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혜윤의 글을 읽는다.

더운 요즘의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또 한 문장씩 읽어가다 보면 날씨를 잊게 하기도 한다.

이까짓 더위쯤이야...

 

여전히 그녀는, 책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득 문득 찾아오는 어떤 생각의 공간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책 속 한 구절을 이어간다.

이런 문장, 이런 책, 이런 느낌 같은...

 

먼 곳 어디를 떠올리게도 하고,

어디선가 흘러오던 냄새에 킁킁거리게도 하는,

조금 더 늘어지고 조금 너 뒹굴고 싶은 일요일의 느즈막한 아침이,

편안한 문장들과 함께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가방 안에는 보통 200페이지 이하의 책을 넣고 다닌다. 집에서 읽다가 만 책 중에서도 얇으면 가지고 다니고 두꺼우면 그냥 집에서만 읽는다. 무거우니까. ㅠㅠ 그런데 이기호의 이 소설은 얇고 잘 읽히는데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까워서 일부러 가방에 넣고 다니지 않았는데도 너무 금방 읽혀서 속이 상했다. 아, 정말 몇 년 동안 계속 연재되었으면 지금부터라도 일부러 찾아 읽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재밌게 읽었는데도, 막상 이 소설이 어떤 느낌일지 설명하려니 고민이 생기더라. 뭐라고 딱 한마디로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또 한 마디만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아서 고민스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여동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동생이 둘째 아이(초2)에게 물었단다. "00이는 크면 엄마랑 결혼할 거야?" 유치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자랄 때 많이 들어왔던 말이지 않아? 아들 가진 엄마는 아들에게 그렇게 묻고, 딸 가진 아빠는 딸에게 그렇게 묻고.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이상형이 정해지는 것처럼 여겼다. 아들에게는 엄마가 이상형, 딸에게는 아빠가 이상형. 그러다가 자식이 크고 결혼 상대자를 인사시키려 데려오면, "너는 아빠(엄마)랑 결혼하겠다며?!" 하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고. 이런 경우 아빠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더 크다던데, 뭐, 정확히는 알 수 없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이런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대목이다. 그만큼 아낌없이 키우다가 보니 애착이 심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가도, 온전히 내 품 안의 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할 때라고 인정해야 할 순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암튼 아홉 살 조카 아이가 저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뻔한 대답을 예상하기도 했다. "나는 엄마랑 결혼할 거야!" 뭐 이런 거. 그런데 조카 아이의 대답은 엄마와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는 거다. 그에 또 나는 생각했지. '아, 엄마와 아들은 결혼할 수 없는 사이구나, 하는 걸 말하려는 거 아닐까?' 전혀 아니었다. 조카 아이의 말은 이랬다. 자기가 커서 결혼할 때가 되면 엄마는 너무 늙은 사람이 되니까 자기와 결혼을 할 수가 없다는 거다. 아, 이런... ㅠㅠ 엄마와 아들을 결혼을 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아는 것과 별개로, 가슴이 싸~해졌을 것 같다. 이때 느꼈던 감정이 뭐였더라, 하는 이야기를 여동생과 한참 했었다.

 

아이가 커가는 게 기적 같으면서도 슬퍼지는 일. 가족이 함께여서 행복하지만 힘든 시간.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되면서도 기대고 싶은 순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현실에 답답하면서도 안도가 되는 마음의 모순. 이 소설은 딱 그런 느낌이다. 여동생이 둘째 아이의 말에서 느낀 많은 생각을 듣고 공감했던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엄마가 너무 늙어서 자기와 결혼할 수 없다는 아이의 말에 드는 많은 생각. 아이가 자란만큼 부모가 늙는 것은 당연하지만 함께할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 슬퍼지고, 계속 아이로 있었으면 좋겠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대꾸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의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게 아쉽고, 또 아이가 자라는 게 당연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점점 부모의 지분이 줄어드는 게 섭섭할 것 같고...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행복하고 아쉬운 순간이 동시에 찾아오는 그때.

 

그날 밤 늦게 서재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가보니 아내와 세 아이들이 침대 바로 아래 좁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서 자면 아이들이 따라 올라올까 봐, 그러다가 해여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아내는 항상 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다닥다닥 붙어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자니 무언가 뭉클한 것이 가슴 한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나도 침대 위로 오르지 못하고 그들 틈에 살짝 모로 누웠다. 쌕쌕거리는 앙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아내의 콧김이 내 뺨에 와닿았다. 아이들의 살 내음과 아내의 살 내음도 와닿았다. 누운 자리는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68페이지)

 

말 그대로 '유쾌한 기호씨네'이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도 조금은 어리바리한 아빠와 온몸과 마음이 중무장한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엄마.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게 취미인 큰아들과 중간에 끼인 둘째 아들, 존재 자체가 너무 예쁜 막내딸. 몸이 아픈 것을 말하지 않고 자식 힘든 일에 손을 보태러 오시는 부모님. 단순하게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족이 성장해가는 이야기더라. 소소한 그들의 일상에 웃다가, 어느 순간 보니 울고 있더라는 이상한(?) 이야기.

