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벤허>를 봤다. 미루기만 하다가 여기 상영관에서 오늘이 마지막 상영 시간표로 잡혀 있기에 예매를 했으나, 그 시간도 못 지킬 것 같아 포기도 했다가, 어찌어찌 무리를 해서 보게 되었다. 나는 4시간에 가까운 오래 전 영화 <벤허>도 안 봤고, 원작도 읽지 않았다. 2시간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가 개봉할 때부터 궁금했으나, 뭐, 여건이 안 되어 못 봐도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 영화를 안 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 정말 너무 재밌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4시간에 가까운 영화로도 보고 싶어졌고, 원작도 읽고 싶어졌다!

 

 

 

 

 

 

 

 

 

원래 싸움은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되고, 서운한 작은 마음에서 틀어지기 마련인데 메살라와 유다 벤허도 마찬가지였다. 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계급의 차이를 겪고 있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에서 로맨스가 있으니, 메살라는 유다의 여동생을 좋아했으나 유다의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못해서 괴로워했고, 그에 자기 신분에 더 채워야 할 것을 생각하고 로마로 떠났다. 역시 사랑이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게 힘든 걸까, 라고 생각하던 차에 유다와 그 집의 하녀로 있던 에스더의 결혼은 역시 유다를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로맨스소설 보다 더 설레잖아?!!!)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연신 유다를 칭찬했다. 엄마 엄마, 쟤(유다) 좀 봐. 잘생긴 애가 왜 멋지기까지 해? 누구는 신분의 벽을 무너뜨릴 시도조차 안 하고 떠났는데, 쟤는 결혼하러 가는 여자를 잡으러 말 타고 막 달려가잖아. 쟤네 엄마가 반대 안 했을까? 반대 했겠지? 근데 저렇게 딱 결혼해버리는 것 좀 봐. 역시 역시, 내가 처음부터 알아봤어. 잘생겼잖아!!!!

 

 

보지 않았어도 이미 본 것처럼 착각이 들게 하는 영화인데, 간략(?)하게 줄인 이 영화가 원작의 분위기나 의미를 얼마나 살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나는 주인공 유다 벤허의 외모에 푹 빠져서는, 거부감 느끼던 교회에 대해서도 살짝 그 반감이 줄었으며, 영화를 보면서 내내 엄마에게 물었다. 원래 성경에서도 쟤네들은 사이가 안 좋아? 저기 물 떠주는 사람이 진짜 예수야? 설정이야, 아니면 성경에서도 저런 내용이야?

 

 

엄마가 영화 보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영화 볼 때 옆에서 말 걸면 싫어하는데) 보면서 계속 궁금한 거다. 그동안 전혀 관심 없던 내용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서는, 전차 경주 장면에서는 두 손을 꼭 쥐고 보게 됐는데, 아~~~ 안돼에에에에~~~

경쟁자가 한명씩 경기장에서 사라지고 마지막에 메살라와 벤허만 남겨졌을 때는 완전 흥분 상태였다. 그러다가 경기가 끝나고 나니 갑자기 그 서늘한 상영관 안이 더워지는 거다. 영화 보면서 이렇게 흥분해보기는 또 처음이다. 저런 전략이 있어서 이길 수 있었군, 역시 무식하게 덤비면 안 되는 거였어, 간절하게 바라는 게 있으면 저렇게 힘을 낼 수 있는 거구나, 싶으면서... 정말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도 가장 기다렸던 게 그 유명한 전차 경주 장면이었는데, 나는 비어있는 앞자리에 몸을 기울이면서 봤다. 두 시간짜리가 이렇게 재밌으면, 4시간에 달하는 영화는 얼마나 재밌을까? 원작은 또 얼마나 섬세할까?

 

 

이런 훌륭한 영화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 유다의 등장에서부터 유다만 쳐다봤는데, 특히 유다의 헤어스타일만 집중해서 봤다.

나는 예전부터 이 헤어스타일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내 얼굴형에는 안 어울리기에 마음이 안 좋았더랬다. 아, 달걀형의 얼굴에 정말 잘 어울리는데, 턱을 좀 깎아야 하나? 무섭다. 그냥 포기하자. 그러다 딱 등장한 유다의 헤어스타일을 보니 얼마나 탐이 났던지. 잘생긴 애가 헤어스타일도 내 눈에 들게 하고 나왔기에 눈에 하트가 뿅뿅. 엄마 말로는 옛날에는 저런 헤어스타일을 ‘그지 커트’라고 불렀다는데, 그지 커트가 아니라 멋진 커트잖아!

