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디디 않아요.”

진솔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보태서 써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 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눔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

“…네.”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아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노인은 진솔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보태서 쓴다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 보태서 쓰기까지 어느 정도의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좋아하는 소설 속 구절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사실 잘 안 된다. 애인이든 친구든 동료든,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가족 관계에서도 어려워서 관계를 끊기도 하는 일이 새삼스럽지 않다. 매번 불편하고 힘든 그 관계를 정리하고, 또 다른 인연을 시작하고 또 정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간에서 항상 줄다리기하는 기분이다. 처음부터 이 사람을 보태서 쓴다고 생각하면 만날 수나 있을까? 만나다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서 헤어지기도 하겠지. 정말 이필관 옹의 말처럼 보태서라도 쓰고 싶은 애정이 남아 있을 때 계속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거겠지. 다만,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머릿속의 수많은 갈등이 끝나지 않는다는 게 힘들다는 거다. 그러면 관계의 정리 여부를 선택을 하는 시기는 또 언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다.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느끼게 되지만, 그 순간에는 잘 알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관계의 한 부분이 그러했다. 어떤 일에 익숙해지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일. 혹은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어도 체하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일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나온 추리닝을 입고 마주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의 편안함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가능할까 계속 생각했다. 같은 집에 태어나서 같이 자라고 사는 가족이어야만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그저 오직 한 가지,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도 가능한 관계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일을 앞에 두고 매번 이런 게 어려웠다. 편해지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지를.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렇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민낯을 드러내고, 어떤 힘듦과 괴로움으로 속이 상하는지 말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건 정석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겪어보니 그렇더라. 이런 방식은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때에만 결과로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우리 친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으로 알게 된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너와 친해지기 위해 내가 이런 노력을 계속해왔구나, 하는 확인과 안도 같은 감정까지도. 그래서인지, 나이를 계속 먹어갈수록 누군가와 친해지는 게 힘들었다. 처세술처럼, 어느 순간을 통과하기 위해 가면 하나를 쓰고 사는 날이 많았다. 상대방(들)과 굳이 친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시 안 볼 사이가 될지도 모르고, 계속 보게 된다고 해도 또 그 순간을 넘어갈 대응을 보이면 되는 거였다. 어른들을 만나도, 또래를 만나도, 언젠가부터 그랬다. 적당한 예의로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며 상대방과 연관된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되곤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난 주말에 집안일 때문에 어떤 분을 만나게 됐다. 잠깐 인사만 하고 나오면 충분할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그분과 차를 한 잔 마시게 됐고,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자리가 아니었는데, 인사하고 뒤돌아서서 나오면 되는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불편한 자리였고, 불편한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혹시 보게 된다면 불편할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혹시 눈물이 나오더라도 꾹 참아야 할 자리에서 나는 추하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는데, 그분은 나에게 울지 말라는 말도 안 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괜히 울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나보다 인생 더 살아온 사람이니 분명 더 많이 쌓아온 게 있을 터였다. 그분 역시 세상 쉽게 살아오지는 않았겠지. 어떤 관계로 정의할 수 없는 사이였는데, 상담자와 내담자로 만난 기분이었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았을까. 정의하기 모호한 관계가 되었고, 불편한 것을 아닌 척하며 한 번 더 만날 일이 생겼다. 싸우자는 자세로 나갔는데, 오히려 미안한 일을 더 보태고 와버렸다. 원하지도 않은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은 여전했고, 그들은 자기들의 오지랖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 것처럼 기뻐했다. 그게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고 싸우고 화나게 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결국은 그들의 오지랖을 내가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걱정에 머리를 싸매고 두통을 이고 사는 날들이다. 남들이 펼쳐놓은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게 화가 나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만 쌓이고, 가능하면 누구라도 상처를 덜 받게(아주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요즘의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인생 뭐가 이렇게 어렵냐 싶은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 또 누구에게 투정 부리면서 민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은 이 모순적인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남들이 펴놓은 장기판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기 말이 된 것만 같아서 너무 아프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다독이고 위로하며 건너갈 수 있을까 하던 중에 보게 된 이웃님의 리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한 문장 때문에, 완전하게는 아니어도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그가 찾고 있는 비유에 거의 다가간 것 같다.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섬에 있는 서점, 301페이지)

 

