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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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어떤 날들. 각 단편의 주인공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들이 살아온 어떤 날 중의 하루를 꺼내어 들려주는 것만 같다. 지나간 시간이지만 기억에서 지워지지는 않고, 돌이킬 수 없어서 그렇게 끌어안고 사는 기억을 한 번쯤은 꺼내고 싶은 날. 이들에게 그런 날들의 숨소리가 건너온다. 우리 삶을 두르고 있는 일상의 굴레를 이렇게 슬쩍 열어놓는다.

 

「에트르」의 서른 살 ‘나’는 백화점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연말의 매장은 붐빈다. 밥 한 숟가락 제대로 넘길 시간이 없는 일상에서 부담은 늘어난다. 집주인이 보증금이나 월세를 올려달라고 했다. 이사를 결심하고 12월 31일 집을 보러 간다. 연말이고 누구나 포근한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 시간, ‘나’는 집을 보러 갔지만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새로 이사하려고 집을 보러 간 동네도 지금 사는 동네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너무 닮아서 놀랄 정도다. 이곳(지금 사는 동네)과 저곳(집을 보러 갔던 동네)이 다른 게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동시에 밀려드는 건, 월세나 보증금의 문제보다는 그저 ‘나’의 삶의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여전히 무겁고 버겁고 힘들다.

 

현실적으로는 대출이 불가능하고 더 벌 수도 없으니까 쓰는 걸 줄여야 했다. 그동안 잠도 줄이고 게으름 피우는 시간도 줄이고 말도 줄이고 꿈과 기대와 감정까지 줄이며 살았는데 여전히 뭔가를 더 줄여야만 했다. (12페이지, 「에트르」)

 

사는 건 왜 이리 힘들까. 이십 대의 치기 어린 마음이 무모해서 힘든 걸까? 대책 없이 서울로 상경해서 시작한 청춘이어서 그런 걸까? 그럼 이십 대가 지나면 좀 괜찮아지려나? 이제 곧 서른을 넘어서는 주인공이 보내는 지금이 그렇게 아프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이미 알아버렸지 않은가. 그건 이십 대여서가 아니라 청춘이어서가 아니라, 삶이 고단한 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환경 때문이라는 것을. 사람을 알아가고 인생을 더 배운다고 해서 달라질 거로 믿고 오늘을 버틴다는 것을. 다른 단편 속 주인공들 삶도 비슷하다. 「뒷모습의 발견」의 아내는 갑자기 사라진 남편 때문에 남편의 회사 생활과 동료들을 만난다. 그녀가 알던 남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남편의 다른 모습을 본다. 10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남편을 모른다. 그가 스스로 사라진 건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남편을 생각하면 혼란스러운 것뿐이다. 「이후의 삶」의 남자는 이혼 후 임시 거처로 찜질방을 택한다. 곧 나갈 거지만 그곳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익숙해지고 있다. 거기에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죽음의 이야기를 듣는다. 돈이 많아도 외롭다는 말은 남자에게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찜질방 남자의 말이 틀린 것도 없다. 죽음 이후의 모습조차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혼자 죽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제 낯선 일도 아닐 것이기에 말이다.

 

