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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누수 일지
김신회 지음 / 여름사람 / 2023년 6월
평점 :
‘갑자기 집에 물이 새기 시작했다.’
이 한 마디로 이미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똑, 똑, 똑. 누군가 내는 소음은 아니었다. 살펴보니 갑자기 거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 이미 젖어서 내려앉은 천장 벽지와 바닥은 적신 물 때문에 받쳐놓은 그릇. 한밤중에 발견한 게 문제라면 문제다. 나는 이미 이 상황에서 저자에게 빙의되었다. 잠을 잘 수 없는 건 당연했고,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머리카락이 줄줄 빠지기 시작했다.
밤이라는 시간이 문제다. 이걸 발견했을 때 바로 문제 해결의 시작을 달려야 하는데, 이 늦은 시간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부터 문제였고, 밤새 물 떨어지는 걸 보고 그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였다. 아파트 같은 경우 천장에서 물이 샐 때 거의 윗집의 문제인데, 윗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이미 아는 상황에서 말도 섞고 싶지 않을 때 더 큰 문제가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저자 역시 윗집이 이사 왔을 때부터 안 좋은 대면을 했고, 그러다가 누수까지 발생했으니 더 껄끄러웠을 테다. 아, 저절로 상상된다. 안 그래도 엘리베이터에서조차 마주치기 싫은 사람과 이 민감한 문제로 얼굴 보고 대화해야 한다는 게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도대체 얘네는 뭘 했기에, 어디에서 이렇게 물이 줄줄 떨어지게 하는 거야!
고요한 일상에 일어난 이 일은 단순히 ‘누수’라는, 물이 새니까 안 새게 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누수를 발견한 순간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고, 이게 해결될 때까지 몸과 마음이 불편해야 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짜증이 난다. 어쩌랴, 이미 벌어진 일. 일단 해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저자의 위층은 이미 이사 오기 전부터 갈등을 일으켰던 관계라 원만한 대화가 되지 않았다. 우리 집 천장이 샌다고 말했는데도, ‘그래서 뭐?’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과 좋은 대화가 될 리 없다. 적어도, 우리 집 때문에 다른 집에 피해가 생겼다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게 먼저 아닌가. ‘그래, 네가 하는 말 알아들었어. 그러니까 가 봐.’ 뭐 이런 분위기로 말하는 상대와 계속 마주하는 사람이 있을까? 피해자는, 피곤하다. 원래대로 되기 전까지 집에서 매일 그 피해를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게 스트레스다. 빨리 마무리 짓고 이 문제를 더 생각할 일이 없어야 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이걸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피해를 준 이가 해결해줘야 하는 거다. 그래, 이게 문제였구나. 내가 아니라 누군가 해결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더 짜증이 나는 거였구나.
뭐,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저자의 집에 생긴 누수가 해결되긴 했지만, 그 해결 과정에서 겪었던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인간의 심리도 알게 되었고, 원만하게 해결이 되지 않을 때 어떤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도 배웠다. 그 시간 동안 자기를 발견하는 의미도 있었다. 난데없는 누수가 일상을, 삶을 확 바꿔놓은 거다.
몇 년 전부터 SNS에서 자주 보이는 말이 있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조금 어른이 된다고 믿는다. 알고 싶지 않았던 걸 알게 될 때,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걸 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쌓여 연륜이 된다. 어쩌면 이번에야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105페이지)
골치가 아픈 일에 일상이 평온하지 못했을 텐데, 성난 파도가 밀려와 물을 한 바가지 퍼붓고 가듯 다 젖어있던 순간에 새로운 생각이 파고든다. 글을 쓰는 이가 글을 쓰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사건은 발생했다. 일상의 위기는 쓰지 못하던 날들에 불을 붙인다. 아마 분노의 순간을 가라앉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나중에 더 크게 당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매일 시끄러웠던 누수의 과정을 기록한다. 마음이 급해 두서없이 써 내려가도 그걸 확인할 사이도 없었다.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모든 상황과 사람에게 화가 났을 테니까. 하지만 윗집과의 누수 분쟁을 해결하는 동안 깨닫는다. 윗집을 탓하던 모든 순간을 돌이켜본다. 내가 꼭 좋은 이웃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내가 정말 피해자인가, 하는 물음은 그동안 미처 보지 못한 나를 마주하게 한다.
누수로 시작된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일로 변하면서, 오늘을 사는 한 사람의 또 다른 일상이야기가 된다. 글을 쓰는 게 좋아서 업으로 삼고 먹고 살아왔는데 쓰지 못하던 시간을 힘들어했던 순간은 잊힌 듯하다. 신경 쓰이는 누수 문제에 전투적인 자세로 변하고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게, 오히려 글 쓰는 일상으로 전환된 거다. 누수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일상의 모든 순간을 불러온다. 혼자 사는 여성 가구여서 과거에 겪었던 일이 생각나면서, 이럴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생각이 퍼진다. 반려견을 돌보며 살기에 누수 문제는 저자 혼자만을 위한 일이 아닌 게 된다. 말 그대로, 집에 누수가 되면 인생이 누수된다는 저자의 외침이 글 곳곳에 묻어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생이 물에 젖고 축 처져 있을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나는 건 왜냔 말이지.