우리는 단편집이야. 우리는 단편집이야.. 우리는 단편집이야... 그러네. 살아오는 순간순간들의 단편이 모여서 단편집으로 만들어지는 게 우리 인생이었네. 기다란 장편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겠지만, 우리가 단편집이라는 저 문장을 보자마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로를 받은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어렵다고 징징거리고, 왜 남이 만들어놓은 힘든 일의 정리를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화를 내는 일도, 짧은 단편처럼 금방 읽고 덮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이 순간을 넘어가는 일도 인생의 한 부분이겠거니, 그 마무리가 더 고통스러운 일로 변할지 몰라도 단편 하나의 마지막 페이지이겠거니, 하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만 같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워질 일들이 인생이겠구나 싶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과 이렇게라도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거라면, 받아들여야지 별수 있나. 가끔은 슬프고, 아프고, 힘들겠지만, 이 순간이 단편소설이 되어 넘어갈 거로 생각하면 참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은, 보살 같은 마음으로 지금은 건너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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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 (9페이지)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보이는 첫 문장이 강렬하다.

처음, 이 소설을 읽어보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평범한 일상에서 겪는 갈등이 어떤 분위기로 펼쳐질지 복선처럼 보이는 느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여자의 음성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왜 시작되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펼친 이 책의 첫 페이지의 문장이 저러했으니,

예상했으면서도 놀랐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강렬하게 시작하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2016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면서,

나에게는 레일라 슬리마니라는 작가를 처음 만나게 해 준 작품이다.

제목의 달콤함은 첫 문장으로 바로 사라졌다.

결코 달콤하지 않은 '달콤한 노래'를 부르리라는 우울한 걱정이 앞섰다.

누군가의 가려진 시간을 알아가는 순간이면서,

우리 일상에서 만날 수도 있을 모른 척한 일일지도 모르면서,

결국은 나의 일이 될지 몰라서 염려를 해야 하는 이야기.

 

그래서 끝까지 읽어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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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무채색 결혼
향기바람이 / 로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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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평범하게 사는 부부 대부분의 모습이 이러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두 사람의 시작이 지극히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선을 보고 결혼을 한다는 과정이 이상한 게 아니라, 시한부 환자인 어머니의 안심을 위해서 아내를 찾는 남자가 어디 흔할까. 또 그런 남자의 조건에 선뜻 손을 내민 여자는 어떻고. 주변에서 이런 사람 본다면 누군가는 분명 말리느라 정신없을 텐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평범해 보이지 않은 두 사람의 시작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동네에 작은 빵집을 운영하는 연정은 셀 수도 없을 만큼 선을 봤다. 무슨 일과를 치러내듯 선을 본다고 해도 무방하리. 이번에 만난 남자가 어떨지 기대하기보다는, 이런 과정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연애로 이어져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자기 사정을 그대로 다 말한다. 시한부 선고받은 어머니가 자기의 결혼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당신 아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그 소원을 이뤄드리려고 이런 자리에 나온 거라고. 연정은 이런 사정을 미리 알지 못하고 나온 자리라서 순간 당황하지만, 시후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시후의 어머니를 멀리서 지켜보고 난 후 결심한다. 이 남자와 결혼하겠노라고.

 

그렇게, 서로의 필요(?)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펀드매니저로 일하는 시후는 늘 바빴고, 연정도 익숙한 일상을 이어나갔다. 가끔 시후의 어머니를 찾아뵙는 것으로 마음을 다했다. 별일 없는, 무난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적응 기간이 없을 수 있을까. 두 사람 사이에도 소소한 감정싸움이 일어난다. 지다고 보면 왜 그랬을까 싶은 일들, 별거 아니었는데 말이 앞서나갔다는 후회, 화해하고 나니 괜히 더 유치한 언행이 부끄러워지는 시간.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일상이 공유되고,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고, 오늘이 평온해지는 날들이었다. 그 사이에 시후 부모님의 비밀과 시후의 옛 연인이 등장하면서 두 사람의 시간이 쌓이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우리 사는 모습과 닮아서 오히려 공감되었다. 살면서 그런 바람 한두 번쯤 불어오는 거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서로 맞춰가는 게 결혼이라고, 그렇게 맞춰가기 위해 크고 작은 충돌은 피할 수 없다고,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공유하며 '함께'라는 시간 또 만들어가는 모습이 찾아온다고. 그렇게 감정이 스며들고 또 쌓이면서 결혼이란 역사를 같이 쓰고 갈 두 사람일 테지. 그 순간 온전한 '내 편'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을 것 같다. 내가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위로가 되어줄 사람이라고, 이런 평범한 일상 이루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아가는 시간. 사소하고 또 사소해서 그 소중함을 차곡차곡 쌓는 모습이 예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읽으면서 내내 흐뭇해지는 기분에, 페이지 넘기는 일이 즐거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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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짝사랑의 타이밍
YUN짱 / 조은세상(북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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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정말. 유치하기 그지없는 설정인데,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인데, 중반 이후로 넘어갈수록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대개, 그런 흐름으로 가지 않나? 한쪽의 일방적인 짝사랑이 '앓이'를 하다가 그만두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알게 되어 자연스럽게 연애가 시작된다거나, 혹은 그 짝사랑이 알고 보니 서로 말 못 하는 쌍방통행이었다던가... 이제껏 만나왔던, 짝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대부분이 그러했다. 그러니 이 소설도 당연하게, 짝사랑을 감춰온 여자의 마음이 그 상대에게 가 닿아서, 처음의 등장인물 두 명이 그대로 주인공이 되어 해피엔딩을 이룰 거로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나는 너무 익숙한 선입견으로 이 소설을 대했던가 보다. 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이 소설이 희한하게도, 흥미롭더라는. ^^

