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 호기심에 클릭했다가...

놀랍기도 하고.

작가가 한국 식용 동물 농장 열 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기록한 것이라니까

얼마나 생생할까 기대가 된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공간의 이야기라 그런지 완전 궁금하기도 하고,

또 그 안에서 발견한 어떤 시선의 이야기가 색다를 것 같다.

무엇보다 허를 찌르는, 내가 전혀 몰랐던 공간의 모습을 마주할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다.

 

작가를 검색하다 보니 다른 책이 한 권 더 나온다.

 

 

 

 

 

 

 

 

<인간의 조건>

꽃게잡이 배에서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여러 직업을 거친 그가 체험한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라는 소개글에 이 책도 궁금하다.

 

거의 반년 넘게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지냈는데

이 책들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읽고 싶은 책 제대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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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5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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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다짐과 확신을 하는 게 살아가는 거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살아가야겠다, 하는 다짐을 하는 건 삶에 당연히 필요한 요소인 것 같았다. 짧은 인생이지만 경험으로 아는 확신들이 옆에서 그 다짐을 응원하며, 눈에 확연히 보이는 분명하고 좋은 길로 가는 것을 열어준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살면서 겪고 알게 되는 것들로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다. 어설프게 한 마디 더해보자면, 확신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뿐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것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이 보태지는 정도가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다. 지금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이다. 그러니 이 소설 속의 남자 다다시가 사는 방식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가도, 그의 일상을 몇 달 옆에서 지켜보면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거다.

 

다다시는 이혼을 하고 오래되고 낡은 집을 얻어 이사를 온다. 차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타고 다니던 차도 판다. 그가 구한 오래된 주택의 이곳저곳을 손보며 지금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요소들에 충실할 뿐이다. 집주인 소노다 씨가 그 오래된 주택을 다다시에게 임대하면서 내건 조건은 하나뿐이다. 내부의 불편한 부분을 수리하거나 변경하는 건 괜찮지만 집의 겉모습만은 그대로 유지해달라는 것. 다다시는 소노다 씨의 요구에 어긋나지 않게 집의 수리를 이행한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지만, 뭔가 빨리 처리해야 할 일 앞에서는 분명하고 빠른 결정을 하는 편이다. (물론 아닐 때도 분명 있지만...) 시골이나 자연의 정경 앞에서 시원하고 속이 탁 트인다는 감정의 발산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환경이 나의 주거지가 되는 것은 또 원하지 않는다. 자연의 푸르름과 느긋함은 그저 내가 가진 일상을 한 번씩 벗어나고 싶을 때 만나고 싶은 공간이다. 그러니 굳이 주택을 이상형으로 삼아 주거지를 결정하는 다다시의 선택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일상의 편리함을 버리고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은 집을 선택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소노다 씨의 오래된 주택으로 들어가 집의 수리를 하나씩 해가면서 찾아가는 안정된 공간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보이던,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와 사용할 수 없었던 벽난로를 가나가 수리하던 그때, 무언가 삶의 방식이 찾아지는 기분이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만났던 불륜 상대 가나를, 다다시는 이혼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난다. 처음부터 다시 연애의 감정으로 가나를 대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가나와 친숙해진다. 그냥 연인 관계로만 본다면 가나와 다다시 사이가 재회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삶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선명한 감정 앞에서 선명하지 못한 태도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가나는 아버지의 병시중을 해야 하고, 다다시는 가나의 환경에 어떤 제안도 쉽게 할 수 없다. 그런 가나가 다다시의 벽난로를 고쳐(?)준다. 연기가 굴뚝으로 좀 더 가깝게 빨려 들어가게 만들어주면서 벽난로 바닥에 벽돌을 몇 개 쌓는다. 집안으로 들어오던 연기는 벽돌 몇 개로 높이를 높여주니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굴뚝으로 향해 피어오른다. 엉터리로 만든 벽난로에 안정되게 불을 피우는 일. 그건 벽돌 몇 개를 쌓음으로써 정상인 벽난로가 된 모습에서 가능해 보였다.