어느 날 자기 삶이 어떤지 돌이켜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변해가네」의 주인공 ‘나’는 그날 오래전 인생을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요양원에 들여보내는 것과 딸이 산통이 시작되는 건 동시에 이루어졌다. 마음이 급했다. 엄마를 안전하게 요양원에 인계해야 했고, 첫 출산을 하는 딸에게도 가봐야 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의 지나간 시간이 떠오른다. 현재의 그녀가 사는 모습까지 지나온 시간, 그래서 지금 행복한지 스스로 묻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그래, 이 정도면 나 지금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을까? 이와 반대의 느낌을 주는 단편이 「개의 나날」이었는데, 주인공 ‘나’는 성매매 알선하는 일을 한다. 거구의 몸으로 먹는 것을 일삼고 있다.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그는 어떤 꿈을 상상한다. 새아버지가 될 뻔한 남자의 죽음, 아주 오래전 잠깐 인연이었던 남자의 죽음을 왜 자기에게 알리는 건가 싶지만 그가 남긴 걸 찾아가라는 말에 유산을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주인공 ‘나’는 혹시 돈을 생각했던 건 아닐까? 지금 그의 삶을 바꿔놓을지도 모를? 돈은 아니었지만 죽은 이가 남긴 건 그의 삶을 바꿔놓을지도 모를 것이었다. 물론 내 생각에는 그렇다. 죽은 이가 남긴 봉투에서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가 성매매 업소의 문 앞을 지키던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줄 알았다. 서성이던 개에게 다시 오지 말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서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멀어져가는 개를 쳐다볼 뿐이다. 어쩌면 그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지만, 선뜻 그 말을 품지는 못한다. 그 말이 의미를 담지 못해서다. 현재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안도할 수 없어서다. 허기진 그 마음을 채우려 계속 먹고 또 먹었던 것처럼 그의 비어있는 속을 채워줄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다. 누구라도 그걸 쉽게, 금방 알 수 있을까? 알지 못해서 현재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각 단편 주인공들의 나이대가 다양하다. 20대부터 60대까지,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혹시 내일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바람, 노력으로 오늘을 채우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이 너무 팍팍하다. 피하고 싶은 위기는 언제나 잘도 찾아왔다. 때로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도 오늘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다르지 않은 건 여전히 존재한다. 불안한 삶. 나름 오늘을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남는 게 없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너무 익숙하다. 지금 여기, 우리 삶과 다를 게 없는 그대로였다. 현실 속 우리 모습 그대로를 담고 있다. 미래를 꿈꾸기도 하지만, 지금 눈앞의 현실이 암담해서 오늘을 살아내기에 급급한 모습. 그렇다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또 꿈을 꾸고. 그래서 무언가를 품어가면서 그 마음 내려놓지 않는다. 떨어트려서 망가졌지만 다시 주워서 품에 안아버린 케이크처럼, 떠나지 못하는 삶을 대신 떠나가라고 개에게 말하는 것처럼, 불행을 알리는 소식이 올지도 모르지만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이상하게 웃던 엄마의 표정을 떠올리면서. 케이크는 다시 사면 되고,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언젠가 자기가 될지도 모르는, 이상하지만 엄마의 웃는 모습은 아직 볼 수 있는...

 

열차가 삶의 한 시기를 지나 간이역에 멈춰 설 때, 내리지 못한 채 네모난 칸에 실려 덜컹거리는 여정을 이어갈 때마다 반대편의 삶과 새로운 바람이 불던 창 밖에 대해 생각했다. (172~173페이지, 「변해가네」)

 

그저 가볍게, 삶의 한 부분을 기억에서 꺼냈다고만 하기에는 무거운 이야기들이었다. 현실 속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아서 공감하지만, 역시 우울하고 서글픈.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는 게 우리 모두의 운명인 것처럼 여겨져서 씁쓸했지만, 또 그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내일 또 오늘과 똑같은 하루가 펼쳐진다면 그렇게 또 살아가고, 또 그날과 이별하면서 살아가겠지. 마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던 소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이고 평범하던 삶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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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이 식사할 시간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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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력이라니. 강지영이라는 작가가 원래 이런 글을 썼나? 모르겠다. 다른 작품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는 않았으니, 이 작품으로 작가 강지영을 처음 만났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아홉 편의 단편이 담긴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을 만난 순간부터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의 소설이 작가 강지영의 색깔인 것만 같다. 강렬하면서도 공포였고, 이런 공포를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되는 장면들 속의 사람들이 저절로 그려진다. 마치 오랫동안 그런 일상을 영위한 사람들의 익숙함. 천연덕스럽게 공포를 소화하는 듯한...