 

 

 

그러다 유다가 노예선을 타고 5년이 흐른 장면에서는 뜨악~~ 어찌 저러한 모습으로?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라 흘러라~~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란 말이야~!

 

전차 경주를 준비하면서 유다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에서는 또 한 번 반해가지고서는... 아예 저렇게 짧게 커트해버린 거야? 얼굴이 훤히 보이니 또 다른 이미지네... 그렇게 경주에서 이기고 사람들은 파티를 하는데도, 그는 그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고 숙소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는데, 나는 또 그 옆모습을 보면서 어우~ 옆모습도 잘생겼네, 하는데 엄마는 옆에서 “에스더(유다의 아내)를 생각하나 보다.” 하시면서 달달한 분위기를 만들어버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남은 건 원작에 대한 호감과 유다의 세 가지 헤어스타일이라네... 마지막 상영일이라 아쉽다. 다시 보고 싶은데 말이여...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벤허'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25468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16-09-27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두호 만화로 봤던 기억이 납니다만...... 뭐 어쨋든 마음에 흡족하신 모양이니 다행입니다^^
저도 벤허 꼭 보고 싶었는데 벌써 내리는 분위기군요. 저는 뭐 머리모양 보다는 역시 권선징악 복수의 그 이야기와 말내달리는 그 경주....

구단씨 2016-09-28 10:1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붉은돼지님!
만화로도 있었군요. (제가 잘 몰라서요... ^^)
여기서는 이 영화가 생각보다 일찍 내려지더라고요. 명절에 개봉했는데 이주만에 내려지다니... ㅠㅠ
안 보려다 봐서 그런지, 기대가 없던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정말 좋았어요.
저는요. 결말이 그렇게 되는지 몰랐어요. 화해의 마무리라 그게 좀... 흠...

곰곰생각하는발 2016-09-27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지 카트가 정말 힘듭니다... 잘못하면 정말 거지가 됩니다..

구단씨 2016-09-28 10: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곰곰생각하는발님!
그런가요?
그럼 유다는 그 그지 커트에 웨이브를 넣어서 저렇게 보였던 거군요. ^^
만약 제가 언젠가, 언젠가 그지 커트를 하게 된다면 꼭 약간의 웨이브를 넣는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

Breeze 2016-09-2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지 커트` 한동안 유행했었죠.
유다, 멋있죠?
<땡스북>에서 말하기를, 소설의 아주 적은 내용만 영화화 한거라네요.
이 소설 원작이 궁금했졌어요.
저도 <시공사>판을 구입해볼까 했다가, 땡스북에서 <현대지성>판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잭 휴스턴에 반하셨군요!! ^^

구단씨 2016-09-28 10:1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그 간사님 그 기사 작성하려고 원작까지 다 읽으셨다고 해서 놀랐어요. (목소리 미남. ^^)
암튼 2시간짜리 영화라도 봐서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4시간짜리는 재밌고 섬세할랑가는 몰라도 잭 휴스턴이 아니므로 일단 기대는 접어둠... ㅋㅋ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ㅣ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력이 좋았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졌었는데, 이 책의 소개글을 보니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엄청난 기억력 때문에 고통을 같이 앉고 있어야 한다면 그 선택을 고민할 것 같다. 어찌되었든, 그 기억력으로 시작된 단서로 찾아가는 또 하나의 추리소설.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체슬리 설렌버거.제프리 재슬로 지음, 신혜연 옮김 / 인간희극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진심이고 기적인데, 이걸 의심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게 우습다.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한 그를 배워야 할 텐데, 또 하나의 이기적 집단이 만들어낸 절망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어 우려된다. 어쨌든, 눈앞에서 펼쳐진 기적을 그대로 보고 싶은 바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남은 생명이 시한부란다. 그걸 가족들은 당사자에게 알리기를 거부한다. 의사도 이에 동참한다. 환자가 충격 받을까 염려된다는 이유였다. 정작 당사자는 환자인데, 그는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을 알 권리가 없을까?

