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가 그랬던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자기 이야기를 한번 써보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이 한 마디가 계속 생각나는 건,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감정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몇 편을 접하면서, 그녀의 작품이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흡수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경험한 그대로 사실대로 적어야만 했는지 읽으면 저절로 느끼게 된다. 이건 그녀의 이야기이고, 그녀가 느낀 그대로 적어내려 애쓴 흔적이며, 그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이면서, 그녀가 작가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말이다.

 

1952년의 어느 여름, 그녀의 열두 살 일요일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때렸으며, 심지어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치면서 낫을 들었다. 공포의 순간,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날의 사건은 그대로 끝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탁에 앉는 부모. 흔한 부부싸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렇게 행동했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의 일은 열두 살의 아니 에르노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부끄러움』 117페이지)

 

'부끄러움'이라는 제목에서 인간적이지 못한 인간의 행동을 떠올렸다. 흔히 어떤 행동이나 말투를 보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혐오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 말이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할 때는 대개 그런 순간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가 전하는 부끄러운 순간은 충격이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삶의 곳곳에서 묻어났던 어떤 감정이 생각났다. 부유하지 못한 우리가 세상에 부딪히면서 느끼는 순간순간들 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며 싸우던 그때. 아마도 그녀 가족이 중산층도 되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계층이라는 자각에서 그녀의 부끄러움은 시작된 것 같다. 싸우다가 자기 아내를 죽이겠다고 낫을 손에 휘두르는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트라우마가 된 건 아니었을까. 특히 그녀가 공립학교가 아닌 기독교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생활 수준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던 순간 그 부끄러움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기독교 사립학교는 그녀와 다른 아이들 사이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게 했다. 결국, 가난하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부모가 부끄럽고, 그런 부모가 자기 존재의 뿌리라는 게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 거다.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지만, 소녀스럽고 괜찮은 외출복을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 우아하고 예쁘게 자랄 거라는 긍정적인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사람들의 시선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아름다우며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하는 대상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게 그녀에게는 상처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버지와 둘이 떠난 여행지에서도 그녀의 부끄러움은 계속됐다. 여유롭게 여행 준비를 하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부족함에 시달렸다. 때가 낀 운동화를 신고 계속 다녔고, 넉넉한 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에 가서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했고, 우아하게 식사할 줄 몰랐다. 비슷한 또래의 여행객에게서 매 순간 다른 점을 볼 때마다 그녀는 좌절했다. 자기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배경을 가졌고, 또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갈지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게 그녀에게 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녀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근원이 시작된 그곳에서부터 이어져온 부끄러움이 사라질 곳이 있던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137페이지)

 

열두 살의 그녀가 체험한 1952년은,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리 부유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전쟁 후에 안정적인 나라가 얼마나 되었으려고.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부와 가난은 뚜렷하게 구분되기 마련이니, 그녀 가정의 가난이 쉽게 변할 환경도 아니었던 거다.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테니, 그리 아파하거나 차별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번 눈에 들어온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경험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그 체험의 감정을 그녀는 오랜 세월 담아두고 살았다. 부끄러움은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으며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년이 된 그녀의 어느 날, 그녀는 1952년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낸다. 오랜 세월 그녀를 부끄럽게 했던,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그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자기의 기억을 꺼내면서도 객관적인 그녀의 감정은 때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이기에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인간이기에 가능하고 허용될 것 같은 그 주관적인 느낌을 그녀는 철저히 배제하며 적었다. 그 순간의 상황이나 현상에 감정을 넣지 않는다. 오랜 전의 기억을 꺼내면서 추억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와서 이 기억을 꺼내놓아야만 했던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져서다. 이런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기어코 이걸 써 내려가지 않으면, 이 순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자기 존재의 불편함을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하며 넘어서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 한 번쯤은 찾아올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옥죄며 단단히 묶어놓고, 어떤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살아왔기에 완전하지 못했던 순간을 다시 마주할 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하게 세상으로 보게 했던 기억에, 지금 그 기억과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결국은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에 몸부림칠 때.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언젠가 한 번은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만 같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는 말과 기억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게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글이 더 충격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다들 비슷하게 경험하는 어떤 감정과 충격들일 텐데, 그 비슷한 경험과 영향에서도 비슷하지 않게 드러내는 방식들. 누구는 해냈고 누구는 해내지 못한 채로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차이를, 그녀는 이렇게 통과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뿌리를 수치스러워했던 기억에서 벗어났다. '나는 기어코 이렇게 쓰고 말았어.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 이제 벗어날 수 있어서 홀가분해. 이렇게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냈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 You win!