 

어머니의 죽음으로 알게 된, 기억에서 희미해진 과거의 사건이 벌이 되어 돌아온 표제작 「개들이 식사할 시간」은 한편의 짧은 미스터리였다. 개에게 물린 ‘나’는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개 주인의 말을 듣는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놀라웠고, ‘나’가 잊었던 시간을 불러온다. 그래, 그때 그랬었지. 하지만 그때 일어난 일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동안 잊었던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표제작과 다 비슷하다. 「눈물」이나 「스틸레토」처럼 판타지 같이 흐르기도 하다가, 「있던 자리」처럼 답답한 현실에 울부짖다가...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인간이 저지르고 있으니, 어디 다른 세상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디에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일들에 누군가의 욕심은 하늘을 뚫고, 그런 욕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균열을 만들기도 한다. 각 단편의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가진 참혹한 현실이 결말로 드러난다. 하아, 이런 삶에서 무엇을 찾아 살아가고 있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그런 비밀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는 그들의 의지가 놀랍기도 하면서...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즐기거나 끝장을 낸다. 「사향나무 로맨스」의 노파에게 젊은 청년들이 옆에 있으려고 하는 이유가 아이러니했는데, 노파의 몸이 점점 나무가 되어 가는데도 사라지지 않은 사향나무 향기는 그녀만이 가질 수 매력을 선사한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놓아버려야 할 순간일지도 모를 때, 오히려 비밀은 향기는 낸다.

 

각 단편 모두 그들이 품은 비밀을 말하지만, 그 비밀은 의외의 결말로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가장 충격적이고 아팠던 결말은 「눈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3개였던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마에 자리한 작은 눈 하나에서, 눈물이 흐를 때마다 특이한 보석이 떨어진다. 한 방울, 두 방울. 소녀의 눈물을 쥐어짜면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부를 축적한다. 소녀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으면서 소녀의 눈에서 나오는 보석의 이익금을 분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소녀에게 눈물을 얻어내려고 감금하고 폭행한다. 소녀가 한번 눈물을 흘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부자가 된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소녀의 이야기를 들은 기자가 소녀를 탈출시키고, 소녀는 기자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자가 마치 소녀를 구해준 은인 같았는데...

 

「눈물」의 소녀가 말을 안 하고 있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단편에서 보여준 결말은 그 누구의 침묵도 침묵이 아니었다는 거다. 기자와 함께 떠난 소녀가 새로 만난 세상에 적응하는 분투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예상은 한참을 빗나갔다. 소녀는 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자기의 고통을 끝내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한다. 비정한 세계를 직접 단죄했다.

 

인간은 착한가? 아니면, 인간은 악한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인간은 착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속한 현실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기도 하겠지만, 그 현실 탓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인간이 내재한 욕망과 이기심에 그 악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때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에 내몰리는 인생들이 있고, 저지른 죄를 잊고 살다가 복수를 당하기도 하는, 남의 고통에 빌붙어 먹고 사는 인간들도, 다 우리 사는 세상에 존재한다. 그들만의 비밀,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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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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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요양소에서 지내느니 감옥이 낫겠어!

정말?

 

‘폐쇄되고 자유가 없는, 당당하게 내 돈 내고 들어간 게 아니라 벌을 받으려고 들어간 곳이 절대 요양소보다 좋을 리가 없어!’라는 생각에, 이 할머니의 엉뚱한 모험에 기대가 없었다. 무료하고 심심해서 재밌는 건수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벌인 소란 정도로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읽을수록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무엇을 확인하게 된 잔인함 같은, 지금 내가 노인을 대하는 시선이 변해야 함을, 누구도 아닌 내 부모와 내가 겪고 있는 일이라는 게 쉽게 잊히지 않는다.

 

복지가 좋다는 스웨덴의 한 노인 요양소에서 다섯 명의 70대 노인이 사라진다. 편한 곳에서 요양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노인들은 규정과 규칙에 억눌린 생활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강제로 취침하고, 식사도 부실한 게 실상이다. 외출이나 산책이 자유롭지 못했고 쉽지 않았다. 요양소에서 내킬 때만 허락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잠잘 곳이 있고, 부족해도 때가 되면 식사가 나오고, 휴게실에서 장기라도 둘 수 있는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게 어디냐 싶었는데...

 

산다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 잘 알면서도 살면서 겪는 고민과 생각의 중심은 늘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어서... 막상 이 노인들의 삶을 경험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생각해보니 한 번도 그 마음을 듣고 싶어 한 적이 없다. 당장 내 문제가 아니어서 절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국가에서 노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시행하는 정책이 많은데, 개인도 노인(부모)을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많은데 뭐가 부족하다고 그런 건가 싶었다. 내가 내는 세금과 돈으로 그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뭘 더 어쩌란 말이냐고 투정 어린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나를 대입해보니, 그 생각이 바뀌더라. 내가 들어가서 살아야 할 곳이 요양소라고 하더라도, 그게 가장 최상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의 생활이 이 정도라면 나는 싫을 것 같다. 노인들이 무모해 보이는 범죄를 저지르며 굳이 감옥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물론, 아직 감옥 생활의 실체를 몰라서 막연한 기대로 감옥행을 원했던 거지만, 오죽했으면 요양소보다 감옥이 좋을 거라 여겼을까.