 

종종 드라마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 가족들이 정작 당사자에게는 남은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그에 의사도 동참한다. 정확한 상태를 환자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잘 치료되고 있다고만 한다. 이때 정말 궁금해진다. 환자는 몰라도 되나?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을? 아니면, 자기 몸 상태를 이대로 몰라도 된다고? 그러다 죽음의 순간에 원망하면 어쩌려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울부짖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장면을 두고 친구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질병으로 오래 앓다가 죽을 수도 있고, 예고 없는 사고로 즉사할 수도 있는데, 너의 죽음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라 병을 앓고 있다면, 그렇게 너에게 남겨진 시간이 곧 끝난다면, 그걸 아는 게 좋겠느냐고, 모르고 가는 게 낫겠느냐고... 친구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나는 전자라고 했다. 어떤 경우에서든 알고 싶다고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곧 끝난다는 걸 알고 싶었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살아온 시간의 정리는 내가 직접 하고 싶었다. 하다못해, 잔고 0원인 통장까지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의 모든 흔적들은 지우고 가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는 방법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지만,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여전히 전자다. 알고 싶다. 내 죽음의 주인공은 나니까. 주변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나의 상태를 비밀로 할 이유를 모르겠다.

 

 

 

 

 

 

 

 

 

 

임선경의 소설 『빽넘버』를 읽으면서 자꾸만 '만약'을 생각했다. 주인공 원영은 다른 사람의 등에 있는 숫자를 본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그 숫자는 그들의 남은 시간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든다. 남은 날이 하루인 사람의 등에는 붉은색으로 숫자 1이 빛난다. 그러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붉은색 숫자 1은 점멸하면서 희미해지고, 숨이 끊어지면 숫자도 완전히 사라진다.

 

원영은 그게 너무 괴로웠다. 저마다의 숫자를 등에 달고 사는 사람들. 남은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지만, 숫자가 적은 사람을 볼 때마다 힘들었다. 그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남은 시간이 열흘 밖에 되지 않으니, 곧 정리해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 거다. 반대로 남은 숫자가 많은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다. '당신은 삼만 이천구백이십일 후에 죽으니 남은 시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라고 말할 수도 없잖아. 그렇게 말해도 미친 사람 취급하는 건 똑같을 테니. 어쨌든 남의 인생이다. 원영이 그들의 등에 붙은 숫자를 본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의무나 이유도 없다. 그런데 막상 그 숫자가 보이는 사람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부러웠다. 얼마나 좋아. 아무도 모르는 그 남은 시간을 안다는 게, 점쟁이처럼 다 아는 거잖아. 그거 말해주고 복채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다. 누군가의 시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 자체도 신기했지만, 그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요! 알고 싶어요, 라고... 나의 마지막 시간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들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아니, 얼마나 되었으면 좋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등에는 초록빛의 긴 자릿수 숫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으면, 미운 사람의 등에는 붉은 한 자릿수 숫자가 점멸하고 있었으면 하는, 정말 상상에서나 가능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띄웠다.

 

생명의 탄생에는 예정일이라는 것이 있다. 출산 예정일을 알고 그 계절에 맞추어 출산 준비를 한다. 몇 년 뒤에 학교에 갈 테니, 몇 년 뒤쯤이면 결혼도 할 테니……. 인간 삶에는 대력의 예정이 있다. 예정이 있어야 준비도 할 수 있다. 죽는 날도 예정일이 있다면 어떨까? 그건 혹시 축복이 아닐까? 사는 동안에 열심히 살고 죽음이 가까워지면 또 그 준비를 하게 되지 않을까? (『빽넘버』 180페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죽는다. 금연, 금주, 규칙적인 운동, 오메가3와 프로바이오틱스, 깨끗한 공기와 물, 채식, 생식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놀랍게도 삶 그 자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그의 숫자가 다 소멸했으므로 사람은 죽는다. (『빽넘버』 128페이지)

 

그런데, 정말 다, 만약이다. 그런 걸 알 수가 없잖아. 알 수가 없으니 오늘을 사는 거 아닐까. 이 소설이 그걸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은, 다른 이의 등에 있는 숫자로 그들의 남은 시간을 보는 원영은 자신의 숫자는 못 본다. 안 보인다. 죽을 때까지 못 볼 거다. 남들의 시간을 보는 이가 정작 자기 숫자는 못 본다니, 재밌다. 마치 다 알 것처럼 보이는 그의 눈이 부러웠는데, 결국 타인의 남은 시간을 관여할 수 없는 그 자신도 자기의 남은 시간을 모른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 소설의 답이 있다. 그냥, 오늘을 살아가시오. 남은 시간을 알아도 문제, 몰라도 문제. 그러니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 말고, 답이 있겠소? 있다면 나에게도 좀 알려주시구려. 에고고...