 

마치 우리 인생이, 가나가 경험한 기억을 토대로 쌓은 벽돌 몇 장으로 달라진 벽난로 같았다. 부족한 자리에 뭔가를 쌓으니 제자리를 찾는 느낌.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분. 다다시의 현재가 그랬다. 그는 알았을까? 그의 불륜을 아내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다가 이혼 시점에 꺼내놓은 일, 그가 아내와 이혼하게 될 거라는 일, 오래된 주택에서 소노다 씨가 돌아올 때까지 몇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 시간이 너무 짧을 거라는 걸. 소소한 것 같지만, 마치 다 알 것 같지만, 처음 생각처럼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그 생활을 유지하는 게 정상이라고 여기며 살아왔겠지만, 이제 그가 바라는 정상은 혼자만의 삶이다. 혼자여서 편한 오늘의 일상인 거다. 저녁에 근처 공원을 느긋하게 걷기도 하고, 고양이와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밥도 챙겨주고. 그는 이 소설 제목의 한 단어처럼 우아한 삶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일상에 끼어들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집을 짓게 되기도 하는 일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온다.

 

"오래된 걸 이것저것 손보는 게 즐겁거든.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정원도 업자를 부르면 되살아나고, 다다미도 이불도 손질하면 새것이 되고, 장지도 덧문도 마찬가지야. 부엌 공사도 그랬어. 어둡지, 간장 냄새 나지, 전체적으로 기름때가 묻어 있었지만, 물론 그건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지만, 싹 고쳤더니 몰라보게 좋아졌어. 수명이 다해가던 게 되살아나는 게 뭐라 말할 수 없이 기쁜 거야." (85페이지)

 

그는 다시 마련할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갈까? 아마도 혼자여서 편한 삶을 유지하면서, 그와 관계된 사람들 틈에서 감정을 쏟아내며, 소노다 씨의 처음 만났던 주택처럼 늙어갈 것이다. 물론 그런 흐름은 나에게도 적용되겠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로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다급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겠지. 분명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에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만은 선명하다. 아무도 모르는 내일을 살아가는 게 우리여서, 그렇게 살면서 채워진 시간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오래된 집 한 채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집을 하나 발견한다면, 그 오래된 집을 보고 다다시처럼 여기저기 손보면서 하나하나 바뀌는 집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만나게 될지도...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조금씩, 다시 고쳐가면서 그 공간에 머무르고 싶을 것 같다. 한 치 앞도 모를 내일을 사는 방법은, 그런 즐거움으로 오늘을 채워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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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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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매우 자극적인 감정일 수 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친구와 적, 우리와 그들, 선과 악으로 나누면 세상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훨씬 덜 무서워할 수 있다. 한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어렵다. 요구사항이 많다. 증오는 간단하다. (374페이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아니, 특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일 뉴스에서 보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뉴스의 내용은 역시 특별하지 않았다. 우리 사는 주변의 이야기를 뉴스라는 보도로 다시 듣는 것뿐이었으니까. 프레드릭 배크만이 전하는 또 하나의 뉴스를 듣는 기분이었는데, 뭔가 이상하게, 묘하게 달랐다. 이게 프레드릭 배크만 식의 공감 능력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의 출간작을 계속 읽어왔음에도 이런 느낌은 생소하다. 잔잔한 감동에 훈훈한 마무리가 여운으로 남는,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게 그동안 그의 작품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아프고 씁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게 우리 현실인 것만 같아서 서글프게 한다. 사건과 상황에 무력해지는 기분에 내가 내민 손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 고개가 숙여졌다. 왜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걸까, 싶은 무의미한 질문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보도된 내용 그 이후, 마침표 다음의 이야기까지 듣는 것만 같아서 설명하기 힘든 뭉클함이 다가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의 목소리가 커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힘을 잃고, 돈과 권력이 피해자의 숨을 죽이고, 가해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살아가는 일. 너무 흔하게 들어와서 새롭지도 않은 이 일이 이곳에서만큼은 다르게 들려온다. 작가가 전하는 문장의 힘이었던 걸까. 어떤 상황을 전하는 이야기인데, 그 사이사이에 작가의 읊조림 같은 문장들에 그들의 상황 속에 독자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아주 가까이서 듣는 분위기다.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1페이지)

 

의미심장하다.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주 자세하게 들려주겠다는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베어타운,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면서 총소리를 울리게 했는지 듣고 나면 우리 사는 세상을 한 번 더 예리한 눈길로 둘러보게 된다. 비극의 시작인 하키, 하키로 하나가 된 마을, 하키와 마을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익의 산물들, 하나의 집단이 되어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이야기다.