 

차희연은 최민규를 짝사랑했다. 오랫동안 친구였고, 부모님끼리도 친구인 관계. 아마 태어나기 전부터 친구로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알고 자라는 사이였는데, 어느 순간 희연의 눈에 민규는 남자로 보였다. 한 번도 여자를 안 만난 적이 없는 민규의 화려한 연애사가 어느 순간부터 거슬리기 시작했다. 민규에게 들어오는 선물들로 배를 채우던 희연이었는데, 이제 그런 것들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 못 할 질투와 표현하지 못한 마음으로 점점 민규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런데 민규 이놈은 그런 희연의 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희연이 끝까지 친구로 남아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희연의 짝사랑을 모른 척한다. 심지어 희연의 친구와 사귀기까지 하면서 희연의 반응을 살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가장 알 수 없던 게 민규의 마음이었다. 어떤 마음이면 희연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나 싶어서 주리라도 틀고 싶었으나, 또 민규는 민규 나름의 연애관이 있을 터이니 내가 훈수를 둘 수는 없어서 참았다. (뭐, 안 참으면 어쩔 건데?)

 

그러다가 희연은 우연히 알게 된 박승현을 애인 대행으로 꾸준히 이용한다. 승현 역시 희연과 비슷한 이유로 희연을 애인 대행으로 맞이한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마음을 아는, 누군가를 향한 짝사랑 동지로 뭉친 희연과 승현은 그들 나름의 원칙을 지켜가면서 서로가 필요한 순간에 도움이 되는 연기를 하는 거였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흐름이 뻔하게 흘러갈 거로 여기게 된 이유다. 가짜 애인을 하는 사람의 등장으로 원래의 짝사랑 상대가 마음이 흔들리고, 결국은 처음 마음 준 사람에게로 가는 방식. 그런데 이 소설 의외다. 민규라는 인물은 사이코에 가깝게 집착남이 되어버렸고, 승현은 가짜 애인이 아니라 어느 순간 희연에게 스며드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다. 이 순간, 희연과 승현은 쌍방이 되고, 민규는 못된 후회남이 된 것. 게다가 민규의 한심함과 구질구질함은 동정은커녕 잡아다가 감옥에라도 넣고 싶을 정도의 한심한 짓이었으니... 도대체 희연은 민규의 무엇을 보고 좋아했을까 혀를 차고 싶을 정도였다. 하긴, 또 사람을 알아도 끝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 또 확인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지.

 

흔히 말하는 그 타이밍의 중요성과 운명을 갈림을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확인할 수 있다. 혼자만의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혹은 끝나는 순간.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먹은 순간, 혹은 거절하는 순간. 이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고 상대의 마음도 얻어야겠다고 자각하면서 직진하는 순간까지. 어쩌면 우리 인생에 등장하는 그 많은 타이밍은 꼭 사랑에서만 작용하는 법칙은 아니다. 늘 그랬다. 어떤 일을 선택하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하는 일들에는 그 타이밍이 중요한 순간이 많았다. 살면서 늘 겪는, 언제나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고, 얻는 게 있으면 버려야 할 것도 있기 마련인 게 인생이라서. 그래서 매번 그 타이밍을 잘 잡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게 사람 마음이라면 더 중요한 것 같다.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 테니, 움직이는 게 마음이라서 그 거리가 더 생기기 전에 잡아야 하고, 멀어지는 순간 접어야 하니까. 그런 의미로 보면 승현은 자기 마음 확인한 순간 고백하고 다가가는 것으로 그 타이밍을 잡았다. 민규는 이기적인 계산으로 누군가의 진심을 받아들일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희연은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내보내고, 다시 마음에 들여놓는 일의 타이밍을 잘 맞췄다. 그녀 인생에 이보다 더한 시험이 있었을까 싶은 순간을 지나고 있다. 희연의 말처럼, 엇나간 타이밍은 힘이 없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 앞에서 지나간 타이밍은 의미가 없다.