 

낙엽 지는 황혼기를 맞아 인생을 조금 즐겨 보고 싶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208~209페이지)

 

범죄영화와 탐정소설을 읽으며 범행을 준비하고, 무조건 훔치겠다는 것보다 잠깐 유괴하는 거라 여기며 되돌려줄 방안까지 생각하는 그 열정이 놀랍다. 실패해도 괜찮다. 이들의 목적은 범행의 성공이 아니라 범행을 들키고 감옥에 가는 거였으니까. 순박한 마음으로 시도한 절도가 어리바리해 보일 때마다, 내가 가서 머리 맞대고 같이 고민하고 싶었다. 어차피 잡혀가는 게 목적이라지만 그래도 범죄를 저지르고자 했다면 성공하는 게 더 그럴싸해 보이지 않을까? 멋지게 성공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그 당당함이 이 노인들에게 더 재밌는 외출로 남아야 하는 거니까.

 

소박한(?) 바람으로 시도한 노인들의 범죄 행각에 시종일관 웃음과 눈물이 따라온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끼어들 때마다 이들의 범행은 점점 산으로 간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여기저기 샛길로 빠지는 듯한 계획이 잠깐 한눈을 팔기도 하면서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하늘도 이 노인들을 돕고 싶었나 보다. 메르타 할머니의 다양하고 치밀한 계획이 튀어나오고, 천재 할아버지의 손놀림이 기지를 발휘하고, 갈퀴 할아버지의 연기가 빛을 내고, 스티나 할머니의 제안이 먹혀들고, 안나그레타 할머니의 통장 잔액이 힘을 낼 때마다, 이들의 범행을 응원하는 나를 봤다. 처음, 노인들이 요양소를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이유를 찾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인이라는 나이를 잊고 원하는 삶을 누려보기를 말이다.

 

내가 생각했던 노인의 삶이나, 보호자나 방문객으로 드나들었던 노인 요양소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다. 상황에 따라 나이 든 사람들을 돌봐줄 곳이 필요하고, 지금도 많은 시설이 있지만, 그런 곳이 가져야 할 자세에 경고한다.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전부가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공간이 우선이라는 것.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변화와 시도가 필요한지 고민을 남긴다.

 

말을 마친 페테르손은 잠시 먼 산을 보며 노인네들 생각을 하다가 늙는다는 것이 저런 것인가 싶어 우울하기만 했다. 늙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자신에게도 그때가 올 텐데, 그때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192페이지)

 

자주 잊고 살아서 그런 걸까. 나도 늙어가고 있는데, 육체가 늙어 거동이 쉽지 않은 순간이 올 텐데, 아직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다. 아픈 엄마를 모시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고, 아버지의 병원 생활 몇 년을 옆에서 함께했는데도, 병원에 있는 그 대상이 내가 될 거란 생각이 잘 안 드는 거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노인들이 보내는 그 노후의 모습이, 평소 익숙하게 보는 이 동네 노인들로 보였다. 요양소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잘 지낼 수 있게 보호한다고 여겼기에, 막상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진심은 들어볼 생각조차 안 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빠진 게 있었다. 그 ‘좋은’ 것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 이 노인들의 행보에서 내가 찾게 되었던 게 그 진실을 아는 거였다. 내 눈에 가려졌던 게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인지한 순간, 바로 옆에서 밥맛이 없다면서 억지로 저녁을 먹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한 움큼의 약을 먹어야 하는 일상이 지겹다고 하면서도, 약을 먹어야 하니 식사도 챙겨야 한다고, 귀찮은 일이지만 이렇게 늙어가는 게 자기 일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까. 그런데도 참 오랫동안 눈과 귀를 닫고 살아온 듯하다. 미안하게시리.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 노인들이 보내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해지곤 했다. 그저 나이라는 숫자가 늘고 오래 사용한 육체가 늙었다는 것 말고, 이분들이 나와 우리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나와 같은 사람, 몇 년 후 만날 내 모습이라는 걸 이 노인들의 자신만만한 시도와 모험에 자꾸 상기하게 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삶에서 이들에게 제외된 많은 부분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읽는 동안의 재미보다 여운이 더 크게 남는다.