 

 

며칠 전에 읽은 이 소설이 유독 많이 생각나는 하루였다. 며칠 전부터 자꾸 꼬이고 어긋난 일들이 머리 아팠는데, 싫은 사람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일에 고통스러웠는데, 오늘 아침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오는 짜증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냈다. 냉동실 문을 열자마자 떨어지는 작은 덩어리 하나. 엄마가 남은 만두 몇 개를 비닐 팩에 넣고 얼려두었는데, 그게 떨어졌다. 만두 끝의 뾰족한 부분이 발등을 찍었고, 무슨 혈관주사 맞은 것처럼 빨간 바늘 자국과 그 주변에 바로 퍼지는 푸른 멍. 손을 댈 수 없는 통증에 절뚝거리며 걸었는데, 다행이 크게 붓지는 않아서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누군가의 등에 붙은 숫자를 간절히 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던, 헛웃음 나는 일만 계속되었던 하루였다. 이제 다 끝난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은 말도 안 되는 '만약'을 떠올리지 않고, 편하게 잠드는 그런 하루로 끝났으면...

 

햇살이 좋았다.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빽넘버』 238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리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불금입니다. 한 잔 꺾어봅시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정신은 비교적 말짱하다. 헌데 계단 오르기가 힘들다. 양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늘어진 엿가락처럼 꼬였다. 옆에서 따라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지 않고 선을 그은 것이 그나마 다행. 기특한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51페이지)

 

밤 10시쯤, 정말 딱 한 잔만 하고 싶었다. 아니다. 딱 한 병. (한 잔은 좀 서운하잖아) 집에 엄마가 맛있게 익혀둔 고기도 있었고, 목이 시원해지는 과일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 한 병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상황. 2월 설날 명절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집에 맥주가 없을 게 뻔한 걸 알면서도 냉장고를 뒤졌다. 아하. 그때 미처 다 마시지 못하고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맥주가 한 병 나온다. (다행이다) 신난다. 기분 좋게 맥주를 컵에 따르다가 급우울해져버렸다. 맥주가 한 컵 밖에 안 나와. ㅠㅠ 정말 딱 한 잔뿐인 거야? 아쉬운 대로 그 한잔을 마시다가 보니 속이 상한다. 아, 서운해. 뭔가, 정말 서운해. 맥주를 사러 가야겠다. 그런데 너무 귀찮다. 걸어서 3분 거리의 마트까지 가는 게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그때 마침, 내 눈에 들어온 건 며칠 전에 제부가 왔다 가면서 준 와인이다. 아주 좋은 거라고 했다. 비싼 거라고도 했다. 얼마나 좋은 건지, 얼마나 비싼 건지 모른다. 몰라도 괜찮다. 일단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이름도 모르는 그 와인을 땄다. 조금씩, 한 모금씩, 그렇게 천천히 마시다가 보니 와인 반병을 마셨더라. 그때야 알았다. 내 손에 힘이 빠지고 있던 것을... 그래도 뭐, 기분이 알딸딸하니 좋더라. 적당히(?) 잘 마셨고, 기분 좋게 취해서, 잤다. (주사가 특별히 없고, 그냥 술 마시면 졸리니까, 잔다. 그래도, 그날 그렇게 몸이 늘어지고 손에 힘이 빠지는데도, 양치까지 잘하고 잤다니까!)

 

아, 이런. 술과 함께한 미야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자꾸 말이 삼천포로 빠지려고 한다. 내가 아직도 술이 안 깼나 보다. 술은 술술 들어가지만, 인생은 안 술술~하다는 미야코의 일상에서 웃음까지 곁들이다 보니 술과 미야코에게 취하는 기분이다. 그녀의 이름 코사카이 미야코. 책 소개에서 보면, '코사카이'는 '술이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뜻이란다. 어쩜 이리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잡지사 편집부에서 일하는 미야코는 퇴근과 동시에 술집이 즐비한 골목으로 선배 언니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는 게 삶의 낙이다. 어라? 무슨 말인가 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니 열쇠가 없다. 택시에서 두고 내렸나? 의미 없는 길을 오가며 열쇠를 찾았는데, 그녀의 손에서 도망간 가방은 집 앞 돌덩이에 걸쳐 있다. 술로 가득 채운 에피소드가 미야코를 설명한다. 동료의 명품 가방 안에 술 마신 것을 게워내고, 취중에 길거리에서 누워 잠자는 그녀는 누구인가. 훌러덩 벗고 있던 그녀의 앞 시간은 어디서 찾아와야 하나? 잃어버린, 찾을 수 없는 그것(?)을 기억해내기 위해 그녀가 했던 일들에 숨이 막힌다.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아픈 건가. 병원 진료실에서의 일화에는 진짜 박장대소했다.