 

베어타운 그곳의 힘이 되는 건 하키다. 케빈은 하키 유망주이기도 하고, 힘 좀 쓴다는 집단의 자녀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자기네 하키 팀이 이기기를 응원한다. 응원의 목소리에 답이라도 하듯 그들의 팀은 승리한다. 그리고 축배를 든다. 이겼으니 무조건 다 된다는, 무엇을 하더라도 용서가 된다는 무임승차 티켓이라도 얻은 걸까. 그날 밤, 축제가 한창인 것 같은 분위기를 즐기며 웬만한 일에는 눈감아 줄 수 있다고 한껏 아량을 품어주던 그 날. 하키 유망주 소년이 십대 소녀를 성폭행한다. 누군가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이야기는 그 이후의 장면에 주목한다. 가해자의 행동, 피해자의 공포, 목격자의 침묵. 힘을 가진 이들이 다수의 목표를 위해서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식의 해결을 위해 모두가 눈을 감고 피해자의 아픔을 모른 척한다.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모라는 이름으로 감싸 안으려고만 한다. 정작 무엇이 아이를 해치는 일이 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덮어주기만 하는 게 아이를 위한 일인 걸까? 당장 오늘의 안위가 아니라 좀 더 멀리 내다봐야 할 순간의 모습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그런 일의 결과는 지나고 나서야 아는 법이니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과거의 사건)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이미 먼저 세상을 살아온 부모가, 어른이 해주어야 할 일을 망각하는 순간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로 혼란을 품고 성장할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배울 기회가 사라진 채로. 그러니까 이런 공감 능력.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245페이지)

 

요즘 일어나는 미투운동의 기저에는 이런 감정의 고통이 자리한 것이다. 가해자에게는 지나간 일이고 기억하지 못 하는 일로 흘러갈지 몰라도, 피해자에게는 그 일이 일어났던 순간의 고통 속에서 멈춰 있는 시계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 순간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가해자는 피해자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한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어떤 오늘을 보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감추고 누르고, 모른 척하는 일은 비겁하고 이기적인 일에 멈출 뿐이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온 하키에 대한 애정이 자식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도리를 무시한 채로 이뤄질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토론을 벌이다보면 거의 항상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논란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생물 선생님이 설명하기에도 쉽지 않은 주제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똘똘 뭉치고 서로 협력한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자가 약자의 희생을 딛고 번영을 구가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쯤에 선을 그어야 하는지 항상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 이기적이어도 될 것인가. 얼마나 서로를 챙겨야 하는가. (391페이지)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 각자의 인생이 펼쳐지겠지만,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그 일을 누구나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켜야 할 것들, 간직해야 할 말들이 있는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흐름이 이번에는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아포리즘처럼 가슴에 와 닿아서다. (그렇다고 그의 전작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유독 이번 작품이 더 크게 다가온다는 의미다.) 쇠락한 작은 마을이 버티기 위해,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데 필요한 무언가가 있겠지만, 그 무언가가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뭉침이겠지만, 적어도 불의 앞에서는 정의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마을의 안위를 위해서라는 비겁한 변명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특히나 이 소설이 매력적이었던 건, 결말이 의외였다는 거다. 나는 마지막에 피해자가 말했던, 단 하나의 총알만 필요하다고 말했던 부분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예상했다. 그렇지. 피해자와 가해자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끝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내가 많이 극단적이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 마야가 그 하나의 총알을 사용하던 목적을 알고 나서다. '아, 꼭 누군가 한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서도 증오를 표현하고, 복수의 감각을 갖게 되고, 가해자를 벌할 수도 있는 거였는데...' 첫 페이지 첫 단락의 문장들이 담은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누군가의 이마에 댄 방아쇠가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이제야 알았다. 집단 속에서 사는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피해자가 되어서도 정당한 목소리를 내가 어려울 때, 인간의 이기심을 누를만한 답을 찾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 많아서 버거울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되는 태도이기에 의미가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식의 철학적 사유에 감동으로 뭉클해지는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더불어 인간다움이 뭔지 또 한 번 생각할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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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4-21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일어나는 미투운동이 떠오르는 소설이군요 마침 이런 소설을 쓰다니... 아니 예전이라고 이런 소설이 없었던 건 아니겠습니다 작은 마을이 하키로 더 알려지는 것보다 작은 마을에 함께 사는 피해자 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게 좋을 텐데... 그런 결정을 하는 곳이 얼마나 될지... 피해자는 자꾸 피해만 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피해자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프레드릭 배크만 소설을 다 읽어 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지금까지 나온 것하고 조금 다른 것도 같지만, 아주 다르지 않겠지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희선

구단씨 2018-04-23 00:13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라는 이름을 달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많이 안타깝고, 아픈 일이었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소설을 저도 한두권 읽어봤는데요. 전작보다 이 작품이 훨씬 무게감 있고 좋던걸요. ^^
 
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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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언가를 배우는 데는 몸으로 직접 부딪히는 것만 한 게 없다. 물론 굳이 그렇게 경험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들고 마음도 다치기 쉽다는 함정이 있지만,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겪음으로써 내면에 축적되는 인생의 노하우가 분명하게 자리할 것이다.