 

유치하게만 흘러갈 것 같던 소설이, 인생의 큰 지침을 알려주고 끝을 맺었다. 타이밍은 짝사랑에서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작용하는 법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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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 부의 탄생, 부의 현재, 부의 미래
하노 벡.우르반 바허.마르코 헤으만 지음, 강영옥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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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경제학 수업 같은 것을 이런 책으로 진행한다면 훨씬 집중하고 재밌게 수업에 참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딱딱하고 원론적인 내용 말고, 좀 더 쉽게 설명이 되고 차근차근 하나씩 귀에 들어오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누구라도 즐겁게 들을만한 강연 느낌이다. 물론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알아두면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기도 하다. 거의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내용을 한꺼번에 다 소화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하나 새겨듣다 보면 경제를 보는 시야도 넓어질 것 같다. 인플레이션이 우리 생활에 작용하는 것들, 그로 인해 우리 삶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인플레이션을 조종하는 듯한 배우의 일들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위기를 극복할 자세를 만들어갈 수 있다.

 

화폐량에 비해 재화량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물가는 당연히 상승할 수밖에 없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를 양팔저울로 도식화시키면 더 이해하기 쉽다.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화폐가, 다른 한쪽 접시에는 재화가 담겨 있다. 화폐가 담긴 접시에 화폐를 너무 많이 올려놓으면 접시가 아래로 기울면서, 재화가 담긴 접시가 위로 올라간다. 쉽게 말해 물가가 상승한다. (187페이지)

 

학교 다닐 때, 경제 과목에서나 제대로 들어봤을 단어, 인플레이션. 실생활에서는 물가의 상승을 이야기할 때나 튀어나왔을 단어이기도 하다. 아기 주먹만 한 호박 하나에 2천 원이나 하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인플레이션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인플레이션'에 보다 흥미롭고 세세하게 접근한다. 독일인 저자 세 명이 같이 쏟아낸 이야기가 그 인플레이션의 시작과 역사를 말한다. 더불어 돈, 권력, 부의 미래가 어디를 어떻게 향해 가는지 풀어내면서, 그에 대응할 우리의 자세까지 언급한다.

 

10세기 중국 교역 상인들이 거래 수단으로 종이를 사용하기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동전을 주조할 금속이 부족했고 종이는 사용하기 편리했다. 이전에는 상인들과 교역을 할 때 물건을 담보로 맡겼지만, 이제 물건의 가치를 명시한 종이만 있으면 간단하게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 종이가 발전하여 고유한 화폐가 되었다. (43페이지)

 

인플레이션은 화폐와 함께 시작되었다? 2000년 전쯤에 화폐가 사용되면서 인플레이션의 역사는 같이한다. 거의 모든 시대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발생되어 부의 흐름과 세계 경제를 좌우해왔다. 그 배경에는 국가가 있었고, 부의 권력자들이 있었다. 화폐 가치를 조작한다거나, 나라의 경제 위기를 인플레이션으로 눈가림하면서 자기들만의 이익을 취했다. 그로 인해 서민들은 더욱 가난으로 몰렸고, 이런 상황은 늘 반복되어 흘러왔다. 아는 사람만 알고 쥐고 흔들 수 있는 수단이었던 거다. 물론 거기에는 나라 안팎의 위기와 전쟁 같은 일들이 발생해서 더해진 것도 있었지만, 그 배경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던 거다. 특히 지폐의 사용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녹아내리기도 하는 금속 화폐 대신 종이 화폐의 등장은, 부의 탄생과도 그 흐름을 같이 한다. '돈의 역사 = 인플레이션의 역사'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 모습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인플레이션의 발생과 과정은 같다고 한다. 화폐가 붕괴하는 시작은 국가 채무나 통치자가 책임 회피를 하려 했고, 그 해결을 위한다고 하는 게 인플레이션의 발생이고, 실제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의 생활에 다가왔다. 매번 이런 흐름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의회는 세금을 징수할 능력이 없었고, 각 주는 국가 예산을 지원할 재정도 없었을뿐더러 그럴 용의도 없었다. 해외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데에도 제약이 있었다. 남은 방법은 전쟁 자금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의 지폐를 발행하는 것뿐이었다. 미국은 지폐 덕분에 독립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 봐도 뻔한 것이다. 매년 약 100퍼센트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05페이지)