 

전작들에서와 다르지 않은 그녀의 쓰기 방식이 가슴에 파고든다. 『단순한 열정』에서 사랑의 절절함을 목 놓아 우는 것처럼 기록해내더니,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서술하더니,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기억을 들추며 비루하며 수치스러웠던 솔직한 기억을 폭발시키는 듯하다. 그녀다운 글쓰기 방식이 혹시 언제 변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 방식을 끝까지 고수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일기처럼, 기록처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느낌을 얻고 싶어서다. 아무리 솔직해도, 아무리 객관적으로 쓴다고 해도, 이렇게 자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은 부족한 우리들일 테니까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번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는 게, 아직은 그녀의 작품을 가까이하고 싶은 이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05-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과 얼마전에 이 책이 나온 걸 알게 되었는데 구단씨 님은 벌써 읽고 이렇게 근사한 리뷰를 쓰셨네요. 역시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 좋아요.
:)

구단씨 2019-05-30 14:29   좋아요 0 | URL
<세월>과 <사진의 용도>는 읽는 중이라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 <단순한 열정>은 좋아하는 글이거든요.
이번 <부끄러움> 역시 짧은 문장 읽으면서 숨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더라고요.
이제까지 읽은 그녀의 글 중 가장 있는 그대로, 솔직한 문장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레삭매냐 2019-05-3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나온 책의 재개정판
이더라구요.

구판으로 도서관에서 한 번 봐야겠네요.

구단씨 2019-05-30 15:5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기존 출간작을 몰랐어요.
번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의 글을 만나는 데는 구판 신판 구분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
 
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이었던가. TV로 본 어떤 남자는 하루를 버티는데 26알의 약을 삼켜야 한다고 했다. 여기가 아파서 이 약을 먹으니 부작용이 생겼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다시 저 약을 먹고, 저 약을 먹고 생기는 또 다른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을 먹다 보니 그렇게 많아졌다고 한다. 약이라고 하면 몸의 독을 빼는 데 쓰는 거 아닌가? 그 독을 빼기 위해 먹은 양은 몸속에 또 다른 독을 만들고, 그 독을 빼려고 또 다른 약을 쓴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지만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내 독과 약의 엎치락뒤치락, 흡입하고 쏟아내고.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들어온 독을 내보내기 위해 먹는 약, 그로 인해 쌓이는 독을 내보내는 일의 반복. 우리 몸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틸 것이다.

 

한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다.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의료진의 추측이 있지만, 사실 화자인 ‘나’는 그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뿐이다. ‘나’가 눈을 뜬 곳은 3인실 병실이었는데,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는데, ‘나’는 점차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독을 다스리던 남자 조몽구의 이야기를 쓴다.

 

함부로 손대기 어렵기도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게 독이 아니던가. 음식에서, 자연에서 만나는 동식물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독은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 독을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사는 남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그 자신이 지닌 독의 존재를 조몽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는 아버지(실은 할아버지에서부터)로부터 이어져 온 독과 그 해독을 위해 존재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가진 독의 근원, 독을 향해 손을 뻗는 일, 독에 관한 관심 같은 것을. 어머니가 그렇게 해독하려고 애쓰던 모든 상황을 지켜본 그로서는 이 운명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두통마저 소화하려고 애쓴다. 두통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등장한 삼촌 조수호는 그가 독에 가까이 가는 다리가 된다.

 

소설에서 줄곧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한 가지 정의로 향해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독이면서 약이라고. 그렇게 접근하면 소설 속 인물들이 가까이하는 독은, 독이면서 약이다. 그들은 식물에서 찾은 독으로 연구와 실습(?)을 한다. 독과 독이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떤 독이 서로 만났을 때 강해지는지 또는 약해지는지, 독이라고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용할 때 약이 되는지 직접 독에 닿으면서 확인한다. 온갖 꽃, 동물, 광물에서 얻는 독으로 인간의 몸이 반응하는 것 역시 확인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 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하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을 탄다.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100페이지)

 

“삼촌도 독이 무서웠어?”