 

뉴욕으로 입성한 티아.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면서 자기만의 푸드 칼럼을 쓰고 싶었다. 한때는 지역 신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던 그녀였지만,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건 헬렌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그녀의 능력을 보여주면서 헬렌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헬렌에게 그녀가 만든 음식을 맛보여주고, 대학원 실습수업을 헬렌의 밑에서 해낼 기회가. 하지만 인생 어디 그렇게 만만하게 흘러가기만 하랴. 우연히 푸드 칼럼니스트 마이클을 알게 된 티아의 인생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노선을 튼다.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된 티아는 미각을 잃은 마이클의 숨은 장금이가 된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미각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으며, 섬세한 감각으로 음식의 맛을 표현한다. 그렇게 마이클과 같이 다니면서 유명 레스토랑의 음식을 맛보고, 그녀만의 감정으로 별점을 준다. 명품을 몸에 휘감고,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 서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마이클의 칼럼 대필 작가 같은 역할을 하면서...

 

특별 손님(Personne Extraordinaire).

피곤했지만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자고 싶지 않았다. 새소리가 들리고 짙푸른 태양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을 때 나는 이곳 뉴욕에서 내가 열렬하게 매달릴 무언가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지식, 권력, 방향,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 나는 간절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104페이지)

 

티아가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숙지하던 것 중의 하나, 특별 손님. 누구나 그런 생각 하고 살지 않을까? 존중받고, 대접받는 삶을 꿈꾸지 않을까? 꼭 높은 곳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위치에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뛰고 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티아의 선택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이미 인생의 복선처럼 눈치를 채고 있었으면서도, 은근히 응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더, 남들보다 조금 더, 라고 바라는 삶을...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잊고 있다가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난다. 처음 티아가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대기 줄에 섰을 때, 한참을 기다렸다가 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는 순서를 기다리며 음식점에 들어가는 게 당연한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티아가 마이클과 함께 다니면서 레스토랑의 VIP 대접을 받으며 음식을 먹을 때를 보면, 세상은 줄을 선 순서와 다르게 입장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평범하게 입은 옷과 명품을 걸친 몸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티아는 두 세계를 경험한다. 친구를 사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소소하게 나누는 일상과 특별손님 대접을 받으며 우아함을 보여야 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일. 누구에게나 선택의 기회는 있다. 티아는 대학원 수료보다는 당장에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는다. 물론 그 기회는 현실의 순간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녀가 간절하게 바랐던 헬렌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길의 과정일 뿐이니까. 그렇게 믿고 나아갔다. 이대로 가는 길이 당연하고 나쁜 건 아니라는 판단에 그녀가 선택한 대로 현실을 누렸다. 그대로 가는 게 정말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은 계속 생기지만 안도의 답을 끌어오려 애쓰기도 한다. 괜찮을 거라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말하면서.

 

패션은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왜 그런 겉치레와 허세에 의지해야 할까?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것일까? 마치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각각의 옷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진입로가 된다. 옷이 나에게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 (200페이지)

 

리뷰를 쓰면 더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건 확실했다. 그 힘을 남용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날은 내 개인적인 고통이 너무 심했고 그것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여기에 사람들의 삶이 걸려 있다. 이 리뷰를 시작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379페이지)

 

단지 뉴욕이 아니어도 경험하게 되는, 우리 사는 동안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을 티아에게 봤다. 대한민국 어느 도시에서 오늘도 티아 같은 모습으로 사는 젊음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나아가고 싶고, 오르고 싶은 것을 위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선택하는 일. 그 선택으로 얻고 싶은 거를 위해 애쓰는 동안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녀는 오래된 연인 엘리엇과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는 이용당한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절망한다. 글을 믿고 신뢰했던 마이클에게서는 티아 자신이 '쓰임'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화려하고 매혹적인 도시에서의 삶을 꿈꾸었던 시간이 오히려 더 아름다울 정도로, 도시는 맵고 쓴맛이 강했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짠맛을 더했고, 순간적인 로맨스로 달콤하기도 했지만 역시 끝 맛은 썼다. 이제 결정해야만 한다. 계속 쓴맛을 보면서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쳐야 할지, 인생의 맛을 바꾸기 위해 틀린 것을 알았을 때 다른 선택을 해야 할지를...