 

매번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때마다 그들은 더 젊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전만큼 도움이 되는 것이 따로 없는 것이다. 조만간 노인 강도단, 아니 <힘을 얻은 노인들>이라는 예술가 단체가 크게 한탕을 할 것이다. (49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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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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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기분. 이 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 내가 느낀 분위기는 나른하고 무료한 거였다. 삐뚜름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귀찮은 일이 생기면 '그래, 그냥 한 방 쏘고 탈탈 털어버릴까?' 하는 무신경한 시선 같은. 물론 이 소설은 무료하고 나른한,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면서 감각이 없는 느낌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어느 페이지를 넘기며 순간적으로 느꼈던 기분을 말하는 거다. 데니스 루헤인의 초기 작품(우리나라 출간 기준)을 몇 편 읽었다. 상당히 몰입이 잘되고,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어떤 시선 하나만을 담을 수도 없게 진지하고 묵직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읽으려다 보니, 그동안의 작품과 사뭇 다른 느낌을 나는 '나른한 시선을 던지는 어떤 남자'를 계속 머릿속에 그리게 된 듯하다. 나른한 시선을 던지는 그 남자는 물론, 주인공 밥이다.

 

상당한 거구에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워 보이는 남자, 밥. 사촌 마브와 함께 드롭 바를 운영하지만 그 화려했던 명성도 다 옛말이다. 지금은 그저 파견 나온 직원처럼 바의 일꾼일 뿐이다. 뭔가 감추는 듯한 분위기의 마브와 밥의 과거와 전적들. 새벽 두 시마다 수금하러 들르는 갱단의 무리. 외상값을 갚지도 않으면서 밤늦도록 바를 지키는 노파가 드롭 바의 일상이다. 어느 날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발견한 밥은 자신이 데려와 돌보기 시작한다. 그 우연 같은 사건으로 뭔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별것 아닐 것 같은, 하지만 뭔가 거대하게 밥의 인생을 쥐고 흔드는 회오리 같은 어떤 것. 사회의 부조리, 돈과 권력이 목숨을 쥐고 흔드는 세상, 자신도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병, 그래서 더욱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야만은 인간이 만난 첫 여름부터 힘을 과시하고 그 이후로도 쉬는 날이 없었단다. 최악의 인간은 일상적이나 지고의 선인은 귀하고도 귀하지. (85페이지)

 

그 모든 이야기가 밥을 중심으로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이런 건가?' 싶으면 다시 저런 모습으로 이야기를 틀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밥의 말, 행동, 시선에 주목하게 된다.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결국 안개 속에서 길을 열어주는 것은 밥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야기를 기대하며 읽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과거, 혹은 비밀이 하나씩 펼쳐지면서 마지막에 다다르면 결국 우리가 봐야 할 진짜 모습이 나타난다. 보통, 사람을 보면 좋은 놈 나쁜 놈 가리게 되기 마련인데, 밥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도 그가 좋다, 정의롭다, 나쁘다, 하는 어떤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아마도 이 소설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아닌 것도 맞는 것처럼,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지나가게 하는 의연함을 담고 있어서일지도. 스릴러 소설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뒷골목 범죄 세상의 현실이 담담하게 들려오는 의아함이 더 컸다. 범죄소설이 잔인함보다 마음속 서늘함을 더 크게 남겨준 느낌이다.