 

언제나 '가족'이 화두가 되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거의 두 가지로 나뉘기도 한다. 고발 프로그램에서나 볼 것 같은 이기적인 집단이거나, 울고 웃다 보니 이렇게 함께해왔다는 훈훈함이거나. 당연히 기호씨네 가족은 후자다. 분명 살면서 힘든 시간이 있었을 테지만,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환히 보이게 한다. '이래서 웃을 수밖에 없군!' 아니면 '이렇게 울다 보니 우리 집 얘기였네!' 하는 공감이 저절로 따라오는 에피소드. 늘 양가의 감정이 같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가족이 사는 이야기는 웃음이 훨씬 많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도 한글을 다 떼지 못해서 걱정되는 건 그들의 부모가 아니라 나였다. 우리 자랄 때와는 분명 다른 요즘이지 않은가. '유쾌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면 좋지'라고 하는 건 마음속 말들이고, 현실 속 초등학교 입학생은 그게 아니니까. 과도한 교육열이 아니라 이제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 떼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기호씨 부부도 인정하더라.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는 속담을 말하는 아이에게 웃음으로 답하긴 했지만, 뭐 그 정도는 괜찮겠지. ^^

 

44편의 소소한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늘 마지막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 또 다른 순간들이 오면서 그들의 시간도 흐른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 담기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는 더 많을 거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고, 기호씨 부부도 늙어가고, 부부의 부모님도 점점 더 약해지겠지. 그런데 아직은 그런 슬픔을 떠올리기 싫게 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조금 천천히 자랐으면, 우리가 조금 천천히 늙어갔으면, 우리의 부모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계셨으면 하는 마음들. 힘든 순간을 상쇄할 알콩달콩 세세한 순간들이 더 많이 쌓였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가족으로 엮인 우리가 서로를 보고 배우며 자라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품게 한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서글픔보다는 애틋함이, 눈물보다는 웃음이 차지하는 순간들이 계속 쌓였으면 하는 바람을 품으면서 읽게 되는 기호씨네 이야기다.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건 기쁜 일은 더 기뻐지고 슬픈 일은 더 슬퍼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지금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에게, 그리고 슬픔에 빠져 있는 부모들과 아이들에게도 언제나 포스가 함께하길.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다. (247페이지)

 

서툴지만 귀여운 아빠, 어설프게 전하는 마음이 기특한 남편, 마흔이 넘고서도 그저 막내로 존재하는 아들. 기호씨네 가정에서 그가 서 있는 자리다. 금방 '뻥'하고 터질 풍선만 불어대도, 뭔가를 뚝딱 해낼 것 같지만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여전히 배울 게 많은 아빠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아내는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아빠 기호씨가 늘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왠지 기호씨가 지금 모습 그대로 존재할 때 그 가족에게 웃음이 더 많이 생길 것 같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unsun09 2017-06-20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지가 넘어가는게 아깝다,고 하신 얘기 격하게 공감합니다~~

구단씨 2017-06-21 16:30   좋아요 1 | URL
깔깔대며 웃다가 보니까 마지막 페이지였어요. ㅡ.ㅡ;;;
 

박준...


이번엔 산문집이라네...
제목에서 풍기는 어떤 느낌에 갑자기 확 끌린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책 소개 글을 보다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읽기도 전에 기분이 이상해지고 있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7-06-16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이었군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제목 때문인지 박준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흣.

구단씨 2017-06-18 13: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제목만 보고 시집 출간인 줄 알았는데 산문집이라고 하네요. ^^
출간을 기다리고 있어요.
 

 

 

 

 

 

 

 

 

 

세계사 편력

알쓸신잡에서 언급되어 요즘 이슈가 되는 책.

나처럼 역사에 벌벌 떠는 독자에게 부담없이 다가올 듯...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 특별판

 

 

 

 

 

 

 

 

 

 

뜬금없이 기다려지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흉터의 꽃
김옥숙 지음 / 새움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또 하나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생각해보니 이미 들어왔던 이야기 말고는 어떤 역사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았다. 배워왔던 것 말고는 더 알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늘 하루 먹고 사는데 그게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난가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서는, 오늘 하루 끼니를 채우는 일이 사는 전부가 아님을 많이 느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모이니 나라가 바뀌는 기적(?)을 보고, 우리가 사는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시간에 반드시 봐야 하는 것들. 제대로 아는 것, 큰 그림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여기 또 있었다.

