묻고 생각하다 보면 답은 찾아지겠지. 그렇게 우리 삶의 의미가 하나씩 쌓여갈 때마다 뭔가를 배우는 것 같지 않을까. 후회나 실수가 가르쳐줄 것들, 아픔과 상처가 새겨주는 것들이 훗날 내 이야기가 되어 꺼내질 날을 상상한다. 오늘의 이 순간도 언젠가는 나의 이야기가 되겠지. 지금 이 책을 만나고 있는 게, 시기를 놓친 꽃구경 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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