 

인턴십 처음부터 기쁘게 받아들이고 제대로 해볼걸.

인내심을 갖고 헬렌을 기다릴걸.

이렇게 재미있는 친구들을 사귈걸.

처음에는 이런 모든 것들이 너무나 시시하게만 느껴졌었지만 이제 나는 이렇게 뻔하고 평범한 생활보다 더 좋은 건 없다는 걸 알았다. (469페이지)

 

맛으로 배우는 인생 경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소설이다. 다양한 메뉴의 음식들, 멋스러운 패션의 향연은 소설의 맛을 다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큰 도시로 나아가고자 하는 젊은 인생들의 몸부림이기도 하고, 경험으로만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세상살이이기도 했다. 티아가 겪은 뉴욕에서의 시간이 자기 삶을 한 단계 끌어올려 준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비록 인생의 쓴맛을 먼저 경험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녀가 다른 기준의 삶을 선택하면서 바뀔 인생의 맛을 기대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각자가 바라는 맛'을 향해 가는 것과 같을 테니까.

 

"우리 원래 맨날 망치잖아. 남들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그게 인간이고 인생의 사이클이야. 더럽게 짜증나지만 어쩌겠어. 너는 다시 위로 올라가게 될 거야. 네가 그럴 사람이란 건 나도 알아." (45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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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4-21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것도 있었지만 쓴맛을 먼저 보았군요 한번에 올라가기보다 한단계씩 올라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좋은 일에는 안 좋은 일이 따른다고 생각한 듯해요 쉽게 얻는 거라고 해야겠군요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잘된다는 것도 없지만, 그게 더 마음 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희선

구단씨 2018-04-23 00:13   좋아요 0 | URL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아요. ^^
쓴맛과 동시에 사는 맛을 배우는 듯한?
 
-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
박해로 지음 / 네오픽션 / 201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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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무속신앙이라고 해야만 이해가 조금 될 법한 이야기다. 혼이 몸의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일, 살을 맞은 사람의 기이한 행동이 보여주는 호러의 극치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시작부터 독자의 눈을 사로잡더니, 기어코 끝 페이지까지 넘기게 하는 힘을 가졌다. 무엇보다, 어쩌다 보니 이 소설을 밤에만 계속 읽게 되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을 정도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주인공의 인생 어디로 흘러갈지,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기이한 행동과 상황들의 끝을 보지 않을 수가 없어서다.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공포 영화는 못 보는데, 이 소설은 공포 영화의 활자판이었다.

 

 

다흥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조윤식은 초상집에 빠지지 않고 방문한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 관심도 없고 경조사는 특히 더 외면했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초상집에 계속 나타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남의 슬픔에 공감하려 한다면서 좋게 보기도 했고, 안 하던 짓을 한다고 의아하게 여기면서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어쨌든 그가 갑자기 왜 초상집을 찾아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윤식과 그의 숨겨진 애인이자 동료 교사인 영희뿐이다.

 

윤식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하나 있다. 존재 자체가 흉물인 새엄마 정금옥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평생 감옥에서 썩을 줄 알았던 새엄마가 출소하여 윤식을 찾아온다. 윤식의 학교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에 함께하려는 새엄마 때문에 윤식은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고 맨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그 고통을 없애려면 새엄마를 사라지게 하는 것뿐이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때 윤식의 애인 이영희는 윤식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과학적으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무속의 힘을 빌려서 윤식의 간절한 바람을 이뤄보라고 말이다. 눈까지 가리고 찾아간 산속 그들(?)의 지시대로 윤식은 모두 4번, 상갓집에 찾아가 지시받은 대로 의식을 거행한다.