 

정현재는 히로시마 원폭 관련된 소설을 쓰려고 합천을 찾아간다. 그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인 것을 숨긴 채로 살아왔는데, 소설을 위해 그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거다.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 합천 원폭피해복지관에서 만난, 심하게 화상을 입은 얼굴로 그동안 고개 숙이고 살아왔던 강분희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그는 캄캄하게 가려진 그때 그 시간을 본다. 전쟁 통에,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강분희의 아버지 강순구는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향한다. 거기 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히로시마로 갔다. 유독 합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던 히로시마. 어려웠지만 열심히 살았다. 거기서 자리 잡고 살면서 아이도 낳고, 어느 정도 살만해졌던 그때.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터트린다.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쏟아졌고, 터진 원폭으로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은 다쳤다. 다쳤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엉망이 되었다. 원폭 사건으로 강분희는 몸에 화상을 입고, 강분희와 마음을 나눴던 동철은 발을 다쳤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딸의 모습에 강순구는 가족을 데리고 합천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합천에서도 먹고 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랴. 강순구는 온몸을 다해 가족을 보살피려 애쓴다.

 

소설은 정현재의 현재와 강분희 가족의 역사가 교차로 진행된다. 단순히 소설 한 편 쓰겠다고 찾아간 합천에서 자기도 모르게 원폭 피해자들의 현실을 마주한 정현재는 자기가 피하려 했던 고통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거다. 그의 변화는 원폭 피해자, 원폭 피해자 2세, 3세들의 이야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있는데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아니, 그 사실에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을 그대로 들으면서 그 자신이 부정하려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했고 대한민국은 해방되었다는 사실 이면에 자리한 것을 이제야 본다. 거기서 끝났다고 여긴 전쟁이 원폭 피해자에게는 계속되고 있던 거다. 비극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은 후련하게 끝났다고 여긴 게 잘못되었다. 그때 거기 있던 조선인들을 잊고 있던 거다. 7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원폭 피해자가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란 게 마음 아프다. 물론 나도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일본이 '유일'이 아니라 그냥 피폭국이라고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더군다나, 그때의 고통은 거기서 모든 상황을 평정하고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걸 이 소설로 새삼 알게 된다.

 

과거에서 머물지 않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정현재가 만난 인물들의 인터뷰로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이, 그때 그 순간에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이유로, 몇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고통이 대물림된다는 게 이 소설이 전하는 핵심이자 우리가 봐야 할 문제다. 현재진행형은 고통. 강분희의 화상은 겉으로 보이는 고통이 전부일 것 같지만, 아니다. 그녀의 첫아이는 사산되었고, 그녀의 딸 박인옥은 병명도 모를 병에 태어나면서부터 잘 걷지도 못하고 평생 고통받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라는 병명을 알았다) 박인옥의 큰아들은 중증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3대에 걸친 원폭 피해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끝났어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는다. 여전히 그들의 삶은 진행 중이며 고통은 역시 삶과 함께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원폭의 참상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들에게서 듣는다. 동시에 우리, 아니 전 세계가 같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남긴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 원폭 피해자의 2세, 3세들로 이어지는 피해들. '합천'이 왜 '한국의 히로시마'인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이야기가 흐르면서 더 깊고 오래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컸다. 그동안 보고 들어왔던 것에 가려진 것들이 들춰지면서, 고통의 시작점을 찾게 한다.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는 일본에 가려진 대한민국의 원폭 피해자들, 더 깊고 많은 이유로 원폭을 투하한 미국, 검은 비를 맞으며 유전되는 고통. 언제 또 되풀이될지 모를 비극에 맞서 원폭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관심 두고 최선의 답을 찾아야 할 문제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억은 과연 힘이 될 수 있을까. 기억은 어쩌면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기억은 미약할지라도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수억 명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숲이 되고 산이 되고 거대한 산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진정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 아닐까. 어둠을 기억해야만 빛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255페이지)

 

그의 꿈은 보통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연애를 하거나 직장을 갖거나 가정을 가질 수 없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어야 했던 삶. 그가 꿈꾼 것은 결코 큰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 계단을 힘차게 오르내리고, 아침이면 출근을 하고 퇴근시간에는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잔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는 삶. 자식 노릇을 하고, 동생 노릇, 친구 노릇, 애인 노릇을 하는 것.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 작고 소소한 것을 꿈꾸는 일조차 그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206~207페이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저 안녕한 하루를 보내겠다고, 평범한 인생을 살겠다는 게 너무 큰 바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일이었다. 이 얼굴로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몸으로 낳는 아이는 괜찮을까... 참혹한 현실을 겪어내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치료도 되지 않는 병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만이 겪을 수 있는 아픔이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보통에 이르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계속 그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현실이 감당이 안 되더라. 그런 현실이 자식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보는 마음은 또 어떨까. 사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원폭 피해를 모르는 나도 안다. 그러니 원폭 피해를 대물림받은 그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길이겠나. 그래서 이 소설이 전하는 울림이 크다.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고 있으니 해결을 위해 나아가야 하고... 그 끝이 어디일지, 언제쯤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시선이 모이는 힘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으니 길이 보이지 않을까. 여전히 그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작은 손 하나씩 모여 변화를 시작한 우리였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물음과 동시에 답을 내놓는 소설이다. 2017년 5월의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희망을 불러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