“그럼 무서웠지. 늘 무서웠지. 세상도 무서웠어.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198페이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식물에 독이 있다는 것인지 놀랍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이곳의 구석구석에 자리한 위험을 감지하게 되기도 한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안전(?)할 수 있지만, 한번 알게 되면 그 위험을 우리는 또 어떻게 이용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그 독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조몽구의 엄마는 아들의 두통을 낫게 하려고 독에 손을 댄다. 어릴 적부터 병치레했던 자경은 자해를 일삼는다. 자경의 오빠 정우는 오래전부터 약에 중독되었던 때가 있다. 군대에서 만난 광수는 아버지가 술로 살아왔고 술로 죽었다. 결벽증에 걸렸던 소화는 페인팅에 참여하면서 독의 변화를 확인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평범하지 못한 삶을 가졌고, 그 시간 동안 독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 안에 조몽구가, 그 역시 독에 감염되었고, 그 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있다. 독과 약을 동시에 품게 된 거다.

 

‘나’가 서술하는 조몽구의 인생은 한마디로 독과 약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어디 조몽구뿐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과 닮지 않았는가? 소설은 독과 약의 적절한 사용을 시사하면서 독을 독으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독은 단지 물질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 역시 들려준다. 인간의 분노와 욕심, 이기심, 공포, 어긋난 신념 같은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것 역시 독과 약이 같이 작용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를 일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듯이. 어느 한 곳, 한 사람에게 머문 게 아닌 거다. 물질과 정신에 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상 모든 일에 스며들어 우리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지켜보게 한다. 모든 물질은 독이고,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고.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분한다는 정의를 이렇게 확인한다.

 

대체 독이 뭐야? 그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몸 안에 들어와 생체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게 독이야. 몸에 꼭 필요한 호르몬, 비타민, 히스타민, 세로토닌 같은 생물활성물질도 내부에서 과도하게 분비되거나 외부에서 대량으로 투여되면 독이 된다는 걸 너도 모르지 않잖아. (467~468페이지)

 

“모든 물질은 독이며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별한다.” (177페이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그들이 독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와 과정을 보면서 낯설지 않았다. 그 ‘올바른 용량’을 지키기가 어려워 우리는 극단적으로 독과 약으로 치닫는 거 아닐까 싶다. 살아가다 보니 피할 수 없는 독의 세계의 혹독함에서 약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만난 인물들 역시 독과 약, 극과 극을 오가면서 대립하기도 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다다르는 지점이 그 ‘올바른 용량’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약에 가까워지는 경우보다 독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계속 보여줄 뿐이다. ‘해독과 정화’를 마지막 장에 배치하면서 ‘해독’보다는 ‘정화’의 삶으로 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참 철이 없을 때는 이런 상상을 하기도 했다. 혹시 나는 어디서 데려온 아이가 아닐까, 우리 진짜 부모는 저기 어디서 굉장한 부자로 사는 분들이 아닐까,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런 사람이 내 부모는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너무 어렵게 자라던 시절의 상상 같은 일이기도 하고, 정말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때 막연하게 떠오르던 동화 같은 일이다. 조금 더 자라서는 뉴스에서 보던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저지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때도 생각했다. 부모가 되는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다고, 혹시 어느 나라에서는 부모 자격시험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고. 부모는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당연하게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를 알아 간다는 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146페이지)

 

내가 상상만 하던 일을 이야기로 내놓은 작가가 있다. 놀랍기도 했지만, 어떤 내용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채워줄까 하는 기대가 더 컸다. “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이 소설은 이미 첫 페이지를 열게 하는 마법을 부렸으니까.