저자가 아니라 읽는 내가 전투적으로 되어버렸다. 성격 탓인지 속이 좁아서 그런지, 만약 내가 사는 집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좋은 말 안 나간다. 그래, 나 예민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 자체부터 처리 과정, 마무리되었어도 가라앉지 않을 짜증이 내 마음에 가득하다. 혼자 사는 단독주택에 누수가 생겼어도,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 해결해야 할 주인이었어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인데, 누군가 해결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저자가 내용증명까지 보내던 순간에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피해자의 피폐해진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가해자에게 더는 대화할 의지가 생기지 않으니, 서로 얼굴 보면서 언짢은 말 오고 갈 필요 없이, 그래, 법으로 해결하자, 싶었다.
아니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런지, 그렇게 외치던 법만으로는 마음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곳곳에서 끼어든 생각들은 그동안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돈 때문에 힘들었는데, 돈이 생기고 집을 마련하고 보니 이 변화에 안심하지 못하는 인간이, ‘나’였던 거다. 집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생기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살게 된 것을, 살면서 점점 선택의 순간이 많아지는 것을, 그때마다 얼마나 잘 선택(?)하고 옳게만 살아왔는지 되짚는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경험과 시간이 쌓일수록 직관에 따르는 게 뒤탈이 없다. ‘해야 할 것 같은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마음의 소리’는 직관적인 선택이다. 이성적인 판단의 기준이 ‘세상’이라면, 직관적인 선택의 기준은 ‘나’. 내가 이제껏 쌓아온 경험과 시간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일은 고집이나 뒤처짐이 아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으로 만들어온 과학을 존중하는 것이다. (178페이지)
앞으로 사는 동안, 지금보다 더 많은 문제를 마주할 거고 그때마다 해결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뭐, 모르면 모른 채로 살아가는 인생도 좋긴 하다만, 뭔가를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저자의 이야기로 새삼 확인한다. 항상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그게 아니니까 고민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는 거겠지. 그때마다 또 생각하게 될 테다. 이게 맞는 건지, 이 마음을 향해 가는 게 옳은 건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은 건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애써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선택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선택을 나무라지는 말자. 누구의 선택이든, 왜 그랬냐고 핀잔을 주지도 말자고.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고, 당신은 언제나 피해자였다고, 당신의 인생은 완벽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얼마나 될까 싶어서 말이다. 어떤 순간은 내가 선택해서일 수 있고, 어떤 인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놓여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얼마나 나이를 더 먹고 많은 일을 겪어야 어른이 되는 건지, 인생의 매 순간 다 잘하는 걸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이 의문은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도 있었고, 지금도 가끔 나를 멍 때리게 하는 생각인데, 이제 확실히 알았다. 내가 앞으로 더 많은 일을 어떤 식으로 겪는다고 해도, 언제나 ‘다 잘하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거고, 항상 ‘옳은’ 선택만 하지도 못할 거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튀어나와 나의 인생에 누수를 만드는지 모른다는 거다. 몰라도 되는 삶은 안락할 수 있지만, 그게 꼭 만족스럽고 부러운 인생이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이 너무 순조로운 것도 마냥 좋은 인생은 아닐 것만 같은 이 이상한 느낌은 뭔지. 아버지의 병원 생활 몇 년은 다음에 이어지던 엄마의 병원 생활에 당황하지 않게 해줬다. 몇 년의 병원 생활과 그로 인해 처리해야 했던 많은 일을 발품 팔아가며 해결하다 보니, 처리 담당자보다 더 많이 알게 되어 오히려 내가 그 직원에게 알려주는 웃픈 일도 있었다. 최근에는 시골집의 오래된 땅 문제로 골치가 아팠는데, 그 문제 역시 여기저기 확인하며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이 나의 인생 경험치를 ‘+1’ 해줬다.
오래 묵었거나 갑자기든 튀어나와 일상을 지치게 했던 이런저런 일들, 피해갈 수도 없고 마주쳐야만 했던 일을 또 그렇게 해결하면서 하나씩 건너가다 보니, 적어도 이제 같은 일에는 더 당황하지 않게 되겠지 싶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짜증은 가라앉고, 순서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더라. 그래, 그거면 됐지.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도 없다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겠어 하는 마음.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치며 단단해지는 어른’(105페이지)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금도 겪고 있다. 이러다가는 죽기 전에는 어른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겠나, 어른이 되겠다고 계속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면 또 그렇게 살아가야지 뭐.
뭐든 의심부터 하고 나의 피로함을 앞세워 날을 세웠던 것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이야기에 내 일상이 얼마나 각박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세상을, 사람을 조금은 더 믿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살아가고 싶어지게 하는 글이었다. ‘누수 때문에 죽을 것 같았는데, 누수 때문에 결국 살았다’라는 작가의 마음을, 딱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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