 

기존에 전자책으로 출간된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Animal Rescue)」를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단편으로 먼저 만나지 못했기에 어떤 비교의 맛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밥의 매력과 드롭 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뒷골목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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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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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폴은 안 태우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 탓에 어지러웠다. 엄마네 집도 서울도 아닌 낯선 도시에서 혼자 1박을 하는 기분이 이상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하루 같았다. 홀가분해야 하는데 되레 너무도 많은 것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비로소 한국에서의 첫날을 맞이하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219페이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반소매를 입고 1시간 정도 등산을 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한낮의 등산은 역시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실컷 땀을 흘리고 나니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시리더라. 점점 해는 기울고 캄캄해지기 시작하니 그 시림은 체온으로만이 아니라 온몸에 느껴졌다. 이럴 때를 잘 견뎌야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더 크고 서럽게 다가오기 쉬울 때니까. 돌아갈 곳이 있다던가, 돌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그 추위를 덜 느낄지도 모르지만, 이도 저도 아닌 부유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온몸으로 맞이하는 시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건지 한국인만의 정서인 건지 모르겠지만, 유독 그 소속감의 무게를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어디에 속해야만 안심이 되는, 그 소속이 없으면 버려진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특히 누구의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아닌 경우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는, 어쩌면 상실감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를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뭔가, 아주 큰 뭔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기분.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 있다. 반드시 어디에 속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속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할 때 느끼는 감정도 안고 가야 한다. 임재희의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는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경계인이자 주변인으로 느끼는 고독을 그렸다. 어떤 분명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감정이었다. 법이 규정한 범위 안에서 그 신분을 드러내야 할 때 종종 찾아오는 느낌들. 어디의 누구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할 때 당황하기도 하는. 단편들 속의 주인공들 모두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감정처럼 들렸다.

 

엄마를 만나러 한국에 온 폴은 정해진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려고 하지만, 스탠바이 티켓으로 공항 근처에 머문다. 자기를 호텔에 내려준 택시 기사, 호텔에서 만난 다른 손님과의 대화로 자신과 그들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또 완전히 비슷하지도 않다는 걸 느낀다. 같은 것을 느낄 때는 안심을 했다가도, 다른 것을 느낄 때면 따라오는 이질감. 잠깐 다니러 온 그의 이런 느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을 떠나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이나, 이곳을 떠나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의 크기는 또 다르다. 「히어 앤 데어」의 동희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국적 재취득의 선택을 해야 한다. 동희는 왜 돌아왔을까. 동희가 한국을 떠날 때도 다시 돌아왔을 때도 분명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때마다 이유는 있었을 테지만,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분명함은 없었던 거다. 동희가 만난 어떤 여자의 말처럼, 어디에 사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가 더 큰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문제를 내세우기에 앞서 여전히 어느 선에서 서성이는 삶을 이어가는 게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이민자든 아니든, 여기에 살았든 아니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민자의 삶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동희는 미국에 살아도 한국에 나와 있는 지금도, 뭐가 하나는 쑥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까. 그 커다란 빈 구멍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하면 좀 나아지려나. 동희는 자신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들었다. (30페이지, 「히어 앤 데어」)

 

「라스트 북스토어」의 ‘나’는 미국에 간다. 엄마를 모시고 동생 부부를 만나러 간 거다. 남동생과 올케의 미국 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하다.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하루하루가 안쓰럽지만, 그곳을 쉽게 떠나지도 못할 것이다. 이국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 ‘나’가 느끼는 불안감은 의외의 곳에서 해소된다. 헌책방에서 만난 한국어를 쓰는 여자. 그녀의 몇 마디에 다가온 위로는 무엇이었을까. 그곳이 한국이 아니어서 그 몇 마디가 위로의 모습을 하고 다가온 건 아닐까? 「천천히 초록」의 ‘나’도 혼란스럽다. 미국에서 살았던 시간도 한국에 다시 돌아온 계기도 어정쩡하다. 다시 돌아온 이민자에게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 단편의 ‘나’를 통해 헤아리게 됐다. 무엇을 위해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게 실패의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들에게 떠남과 돌아옴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그게 실패의 원인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누군가가 선택하는 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돌아와야만 하는 상황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 안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건너다니는 사람인 경우 계속 떠도는 느낌이 아닐까? 실제로도 그런 삶일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게 떠도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생 한곳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멀게 든 가깝게 든 옮겨 다닌다. 그 대상이 물리적인 지역이든 사람과의 관계이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주변인이든 경계인이든, 이민자이든 아니든, 자기 삶을 이어간다는 건 똑같다. 누구나 겪는 상실에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다. 그저, 언제나,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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