 

미래의 어느 시대.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국가가 보호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생겼다. 아이들은 이 센터에서 같이 먹고 생활하며 자란다. 한 마디로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주는 양육 공동체가 된 거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부모 선택을 못 하면 기관을 나가야 한다. 기관을 나가기 전까지 아이들은 두 가지 결정을 한다. 양부모를 만나서 나가느냐, 아니면 이대로 스무 살을 채우고 나가서 센터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회생활을 하느냐. 이게 무슨 차이인가 싶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만의 차별을 두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어쨌든, 센터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관리자가 특별히 선별한 부모 후보를 만날 기회가, 그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쉽게 상상이 되는 일이던가?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니. 물론 이 아이들에게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치명적인 과거가 있지만, 그런 과거가 그다지 단점이나 불편함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맞는 부모를 선택할 권리만을 가진다. 시뮬레이션으로 본 부모 후보의 모습, 직접 만나서 몇 분간 대화가 가능한 시간, 마지막 세 번째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최후 결정을 한다. 자기 부모로 선택할 것이냐 마느냐. 센터의 아이들은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을 페인트라고 부른다. 주인공 ‘제누301’에게도 페인트 할 기회가 왔다. 그동안 진심으로 페인트에 응한 부모를 만난 적이 없던 제누에게 이번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처가 많은 아이가 선택한 부모 후보는 어떤 사람들일까? 아이들을 입양함으로써 정부의 복지 혜택만을 욕심냈던 부모들과는 다를까?

 

읽다 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온갖 현실이 다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센터의 아이들은 태어난 달의 이름을 따서 뒤에 번호를 붙인다. 1월에 태어난 아이는 제누, 제니. 그 뒤에는 아이들을 구분하려고 붙인 번호. 그래서 센터의 모든 아이는 똑같은 이름이 많다. 그중에서도 6월에 태어난 아이들과 10월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 가장 많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아차’ 했다. 여름 휴가철, 겨울의 크리스마스 시즌.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가볍고 설레기 좋은 그때 잉태된 아이들이 6월, 10월에 태어나고 버려졌다고. 어른들은 자기들의 즐거운 시간을 만들었지만, 그 후에 태어난 아이들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센터로 보내진 아이들의 인생을 한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을까 싶은 아쉬움이 계속 떠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아이를 양육하는 현실은 아주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할 것이다. 경제적인 형편, 산후 우울증, 육아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많은 일을 같이 경험해야 하는 감정적인 문제들까지. 더군다나 그게 다 처음 겪는 일이라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하지만 그 두려움을 안고 겪어야 할 게 아이와의 공동 성장 아닐까? 그 경험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는 더 많은 감정과 상황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묶이는 기적을 맞이하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하나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을 테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163페이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또 모르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겪잖아요.”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196페이지)

 

부모를 선택하는 시대라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차근차근 듣다 보면 결국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가족이 어떤 형태와 마음으로 가능한지 설명해주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도 드러난다. 익숙해서 편하지만 당연하게 생각해서 상처받게 하는 존재가 되는 가족들, 사회에서 출신 성분을 따져가며 사람을 판단하는 시선들, 가족 중심의 사회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러면서 다다르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부모는 어떻게 되는가, 자식은 어때야 하는가. 부모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부모가 되어가는 것’처럼, 자식 역시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어야 하는지 처음부터 정해진 건 아니다. 그걸 몰라서, 알면서도 자주 잊어서 무책임하고 상처 주는 일들이 생기는 거 아닐까. 준비와 노력만으로 가족이란 관계를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가족이란 계속 서로 맞춰가야 같이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하는 소설이다. 혹시라도 멈춰있던, 같이 색을 칠하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시간이 시작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유정 신간

진이, 지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346페이지)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던 한 가지는, 그들이 생활의 불편함을 어떻게 견디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당연하고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생활의 불편함이 뭐 별거냐 하는 표정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그들에게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도 괜찮은 것 아니겠냐는 듯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 세상에서 겪은 어려움이 그들은 산으로 보낸 것 같다. 몸이 아파서, 가까운 사람의 배신으로, 사업이 실패 때문에 같은 세상에서 부딪힌 몸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주변에 몸과 마음 뉠 곳 많을 텐데 왜 하필 산일까 싶은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들이 느낀 그대로를 내가 다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산속 생활로 내가 알게 된 건 산이 인간에게 주는 마음의 위안과 쉼이었다. 세상의 복잡한 일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뜬금없이 들리기도 했다. 미나토 가나에가 '여자들의 등산일기'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추리소설을 주로 썼던 작가가 인생 드라마 같은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은 게 무엇일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평소 접하던 작가의 글 분위기가 아니어서, 기대보다는 그냥 새로운 맛 하나를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 내려놓음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들려오는 이야기부터 마음에 파고드는 어떤 느낌이 있다. 공포와 추리를 맛보며 즐겼던 걸 잊을 만큼, 새로운 느낌의 이야기가 일상의 우리에게 훅 다가와 버린 것 같다.