 

점집에 찾아갈 때의 기분. 윤식의 바람을 들었을 때, 윤식이 영희의 조언대로 그 산속을 찾아가 비책을 듣고 왔을 때는 그랬다. 우리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는 일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들렸다. 종교를 갖고 기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일을 들어주십사 하고 기도하는 정도로 여겼다. 근데 윤식이 산에서 받아온 비책을 하나씩 실행에 옮길 때마다 누군가의 죽음은 이어지고, 그 죽음이 너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여서 더 섬뜩했다. 정말 사람의 죽음이 누군가의 기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가? 그게 가능하다면 윤식이 산으로 찾아가서 만났던 그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여기까지만 보면 윤식이란 인물이 천하의 못된 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세상 어느 하늘 아래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바라며 간절하게 빈단 말인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해가며, 무속의 힘을 빌려 가며 발을 구른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봐야할 것은 단순히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바라는 일이 아니라, 왜 그는 새엄마의 죽음을 바라게 되었는지, 누군가는 그런 바람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그런 행동으로 일어나는 일이 무슨 힘을 가졌는지, 하는 것이다. 뭐랄까.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금방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는 동안 한 번쯤은 떠올리고 바랐던 일일지도 모를 순간에 어떤 힘이 비집고 들어와 우리 삶을 난도질하는지 보게 하는 것 같은... 이럴 때 적용해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막상 간절함이 이성을 누르고야 말았을 때는 얻고 잃는 법칙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도 모른 채로 간절한 기도만 계속 하게 될 뿐이다.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 점집이라고 가볼까 하고 주저하는 순간들, 망설이다가 기어코 점집 문을 한번 두드려보기도 하는 일. 얼마나 간절하면 그럴까 하다가도, 이런 시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절망도 동시에 드는 일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기어코 한번 시도해보고야 마는 순간도 있을 테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 대로 가야만 하는 순간의 힘일 발휘하는 때다.

 

소재가 특이해서 읽으면서도 낯설고 생소했지만, 미스터리 소설로 읽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특히 이 소설이 주는 공포는 온 집안의 불을 켜놓고 잠이 들고 싶을 정도였다. 읽다가 멈추고 엄마가 있는 방으로 가서 같이 자고 싶을 정도였다. 겉으로 보면 기이한 행동이라고밖에 설명될 수 없는 일이, 어느 순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어 세상 흐름의 이치를 혼란에 빠트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상식적인 말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고, 한 사람의 인생의 어디쯤에서 시작된 일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가고 있다는 이치까지. 죽음으로 이 세상을 건너갔다고 믿는 존재들이 산 사람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저주, 혼, 빙의, 악, 살, 사탄, 복수 등. 말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장치들이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공포를 극대화한다. (원래 말이 안 통하는 상대가 가장 어려운 법. ^^) 초자연적인 현상과 극한으로 치닫는 인간의 고통이 만나 현실의 한 장면을 만든다.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관계나 하나씩 드러나는 각자의 감춰진 배경들이 소설을 더 흥미롭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너무 판을 크게 벌인 듯한 느낌도 든다. 처음에 이미 회차 계약이 완료된 드라마가 연장하는 느낌? 그러면서 바로 보일 것 같은 관계에서 자꾸 벗어나고, 더 큰 그물에 걸린 것만 같은 혼란은 계속된다. 그럴 때마다 자꾸 또 하나의 세상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헤어 나올 수 없는 것만 같고 무서움은 더 커지지만, 그만큼 늘어지는 듯한 분위기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급하게 마무리되는 듯한 결말에 좀 아쉽기도 하다는...

 

소설로 읽는 재미는 충분했지만, 공포 영화도 잘 못 보는 나에게는 눈을 꼭 감고 글자를 읽어야만 하는 것처럼 힘들었던 소설이었다. 다른 의미로 보면, 현실과 신앙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서 오는 혼란과 갈등까지 아우르는 이 소설이 저주나 공포의 근원을 묻기도 하고, 신앙이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숙제까지 남기기도 했다. 인간의 내면이 일으키는 감정들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보게 하면서,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이 만드는 공포를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장르를 만나는 호기심도 웬만큼은 충족시켜주고, 소설로의 흥미도 괜찮았다.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상황들에 자꾸만 오싹해지는 기분까지, 갑작스레 밀려오는 더위에 즐기기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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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02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데도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소설, 작품의 기운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네요, 정말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구단씨 2018-04-04 14:31   좋아요 0 | URL
읽다 보면 여기저기 좀 허술하고 부족한 느낌도 있었는데요.
공포감은 진짜 대단했었어요. (물론 제가 느끼는 기준이 그랬던 거죠. 워낙 무서운 걸 못 봐서... ^^)
밤에 읽기 힘든 소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