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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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요양소에서 지내느니 감옥이 낫겠어!

정말?

 

‘폐쇄되고 자유가 없는, 당당하게 내 돈 내고 들어간 게 아니라 벌을 받으려고 들어간 곳이 절대 요양소보다 좋을 리가 없어!’라는 생각에, 이 할머니의 엉뚱한 모험에 기대가 없었다. 무료하고 심심해서 재밌는 건수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벌인 소란 정도로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읽을수록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무엇을 확인하게 된 잔인함 같은, 지금 내가 노인을 대하는 시선이 변해야 함을, 누구도 아닌 내 부모와 내가 겪고 있는 일이라는 게 쉽게 잊히지 않는다.

 

복지가 좋다는 스웨덴의 한 노인 요양소에서 다섯 명의 70대 노인이 사라진다. 편한 곳에서 요양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노인들은 규정과 규칙에 억눌린 생활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강제로 취침하고, 식사도 부실한 게 실상이다. 외출이나 산책이 자유롭지 못했고 쉽지 않았다. 요양소에서 내킬 때만 허락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잠잘 곳이 있고, 부족해도 때가 되면 식사가 나오고, 휴게실에서 장기라도 둘 수 있는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게 어디냐 싶었는데...

 

산다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 잘 알면서도 살면서 겪는 고민과 생각의 중심은 늘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어서... 막상 이 노인들의 삶을 경험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생각해보니 한 번도 그 마음을 듣고 싶어 한 적이 없다. 당장 내 문제가 아니어서 절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국가에서 노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시행하는 정책이 많은데, 개인도 노인(부모)을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많은데 뭐가 부족하다고 그런 건가 싶었다. 내가 내는 세금과 돈으로 그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뭘 더 어쩌란 말이냐고 투정 어린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나를 대입해보니, 그 생각이 바뀌더라. 내가 들어가서 살아야 할 곳이 요양소라고 하더라도, 그게 가장 최상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의 생활이 이 정도라면 나는 싫을 것 같다. 노인들이 무모해 보이는 범죄를 저지르며 굳이 감옥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물론, 아직 감옥 생활의 실체를 몰라서 막연한 기대로 감옥행을 원했던 거지만, 오죽했으면 요양소보다 감옥이 좋을 거라 여겼을까.

 

낙엽 지는 황혼기를 맞아 인생을 조금 즐겨 보고 싶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208~209페이지)

 

범죄영화와 탐정소설을 읽으며 범행을 준비하고, 무조건 훔치겠다는 것보다 잠깐 유괴하는 거라 여기며 되돌려줄 방안까지 생각하는 그 열정이 놀랍다. 실패해도 괜찮다. 이들의 목적은 범행의 성공이 아니라 범행을 들키고 감옥에 가는 거였으니까. 순박한 마음으로 시도한 절도가 어리바리해 보일 때마다, 내가 가서 머리 맞대고 같이 고민하고 싶었다. 어차피 잡혀가는 게 목적이라지만 그래도 범죄를 저지르고자 했다면 성공하는 게 더 그럴싸해 보이지 않을까? 멋지게 성공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그 당당함이 이 노인들에게 더 재밌는 외출로 남아야 하는 거니까.

 

소박한(?) 바람으로 시도한 노인들의 범죄 행각에 시종일관 웃음과 눈물이 따라온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끼어들 때마다 이들의 범행은 점점 산으로 간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여기저기 샛길로 빠지는 듯한 계획이 잠깐 한눈을 팔기도 하면서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하늘도 이 노인들을 돕고 싶었나 보다. 메르타 할머니의 다양하고 치밀한 계획이 튀어나오고, 천재 할아버지의 손놀림이 기지를 발휘하고, 갈퀴 할아버지의 연기가 빛을 내고, 스티나 할머니의 제안이 먹혀들고, 안나그레타 할머니의 통장 잔액이 힘을 낼 때마다, 이들의 범행을 응원하는 나를 봤다. 처음, 노인들이 요양소를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이유를 찾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인이라는 나이를 잊고 원하는 삶을 누려보기를 말이다.

 

내가 생각했던 노인의 삶이나, 보호자나 방문객으로 드나들었던 노인 요양소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다. 상황에 따라 나이 든 사람들을 돌봐줄 곳이 필요하고, 지금도 많은 시설이 있지만, 그런 곳이 가져야 할 자세에 경고한다.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전부가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공간이 우선이라는 것.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변화와 시도가 필요한지 고민을 남긴다.

 

말을 마친 페테르손은 잠시 먼 산을 보며 노인네들 생각을 하다가 늙는다는 것이 저런 것인가 싶어 우울하기만 했다. 늙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자신에게도 그때가 올 텐데, 그때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192페이지)

 

자주 잊고 살아서 그런 걸까. 나도 늙어가고 있는데, 육체가 늙어 거동이 쉽지 않은 순간이 올 텐데, 아직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다. 아픈 엄마를 모시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고, 아버지의 병원 생활 몇 년을 옆에서 함께했는데도, 병원에 있는 그 대상이 내가 될 거란 생각이 잘 안 드는 거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노인들이 보내는 그 노후의 모습이, 평소 익숙하게 보는 이 동네 노인들로 보였다. 요양소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잘 지낼 수 있게 보호한다고 여겼기에, 막상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진심은 들어볼 생각조차 안 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빠진 게 있었다. 그 ‘좋은’ 것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 이 노인들의 행보에서 내가 찾게 되었던 게 그 진실을 아는 거였다. 내 눈에 가려졌던 게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인지한 순간, 바로 옆에서 밥맛이 없다면서 억지로 저녁을 먹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한 움큼의 약을 먹어야 하는 일상이 지겹다고 하면서도, 약을 먹어야 하니 식사도 챙겨야 한다고, 귀찮은 일이지만 이렇게 늙어가는 게 자기 일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까. 그런데도 참 오랫동안 눈과 귀를 닫고 살아온 듯하다. 미안하게시리.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 노인들이 보내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해지곤 했다. 그저 나이라는 숫자가 늘고 오래 사용한 육체가 늙었다는 것 말고, 이분들이 나와 우리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나와 같은 사람, 몇 년 후 만날 내 모습이라는 걸 이 노인들의 자신만만한 시도와 모험에 자꾸 상기하게 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삶에서 이들에게 제외된 많은 부분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읽는 동안의 재미보다 여운이 더 크게 남는다.

 

매번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때마다 그들은 더 젊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전만큼 도움이 되는 것이 따로 없는 것이다. 조만간 노인 강도단, 아니 <힘을 얻은 노인들>이라는 예술가 단체가 크게 한탕을 할 것이다. (49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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