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올라오는 애서가들의 책장 사진을 본다. 한쪽 벽면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사방팔방 책장이 자리하고 있는 이도 있더라. 책장에 꽂은 책뿐만 아니라, 좁은(?) 집에서 자리를 못 잡고 바닥에 누워있는 책들, 책장에 이중으로 꽂혀 있거나, 그것도 모자라 방 천장과 책장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빈틈을 꽉 채운 책들이 가득하기도 했다. 맙소사! 처음에는 부러웠다. 그들이 그렇게 간직하고 있어야만 하는 책의 무게와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나에게 주어지지 못한 물리적 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어차피 내가 갖추지 못할 공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 내 옆에서 이중 삼중으로 바닥에서부터 쌓여 있는 책들을 내보내는 수밖에. 한 번씩 책을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애서가는 아니었구나. 그냥 책을 읽는 게 좋아서, 읽는 그 순간을 만족하면 되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책이 얼마나 있느냐고? 글쎄, 세어보진 않았지만, 한 500권쯤 되려나? 그중에서도 중고로 판매하려고 올려놓은 책이 100권이 넘는다. 소장한 책 300권쯤에서 1년 사이에 불어나서 그 정도다. 항상 결심한다. 책은 그저 읽는 게 좋은 것으로, 가진 책은 300권 이하로 만들기. 휴. 이게 쉽지 않다는 건 우리가 모두 아는 일. ㅠㅠ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읽으면서 애서가의 기준을 만났다. 저자의 마법에 맡기고 싶은 책이 있는 정도라면 분명 애서가일 테다. 저자의 직업은 망가진 책을 되살리는 일이다. 완벽한 복원이 아니라, 그의 상호처럼 책을 수선한다. 찢어지고 떨어져 나가고, 곰팡이가 잠식한 책들. 그 정도로 망가졌으면 그냥 버려도 될 거로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그 책을 계속 갖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시간, 기억, 감정이 담긴 책들이었다. 버린다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망가진 책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하는 게 마음 아플 정도였다. 계속 간직해야 할 그 책을 지금보다는 낫게, 제법 온전한 모습으로 소장하고 싶은데 어떻게 수술해야 하나 고민할 때 저자의 두 손이 마법을 부렸다. 약간의 흉터는 남아 있을지언정, 거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켰다. 때로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옷을 입혀 새로운 느낌으로 재회하게 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해? 보면 볼수록 부러워죽겠다. 간직하고 싶은 책을 의뢰하는 사람들도, 그 책들을 정성으로 수선하며 회복시켜 퇴원하게 하는 저자도. 마음이 닮았고, 닿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만약 이 책을 읽고 계신 분들이 나에게 책 수선을 의뢰한다면 어떤 책을 맡기실지 궁금하다.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동화책?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한 책? 부모님의 유품? 수집용 책?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254페이지)
가장 먼저는 책을 수선한다는 접근이었다. 옷이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핏이 살지 않아서 수선하곤 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책에 미친다는 게 놀라웠다. 아니, 오히려 책을 대하는 마음이 근본적인 관심까지 다가가게 하는 건 아닐까. 책을 수선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만드는 종이까지 잘 알아야 한다. 종이의 질감, 형태처럼 그 습성을 알아서 어떤 파손에 어떤 방법으로 구원해야 하는지 배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책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책을 구성하는 종이의 상처가 시작인 거다. 종이가 찢어지고, 색이 바래고, 때가 타고, 종이에 인쇄된 그림이 변형되는 일이 모두 책에 난 상처다. 그것을 하나하나 살피고 어떻게 고쳐야 할지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집도한다.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온 정신을 집중해서 작은 틈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고치다가 망한 책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죽은 환자를 살리는 의사는 없지 않은가. 오직 단 한 번의 시도로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한다.