 

베네수엘라의 초인플레이션 사태를 예로 들면서 그 심각성을 고발하고, 헝가리와 독일의 경제를 바꿔놓은 화폐개혁 등으로 위기 정돈 상황을 보여준다. 인플레이션은 단순하지 않기도 하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잘 알면 그 안에서 살아남을 방법도 보이기 마련이라고 길을 열어준다. 사태의 심각성과 우리 삶에 적나라하게 와 닿는 일들을 살펴보면서 인플레이션의 장단에 휘둘리지 않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언급하면서 위기를 직면하게 하고, 그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몸에 새겨야 한다는 경고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야 부의 권력자나 통치자들이 만들어놓은 인플레이션으로 우리가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경제 위기의 거대한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뼈아픈 경고다.

 

인플레이션의 시작부터 다양한 접근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들려주어야 할 내용이 많다는 듯 저자가 언급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대부분이 몰랐던 사실이었으며,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고통받아온 경제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듯 새로운 접근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 모두를 옮길 수 없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결국은 이 책은 지침서 삼아 금융 위기의 시대에 살아남는 법을 듣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의 핵심은 인플레이션의 역사와 증상들, 보이는 이면의 어두운 사실들, 결국 부를 거머쥔 이들이 이끌어오다시피 한 세계 경제의 흐름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데 있다.

 

첫째, 인플레이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인플레이션만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화폐의 가치와 부채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둘째, 인플레이션은 의외의 결의안이나 장관의 공식 선언도 없이 익명으로 진행되는 행사다. 책임자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정부는 쉽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239페이지)

 

저자는 인플레이션은 모두에게,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라고, 빗겨간다는 건 불가능하고,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 그럼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대비해야 인플레이션을 통과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확실한 건 없다. 다만, 그 불확실 안에서 좀 더 안전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무작정 덤비는 게 아니라 전략과 준비로 한 걸음 내디뎌야 한다는 것.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어떤 경우에도 대비할 수 있는 순발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인플레이션이 가지는 구조적 위험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애초부터 피해갈 수 없으니, 대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이 책의 후반부에 언급되는 저자가 제시한 '인플레이션을 둘러싼 네 가지 시나리오'는 투자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대응 방법일 수 있다. 투자하고자 하는 곳의 모든 것을 알아낸다는 자세로 파악해야 한다. 투자하기 전의 포트폴리오 구성은 필수다.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등 다양한 투자 종목의 구성뿐만 아니라 배분까지 확실하게 연구한 결과물이 필요하다. (특히 포트폴리오 작성법이 더 세분화하여 설명되어 있다) 투자의 실수를 경험 삼아 실패의 재발을 방지한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따라 하는 것, 우연을 맹신하는 것, 쓸데없는 집착들, 다시 가치 있기를 바라면서 처분을 미루는 것, 객관성이 없는 희망, 과도한 낙관주의는 피해야 할 것들이라는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화폐의 형태, 모습, 발행자가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화폐는 우리 인류가 발견한 가장 천재적인 아이디어다. 화폐는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52페이지)

 

다른 매체에서도 들었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앞으로의 경제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뭐, 언제는 그렇게 투명하게 보인 경제 전망이었겠느냐마는...) 지나간 역사에서의 인플레이션에 대책 없이 당해온 것은 서민들뿐이다. 투자로 고수익을 얻겠다는 얄팍한 수를 생각하지 말고, 알지 못해서 당해온 희생을 더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에 뭔가 크게 바뀔 효과를 얻는 게 아니라, 적어도 내 책임이 아닌 일로 마이너스의 경제를 안는 삶을 만나서는 안 될 것이기에 말이다. 피부로 닿지 않는다고 해서 인플레이션이 사라진 건 아니다. 더 현명하고 (그나마) 안정적인 돈 관리를 위해, 누군가 휘두르는 경제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한번은 만나 봐도 좋을 경제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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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8-31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