 

어쨌거나, 병원에는 진료에 앞서 기록하는, 문진표라는 것이 있다. 외상에 관해서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도 적는다.

"코사카이 씨."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흰 커버를 덮은 둥근 의자에 앉아 의사와 마주했다. 의사의 첫 마디.

"정직한 사람이군요."

놀랄 일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사실 위장, 속임, 거짓말은 적인 편이라 생각한다. 허나 병원 의사의 소견으로 듣기엔 이게 뭔가 싶었다. 조심성 없다, 멍청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차라리 그러려니 할 상황 아닌가. 술 취해 다쳐서 병원에 왔는데 어째 도덕적인 칭찬을 듣는 거지? 미야코는 절로 고개가 외틀렸다.

의사는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대개 이런 상황에서 '넘어졌다'고 씁니다."

그러면서 문진표에 다치게 된 경위란을 톡톡 쳤다.

흰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글자. '술이 떡이 돼서.' (155~156페이지)

 

이러니, 미야코가 어떤 사람인지 눈앞에서 그려지지 않아? 몸에 술이 채워지지 않을 때도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그녀가 술만 잘 마시느냐? 아니다. 일도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다. 작가를 대하는 것부터 기획을 마무리하는 일까지, 그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하는 그녀다. 대책 없을 것 같지만, 나름 선을 지키고 열정을 불사르는 그녀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녀이기에 어느 자리에서건 인기를 폭발시킨다. 말 그대로 못 하는 게 없다. 누구 하나 그녀를 미워할 수도 없다. 일 잘해, 술 잘 마셔, 인간적이지, 대화 통하지. 이 얼마나 좋은 상대냐고. 읽는 내내, 이런 사람 하나쯤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솔직히 미야코 같은 사람 옆에 한 명 있다. 일단 술병을 들면 말술을 마시는데, 술 취한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말 힘들다. 새벽 두 시에 술집 앞에서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한 시간을 헤맨 적도 있다. 에휴...)

 

술이 술술 넘어가듯 그녀의 인생도 이렇게 술술 넘어가는 듯했으나,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실패로 기록될 일이 있으니, 바로 연애다. 어느 날, 대학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가 만나자고 한다. 뭔가 느낌이 온다. 이상하다. 좀 더 예쁘게 하고 나가야지. 아마도 오늘이 디데이가 될 것 같다. 오호~ 이건 틀림이 그거야. 바로 그거! 프.로.포.즈. 뭐, 아직 결혼할 때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뭐, 결혼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미야코는 설레는 맘으로 애인을 만나러 간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미야코한테 물어봐. 그날 밤 그녀가 왜 그렇게 술잔을 꺾어댔는지 말이야. 그녀는 애타게 불렀다. 술아 술아~ 내 술들아~ 일루 와~. 한 잔 꺾고 꺼억~, 두 잔 꺾고 꺼~어~억~

 

술로 시작해서 술로 계속되고, 술로 즐겁고 우울해지는 그녀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남 일 같지 않은 거냐. 소설인데 시트콤 같다. 나 같고, 내 옆의 또 다른 사람들 같다.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오늘을 풀고, 속상함을 털어내고, 기쁜 일에 더 설레게 하는 매개로 술을 선택한다. 술 때문에 미야코가 보인 엉뚱함이 자칫 과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과함이 어쩌다 한 번, 귀엽게 보일 정도라면 괜찮을 듯하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이 가볍지만도 않다. 직장이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진지한 일들이 그녀들의 끝도 없는 수다로 술술~ 풀어가는 재미가 있다. 그게 바로 살아가는 즐거움 아닐까. 때로는 울기도 하는 인생이지만, 이렇게 웃어가는 일들 때문에 오늘이 재밌어질 수도 있는 거. 그런 재미를 술이,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게 즐겁다.

 

모두, 오늘도 시원하게 넘어가는 한 잔으로 즐겁게 지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