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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평점 :
한밤에 요기를 느껴 일어났을 때 깜짝 놀랐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던 엄마를 봤을 때는 무섭기까지 했다. 혹시 정신을 놓은 건 아닐까 싶은 두려움에, 조심스럽게 물어봤을 때 들려온 대답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이렇게 아픈 바에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내 몸에 붙어 있는 다리가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괴로워 죽을 것 같다고. 몇 년 전부터 엄마를 괴롭혀온 무릎은 시술을 받은 다음에도 아무 일도 없던 때로 돌아오지 못했다. 통증은 계속될 것이고, 회복되어도 자연스럽지 못한 걸음을 걷게 될 테다. 회복이 더디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본인의 마음은 마냥 긍정적이지 못했던가 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화장실에 드나들 수 있었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급할 때 속옷을 버리는 건 다반사였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우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 몸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서글프다는,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게 미안하고, 앞으로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 내가 건네는 괜찮다는 말은 엄마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다. 나 역시 엄마를 괴롭히는 통증을, 마음의 고통을 다 알지 못했던 거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환호성을 지를 때 저자에게 찾아온 사고는 불행과 불운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기분도 좋고 달도 너무 밝아서, 좋은 사람들과 걷고 싶어서 올랐던 그 다리에는 왜 난간이 없었을까. 많은 사람이 걸었어도 괜찮았는데, 왜 난간이 없어서 생긴 사고는 나에게 왔을까. 왜 사고 수습은 이렇게 두서없이, 책임 없이 진행되어 나를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놨을까 싶은 원망. 그런데도 눈앞에 놓인 시간을 살아가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재활에 모든 것을 바쳐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간절함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편한 몸을 적응하게 하는 게 재활이라고 인정해야 했다. 말은 쉽다. 어쩔 수 없다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바로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이 불행이 왜 나에게 와야 했는지 따져 묻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내 발가락 끝을 움직여보려 안간힘을 쓰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너져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일은 고단했다. 가장 힘든 일은 수시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이었다. 통증의 강도를 계산해 보지만 의미 없다. 내 몸에 칼을 쑤셔 넣는 것 같은, 한참을 견뎌야만 그나마 조금 사그라드는 고통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통증을 조금이라도 잊으려면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하지만, 집중하는 일에도 어김없이 고통은 끼어든다. 그러니 온전히 고통을 잊을 수도 없는 거다. 그래도 글 쓰는 일에 몰입하는 집념은 저자가 작가라는 걸 증명하는 듯하다. 전에는 소설을 쓰는 이였다면, 이제는 소설에 머무르지 않는다. 장애를 가지고 휠체어를 타는 일상이 주는 불편함을 말하는 ‘입’이 된다. 겪어보지 않으면 다 알지 못할,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이유도 분명했다. 살아가야 했고, 남은 생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채워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며 일상을 함께하는 엄마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온 똥을 뭉개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린다.’(9페이지)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들려왔던 건,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오늘이었다. 달라진 삶 속에서 겪은 것을 들려주는 입이 되어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소설만큼 타인의 공감을 이루는 글로 모두에게 전하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이면서,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에, 누구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음을 여기서 확인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는 일. 친구들을 만나고 음식점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두 다리로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틈을 넘어 안전하게 지하철에 오르고, 예매한 좌석에 편히 앉아 뮤지컬을 관람하는 일이 저자를 비롯한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애써야만 하는 일이었다. 휠체어를 탄 이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기는 어려웠다. 계단을 휠체어로 오를 수도 없었거니와 이들에게 공간을 내어줄 음식점도 없었다. 극장에서 흔하게 보던 장애인석이 전혀 관리되지 않은 채로 입장 불가 상태인 건 무슨 이유인지, 뮤지컬 한 편 보려고 지하주차장과 객석을 오가던 날의 이야기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었다.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 오르는 여정 역시 험난했다. 읽는 내내 등에 땀이 흘렀다. 저자의 문장이 그리는 장소와 상황에 나의 시선이 그대로 꽂혔다. 휠체어를 타고 끙끙대며, 많은 이의 시선 속에서 그 난관을 헤쳐 오르려고 발버둥 치는 내가 그 안에 있었다. 혼자서 겪는 고통으로도 모자라, 사회가 만든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보건소에서 대여해온 휠체어에 엄마를 태우고 칼국수를 먹으러 집을 나선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엄마가 탄 휠체어를 밀면서 15분 만에 도착했다. 울퉁불퉁한 인도는 휠체어의 속도를 늦췄고, 뒤에서 미는 힘을 배로 증가시켰다. 인도와 인도 사이의 높이는 있는 힘껏 휠체어를 밀어야 앞으로 나아갔다. 두 번의 보행자 신호를 건너는 동안에는 휠체어를 밀면서 뛰어야 했다. 보행자 신호가 이렇게 짧았다는 걸, 이 길로 다니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일이다. 이 겨울에 땀이 날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칼국수 가게에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휴. 일단 한숨 한번 쉬어주고 테이블 위에 차려진 칼국수를 먹는데, 참 고되더라. 가는 길에 기진맥진 힘이 다 빠진 터라,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이게 무슨 맛인지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로 허기진 배만 채웠다. 그러고 나니 저자가 느낀 불편함과 고통에 조금이나마 닿은 느낌이었다. 뮤지컬 한 편 보겠다고 건물을 몇 번 오르내리면서 지치고, 지하철 한번 타는데 승강장 사이의 틈새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막 차려진 음식이 아니라 배달된 음식으로 대신해야 했던 모임까지. 안간힘을 써서 버텨온 시간에 이렇게 아픈 일상을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리가 함께 알아가야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
그 시간이 아프기만 한 것도 아닐 테다. 포기할 수 없는 일상, 삶 때문에 이 글은 의미 있다. 거기에 저자가 해야 할 말이 늘어났다. 본인의 삶이 다시 시작되었기에, 저자를 지켜보고 도와주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라도 이 글은 빛난다. 엄마는 여전히 저자의 손과 발이 되어 옆에서 도와준다. 어린 조카는 고모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조심하라고 말할 줄 안다. 소설의 출간을 누구보다 기뻐했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휠체어를 타고 만나는 친구들에게 전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지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여전히 세상과 사회가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살아갈 것이라고, 저자를 아끼고 보살펴주는 사람들 때문에 이 삶이 가치 있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쓰는 글을 앞으로도 계속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소설가가 아니라 ‘쓰는 사람’으로, 결국 우리는 극복하면서 살아갈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해줘서 말이다. 아마 나는 다 모르겠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결코 같은 크기의 고통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갈 테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타인에 공감하는 삶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
나아진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어진 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33페이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보장되지 않은 것을 배우겠다는 무모함에, 몸이 불편한 엄마도 챙겨야 하고, 마무리되지 않는 서류 확인에 피곤했다. 쉬는 기간 없이 바로 다음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우습게 여겼는데, 몸이 신호를 보내는 걸 무시했다. 진짜 아픈 건지 뭔지 멀쩡하던 치아에 통증을 느끼고, 마지막 근무를 하던 날부터 오늘까지 지독한 몸살에 시달리고 있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며칠을 절망하고 원망하며 보냈을 것 같다. 부끄럽게도, 왜 순탄하고 편한 일상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면서 나이를 잊은 투정을 부렸겠지. 더는 누구 탓을 하면서 나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나아가는 인간이기에, 하나씩 차근차근 바라보면 해결되는 것도 있겠지. 저자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듯, 누군가의 어려움을 보지 못하는 사회도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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