의뢰를 받은 한 권의 책을 수선하는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모든 걸 손으로 해내야 하니, 어떻게 망가졌는지 일일이 확인하면서 한 장씩 회복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을 거라고 저자의 글로 알게 됐다. 어렴풋이 그럴 거로 생각하긴 했는데, 이 정도의 정성과 애정이 담겨야 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돈으로 주고 살 수 없는 게 의뢰인이 들고 오는 책에 스며들어 있었으니, 수선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할머니가 곱게 써 내려간 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30년이 넘고 심하게 곰팡이가 핀 앨범을 아내에게 깜짝 선물하고 싶다고, 어릴 적 아이가 애착하며 읽던 책을 계속 소장하게 해주고 싶다고, 대대로 물려주게 될 것 같은 낡은 성경책을 튼튼하게 만들고 싶다고, 이제는 보기 어려운 종이로 된 백과사전을 회생시켜달라는 것까지. 사연과 책이 너무도 다양했다. 어디 책뿐인가. 모양이 다 다른 액자의 뒤판을 고쳐달라는 의뢰는 의외였다. 테두리가 뜬 종이 책갈피를 고치고 싶다는 사람, 애정하는 연예인의 굿즈가 상해서 속상했던 이도 있었다. 그래, 이것도 책이니까.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의뢰인들 대부분이 ‘~ 이런 건 의뢰해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며 그 책과 사연을 들려주었다. 아, 정말이지, 들으면 들을수록 저자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저자가 아니면 이 슬픔을 해결해줄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의뢰인 모두에게 그 책을 꼭 간직해야만 하는, 망가져서 아픈 마음을 회복시켜야 할 이유가 있던 거다. 저자 역시 의뢰를 받고, 오랜 시간을 들여 수선하고, 의뢰인에게 되돌려 줄 때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잘 고쳐진 책을 받고 한없이 기뻐하는 그 얼굴을 보며 같이 기뻐하는 마음이 드는 것. 작업하면서도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을 듯하다. 마치 자기 책인 것처럼, 잘 고쳐서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책의 구석구석을 손보고 있었겠지? 내 책도 아닌데, 내가 고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아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뭉클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기억은 이렇게 책에 담긴 채로 간직하게 된다. 저자는 그렇게 기억된 순간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저자의 손길이 돕는다. 새것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
찢어진 종이를 붙이고, 무너진 책등을 바르게 세우고, 사라진 조각을 채우면서 책이 잃어버렸던 기억을 회복시켜 주고, 새로운 커버나 지지대, 혹은 케이스를 만들어주며 책에게 새로운 시간을 약속하다 보면 사람의 인생처럼 책에도 한 권 한 권 각자만의 책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사연들과 파손된 책과 주인의 추억, 그 책이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165페이지)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까? 점점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 책마저 전자책이 대신하고 있다. 책이 아니어도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종이책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미래의 어느 날에도 책장을 넘기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오랜 세월을 견디려면 종이책도 튼튼해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사람의 손길이 닿는 종이의 수명은 어떻게 보관하고 돌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너무 많이 읽어서 책의 귀퉁이가 닳았거나, 잘못 보관해서 틀어졌거나, 약한 접착으로 낱장이 되어버렸거나. 책이 훼손되는 이유도 너무 많지만, 망가져 가는 책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저자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 닳고 찢어지고 분리되는 걸 보면서 아플 독자의 마음도 같이 치료한다.
어떤 기록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퍼져서 같은 감동을 만들기도 한다. 저자에게 의뢰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들의 사연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다른 경험으로 같은 감동을 알게 하는 게 사람의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가 벽의 달력을 찢어서 뒷면에다가 방송에서 나오는 요리의 레시피를 흘려 적는 걸 볼 때마다, 저걸 언제 한번 다 정리해서 노트로 만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만이 낼 수 있는 손맛을 기록해두고 싶기도 했다. 마음만 그렇지 여전히 나는 그 마음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저자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게으름을 조금은 다그치고 싶어진다. 읽으면서 자꾸만 소박한 내 책장을 둘러보게 된다. 이 책 중에서 나는 어떤 책을 간직하고 싶은지, 혹시라도 사라지면 가슴 아파질 책이 있는지, 잘 보관했다가 누구에게 주고 싶은 책은 있을지...
의뢰인의 이야기 사이 사이에 책 수선가인 저자 이야기가 채워져 있다. 원래 순수미술과 그래픽을 전공하던 저자는 미국 유학하였을 때 이 분야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책 수선 일을 하며 좀 더 깊게 이 분야를 체험했다. 학교 지하의 책 보존 연구실에서 보낸 3년여의 세월이 오늘 저자가 이 일을 더 의미 있게 하는 발판이 되었으리라.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칼질, 풀질, 종이의 특성을 이해하면서, 도서관의 많은 책을 차곡차곡 수선해오면서 쌓은 경험이 이 작업의 섬세함까지 갖추니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져온 이의 능력이겠지. 듣다 보면 책 수선이라는 게 간단하지 않았고, 그 범위가 넓었다. 종이에서부터 종이를 바탕으로 파생한 많은 것이 저자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어쩌면 이 책 수선의 진짜 감동은 내가 직접 의뢰하고 고쳐진 책을 돌려받는 순간을 경험하지 않으면 다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 책에 담긴 많은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책에 시간과 추억과 감동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나는 책 수선은 책이 진화하는 방법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원본의 외형과 아주 똑같지는 않을 수 있지만, 비록 원본에는 없던 다른 구조가 덧붙을 수도 있지만, 파손된 부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서 다가올 앞으로의 시간들을 잘 견뎌낼 수 있게,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만드는 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은 수선을 통해 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271페이지)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죽어도 놓지 못할 한 권의 책을, 이 많은 책을 꼭 소장해야 하는 이유도 찾지 못했다. 여전히 책을 사고 읽고, 되팔거나 기증하며 책장에서 내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책을 아끼고 사랑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자를 찾은 의뢰인들이 쓸어주고 만져주고 고쳐주면서 아끼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그저 읽는 그 순간이 더 애틋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나에게는 왜 이런 감동을 주는 책이 없을까 아쉽고 서운했다.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어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간직하고 싶은 책이 없다고, 쉽게 책을 사고 내보내고 한다고 해서 책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므로, 지금 이 정도의 마음도 썩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혹시 모르지, 언젠가 심하게 훼손된 책을 들고 저자를 찾아갈지도. 이 책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고 말하면서 간절한 회복을 의뢰하며 어떤 시간을 부르고 있을지도. 수술이 잘 된 책을 바라보며 흐뭇해할 내 표정을 상상하는 일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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