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폴은 안 태우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 탓에 어지러웠다. 엄마네 집도 서울도 아닌 낯선 도시에서 혼자 1박을 하는 기분이 이상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하루 같았다. 홀가분해야 하는데 되레 너무도 많은 것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비로소 한국에서의 첫날을 맞이하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219페이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반소매를 입고 1시간 정도 등산을 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한낮의 등산은 역시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실컷 땀을 흘리고 나니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시리더라. 점점 해는 기울고 캄캄해지기 시작하니 그 시림은 체온으로만이 아니라 온몸에 느껴졌다. 이럴 때를 잘 견뎌야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더 크고 서럽게 다가오기 쉬울 때니까. 돌아갈 곳이 있다던가, 돌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그 추위를 덜 느낄지도 모르지만, 이도 저도 아닌 부유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온몸으로 맞이하는 시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건지 한국인만의 정서인 건지 모르겠지만, 유독 그 소속감의 무게를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어디에 속해야만 안심이 되는, 그 소속이 없으면 버려진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특히 누구의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아닌 경우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는, 어쩌면 상실감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를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뭔가, 아주 큰 뭔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기분.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 있다. 반드시 어디에 속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속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할 때 느끼는 감정도 안고 가야 한다. 임재희의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는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경계인이자 주변인으로 느끼는 고독을 그렸다. 어떤 분명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감정이었다. 법이 규정한 범위 안에서 그 신분을 드러내야 할 때 종종 찾아오는 느낌들. 어디의 누구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할 때 당황하기도 하는. 단편들 속의 주인공들 모두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감정처럼 들렸다.

 

엄마를 만나러 한국에 온 폴은 정해진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려고 하지만, 스탠바이 티켓으로 공항 근처에 머문다. 자기를 호텔에 내려준 택시 기사, 호텔에서 만난 다른 손님과의 대화로 자신과 그들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또 완전히 비슷하지도 않다는 걸 느낀다. 같은 것을 느낄 때는 안심을 했다가도, 다른 것을 느낄 때면 따라오는 이질감. 잠깐 다니러 온 그의 이런 느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을 떠나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이나, 이곳을 떠나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의 크기는 또 다르다. 「히어 앤 데어」의 동희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국적 재취득의 선택을 해야 한다. 동희는 왜 돌아왔을까. 동희가 한국을 떠날 때도 다시 돌아왔을 때도 분명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때마다 이유는 있었을 테지만,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분명함은 없었던 거다. 동희가 만난 어떤 여자의 말처럼, 어디에 사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가 더 큰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문제를 내세우기에 앞서 여전히 어느 선에서 서성이는 삶을 이어가는 게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이민자든 아니든, 여기에 살았든 아니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민자의 삶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동희는 미국에 살아도 한국에 나와 있는 지금도, 뭐가 하나는 쑥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까. 그 커다란 빈 구멍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하면 좀 나아지려나. 동희는 자신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들었다. (30페이지, 「히어 앤 데어」)

 

「라스트 북스토어」의 ‘나’는 미국에 간다. 엄마를 모시고 동생 부부를 만나러 간 거다. 남동생과 올케의 미국 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하다.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하루하루가 안쓰럽지만, 그곳을 쉽게 떠나지도 못할 것이다. 이국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 ‘나’가 느끼는 불안감은 의외의 곳에서 해소된다. 헌책방에서 만난 한국어를 쓰는 여자. 그녀의 몇 마디에 다가온 위로는 무엇이었을까. 그곳이 한국이 아니어서 그 몇 마디가 위로의 모습을 하고 다가온 건 아닐까? 「천천히 초록」의 ‘나’도 혼란스럽다. 미국에서 살았던 시간도 한국에 다시 돌아온 계기도 어정쩡하다. 다시 돌아온 이민자에게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 단편의 ‘나’를 통해 헤아리게 됐다. 무엇을 위해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게 실패의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들에게 떠남과 돌아옴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그게 실패의 원인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누군가가 선택하는 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돌아와야만 하는 상황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 안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건너다니는 사람인 경우 계속 떠도는 느낌이 아닐까? 실제로도 그런 삶일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게 떠도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생 한곳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멀게 든 가깝게 든 옮겨 다닌다. 그 대상이 물리적인 지역이든 사람과의 관계이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주변인이든 경계인이든, 이민자이든 아니든, 자기 삶을 이어간다는 건 똑같다. 누구나 겪는 상실에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다. 그저, 언제나,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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