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 피부가 벗겨지는 줄 알았는데, 며칠 사이에 여름 햇살의 뜨거움이 조금 사그라든 것 같다. 어제는 거의 두 달 만에 에어컨 없이 잠들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낮의 더위는 견디기 힘들긴 하더라만. 지난밤에 좀 편하게 잠들었던 것만 기억하고 나갔다가, 여전한 더위에 근처의 카페부터 찾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에어컨을 켜고 있는데도 조금만 움직이면 덥고, 주방에서 뭘 좀 하다 보면 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서 아예 에어컨을 켜는 건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일을 다 끝낸 후로 미룬다. 땀을 흠뻑 흘리고, 개운하게 씻고, 시원한 커피 한잔 만들어서 에어컨 앞에 자리 잡고 앉는다. 여기가 천국이고,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이렇게 여름을 느끼다가도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이번 여름이 잊힐 것 같지만 말이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환경 전문가가 나와서 하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언제나 이번 여름이 가장 더운 것 같다고 말하지만, 오늘의 더위가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더위 중에서 가장 덜 더운 날이 될 거라고. 지구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고, 그렇게 만든 건 우리 인간이고, 조금이라도 덜 덥게 지내려면 환경을 살피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입버릇처럼 또 읊조린다. 이번 여름이 내가 경험한 여름 중에서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고 말이다.


그래도 이 더위를 이기게 하는, 가성비 좋은 처방전은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다. 요즘 예정에 없던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책 잘 안 읽는 나날이었는데 더 안 읽고 있다. 몸을 움직이다 보니 평소보다 잠은 잘 잔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읽겠다고 다짐하며 추리소설 여러 권을 옆에 쌓아두고 있었는데, 갈수록 책 읽는 속도가 더뎌지지만 그래도 천천히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나마 이 책들로 이 여름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비록 페이지를 넘기는데 손끝의 땀이 책장에 묻어나서 좀 거시기 했지만, 여전히 페이지 넘기는 맛이 나는 종이책이 최고라는 즐거움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수화기를 잡지 않은 오른손을 슬며시 꽉 쥐었다. 유리창을 깨고 그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그 여자들을 죽였는지 말하시라고요.”

아버지는 나를 보며 눈만 깜박이더니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잖아. 네가 죽였잖아. 아니야?” (핸디맨, 246페이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애런 니어링. 10년 동안 실종된 여성 열일곱 명의 잘린 손이 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되면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전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핸디맨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렇게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줄 알았다. 그 사건 이후로 26년이 지난 지금, 애런 니어링의 딸 노라는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고, 다시 손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면서 26년 전 사건과 주인공을 소환하게 된다. 경찰은 자연스럽게 핸디맨의 딸 노라를 의심하지만, 노라를 범인으로 만들 증거가 없다.


누가 범인일까? 당연하게도, 읽으면서 범인을 추리하게 되는데, 나는 그 범인을 맞추지 못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전혀 다른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나의 추리는 틀리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다. 진짜 인간의 본성은 유전력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더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왔어도, 핏줄로 이어진 그 본성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맞는 말인지...


프리다 맥파든의 모든 출간작을 섭렵하고자 마음먹었는데, 이 작품을 끝으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만났다. 우리나라 출간 기준으로는 이 책이 가장 먼저 출간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을 가장 마지막으로 읽게 됐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이 가장 단조롭게 느껴졌다. <하우스 메이드>를 처음 읽었을 때의 꽉 찬 느낌이 없었다. 나름의 반전은 있었으나, 그게 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는 아니었던 듯하다.




소개 글에 혹했다. 일본에서 드라마도 있었다고 하고, 18년 전의 부모 토막 살인 사건을 새롭게 취재해 또 다른 서사로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재판 과정과 재판정 안의 장면을 묘사하는 법정 화가, 여러 인물의 증언들, ‘그래서 진실이 뭐냐고?’ 하는 질문을 계속 쏟아내게 하는 흐름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면 매력으로 보였다. 부모를 살해했다는 잔혹함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보여주고, 이 끔찍한 이야기를 소설로 내놓으며 이익을 얻으려는 출판사는 또 얼마나 계산적으로 나오는지 기가 차기도 했다. 그 출판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작가는 또 얼마나 자극적인 표현과 서사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애쓰느라 발버둥을 치는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르고,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몰라서 헷갈리는 상황이 계속된다.


소재는 잔인했지만, 그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읽는데 더 초점이 맞춰지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 인간이 그렇다. 각자의 욕망에 충실해지려는 본성, 그러다 보니 이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 더 복잡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또 사회와 가족 그 내면의 이야기는 더 불편하고 어색하고,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결말을 만들기도 한다는 게 씁쓸했다. 다 읽고도 개운한 느낌은 별로 없어서 이런 장르의 책을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가정 폭력의 생존자인 렌. 아버지는 종말대비자로 세상의 구석으로 나와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정신이상자에 불과한 아버지를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 가정은 파괴되었고, 렌은 엄마와 오빠를 잃었다. 세월이 흘러 그 상처를 조금 잊고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그녀에게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데이트 앱으로 만난 그 남자 애덤. 렌은 애덤에게 푹 빠져버렸는데, 어느 날 애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할 틈도 없이 렌에게 탐정이 찾아오고, 애덤의 정체를 알게 된 렌은 혼란에 빠진다.