 

8개의 산에 오르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직장동료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의 리쓰코와 유미(묘코 산), 맞선 파티에서 만난 미쓰코와 간자키(히우치 산),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등산을 배운 여자의 정상 등반일기(야리가타케), 처음으로 언니와 등산을 하게 된 서른다섯의 유미(리시리 산), 동생 유미, 딸 나나카와 다시 산에 오르게 된 여자(시로우마다케), 남자친구 다이스케와 함께 산에 오른 마이코(긴토키 산), 웹사이트 '여자들의 등산 일기'에 모자를 만들어 파는 유즈키의 뉴질랜드 트래킹 투어(통가리로), 언니와의 등산에 두 번 산에 오르고 본격적으로 등산을 즐기려는 여자(가라페스에 가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미 제목에서 느꼈겠지만, 여자들의 등산 일기 그대로다. 산에 오르는 여자들의 속내가 하나씩 들려온다. 그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관계의 불편함을 드러내거나, 과거의 한때를 불러오거나... 저마다 사연이 다른 그들의 공통된 목적지는 산에 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된다. 때로는 누구에게 털어놓으면서 내가 가진 문제를 조금 가볍게 만들기도 하지만, 끝까지 꺼내놓지 못하고 가슴에 묻게 되는 이야기도 있다.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처럼 우리 마음의 많은 걱정거리와 생각들도 그러하다. 단순하게 판단하면서 금방 흑과 백의 논리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들 말이다. 불편한 동료와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거북했던 여자, 남편의 이혼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여자,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면서 불안해하는 여자, 애인과의 결혼을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은 자기 뜻과 다르게 흘러갈 것 같아서 고민하는 여자,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혼자인 삶을 선택했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여자. 각자가 가진 고민은 너무 다양하다. 직장, 결혼, 관계. 평범한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듣고 있다 보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 앞에서, 산이라는 곳은 분명 무언가 해답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라는 게 맞는 것 같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니라, 산에 오르는 그 과정과 시간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떤 것들이 말해주는 것들. 그것을 찾게 하는 여정에 작가는 독자를 동참시키면서 같이 등산하게 한다. 중간 즈음에 잠깐 멈춰서 물 한 모금 마시게 하고, 다시 걷다가 멈춰서 초콜릿을 입에 넣고 당 충전하게 하고, 무심코 바라본 하늘의 구름이 내 발밑에 있는 신기함에 시선을 빼앗기게 하고, 모르는 이들과 함께 오르면서 타인을 이끄는 것도 배우게 하는... 이 여정에서 놓칠 게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 소설 속 여자들의 이야기가 어디쯤에서 풀려나와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선택한 문제의 해결이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줄지 모르겠지만, 산에 오르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문제를 파고든다. 생각하고, 변화시키고,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 애쓴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기의 상황을 냉정하고 간결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까 아니면 단절해버릴까. 뭐든 정리하고 해답을 보고 싶은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면서도 완벽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게 아닐까. 산에 오른다고 해서 각자가 짊어진 문제와 고민들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생각하고 변화하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게 등산 일기에 기록될 팩트다. 빠르게 가지 않아도 되는, 천천히 한 걸음씩 가다 보면 도착하는 그 목적지를 보게 하는 일.

 

어디가 목표인지는 알 수 없다. 무엇이 목표인지는 알 수 없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그게 문제가 아닐 것이다. (50페이지)

 

페이스를 맞춰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산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부터 나 혼자 힘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페이스를 흐트러뜨리는 사람과는 같이 오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염치도 없이 상대방에게 말했다. (140페이지)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이해하고,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누군가 함께 걷는 길이 생각보다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이야기에 은근한 감동까지 생긴다. 아마도 그동안 작가의 글에서 만났던 강함보다 부드러움이 전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걷는 즐거움을 배운 듯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급하게 하지 않아도 결국 닿게 되는 그 지점에 다다르는 우리 마음의 변화가, 생각보다 즐겁고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천히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걷다 보니 보이는 것들을 확인할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