감쪽같이 사라진 그 남자 애덤, 혹은 레이프 맨스, 그도 아니면 티모시 존스턴, 또 다른 이름 클리프 젠슨. 이 남자의 본명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렌은 이 남자의 등장으로 벌어졌던 일을 좇는 탐정 베일리와 함께 진실을 찾기 시작한다. 애덤을 만나고 사라진 여성들, 그 여성들과 애덤이 정말 연관이 있는지, 그 여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살아있기는 한 건지.


어쩌면 요즘 우리는 진실을 감지하는 본능이 무디어지다 보니 진실과 거짓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고스팅, 155페이지)


애덤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파헤치며 렌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러면서 점점 맞춰지는 퍼즐에, 자기만의 세상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낀다. 자기가 만든 세상, 이게 옳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정하는 건 가능하다. 본인이 그렇게 살면 되니까. 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이 타인에게, 그런 방식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가 될 때 피해를 주는 거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게 피해를 주는 건지 아닌지조차 관심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작가의 출간작 두 권을 추천받았는데, 당분간 나머지 작품은 못 만날 듯하다. 이 작품 읽으면서 속이 터져 죽을 뻔했다. 범인을 찾는 건 쉬웠으나, 그 과정을 읽어가는 게 좀 지루하게 느껴지더라. 세상에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많으니 조심 또 조심하자는 메시지를 심어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피터 스완슨의 작품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다. 최근 출간작은 거의 안 읽었는데, 전작에서 등장했던 인물 릴리가 등장한다고 해서 궁금했다. 도서관 사서 마사는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 앨런은 교육 관련 영업하면서 출장을 자주 다닌다. 그는 마사에게 항상 일정을 공유하고, 출장지에서도 자주 연락한다. 다정한 남편이라고, 읽는 나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뉴스에서 어떤 여성이 살해되었다고, 자살했다고 소식을 전할 때마다 뭔가 조각을 잃어버린 퍼즐을 보는 기분이었다. 죽은 여성들이 있던 곳은 남편의 출장지였다. 어느 한 곳이라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텐데, 남편이 출장 간 곳에서, 남편이 출장 간 그 시기에 여성의 사망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마사는 의심한다. 내가 아는 앨런의 모습은 진짜일까?


세상에서 살인이 가장 쉬웠어요.’ 살인마의 머릿속에 이 문장만이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살인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이건 인간이 아니었다. 소시오패스나 다른 설명도 딱히 필요 없어 보였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는 말 밖에는. 그래서 누가 범인이냐고? , 그건 직접 읽고 찾아내야 하지 않겠어?


앞서 읽은 작품들보다 집중력이 떨어지긴 했다. 잔인한 살인마가 등장하는 건 긴장되기도 했지만, 좀 밋밋했다. 읽으면서 계속 추리했던 범인,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 건가 하는 나의 예측이 어긋났기에 결말에 관한 기대가 더 커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 살인마의 최후보다 릴리의 등장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궁금증만 남았다.




처음 계획에는 8월이 가기 전에 읽고 싶은 목록을 15권이나 추려놓았는데, 그중 절반도 못 읽었다. 지금도 내 옆에는 다 읽지 못한 목록의 책이 쌓여있는데, 그 사이에 몇 권 더 늘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 안 읽는데도 계속 책을 샀네. 못 살겠다. 에휴. 남은 더위를 이겨낼 추리소설을 마저 다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우선순위 목록을 정해서 다시 쌓아두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들여온 책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그래도 자꾸만 높게 쌓여가는 책을 보는 마음은 괜히, , 괜히 더 즐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네.




#핸디맨 #살인재능 #고스팅 #언덕위의빨간지붕 #책 #추리소설 #책추천 #더위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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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1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핸디맨은 서사구조는 좀 떨어지죠. 마지막에는 좀 뜬금없기도... ㅎㅎ 그래도 저는 이 소설이 좋았던게 프리다 맥파든 소설 중 유일하게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물이 나온달까요? ㅎㅎ 여름은 추리소설이죠. 저도 요즘 집에만 있어서 책을 쌓아놓고 독파하는 기쁨을 만끽 중입니다. ㅎㅎ

구단씨 2025-08-17 17:2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바람돌이님 말씀 듣고 보니 이 책에서는 특별히 나쁜 애들이 안나오네요. ^^
한편으로는 이 책을 마지막에 읽은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처음에 읽었다면 재미 없다고 작가의 다음 작품들 안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아직도 읽고 싶은 책 엄청 쌓여있어요. ㅠㅠ
이게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지만요....

여전히 더운 날이 계속입니다.
언젠가 끝날 여름이겠지만, 매일 땀 흘리고 있다 보니 좀 힘들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