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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출간 당시 너무 유명한 책이었는데, 한번 읽을 기회를 놓치니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이미 한바탕 그 바람이 불고 난 뒤의 허전함이 이 책을 읽는 걸 방해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흘렀는데, 이 이야기가 영화로 개봉한다고 하니 다시 그 원작 읽기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는 보고 싶은데 영화 자체로 즐기기 보다는, 원작이 있는 영화는 늘 그래왔듯이, 이상하게 원작과 비교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렇게 다짐했는데도 여전히, 나는 이 영화의 원작을 읽지 않았고, 그 상태로 영화를 봤다.

 

 

이 이야기의 내용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몸이 불편한 남자, 그를 돌보기 위해 그의 곁으로 다가간 여자, 그리고 안락사. 이런 설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고, 안락사가 어떻게 언급되는지도 몰랐다.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영화의 거의 첫 장면. (너무 잘생긴 이 남자 배우의 등장만으로 두 눈동자는 화면에 고정된다) 윌은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두고 아침 출근길에 나선다. 테이블 위의 헬멧을 드는 순간, 아직 침대 위에 있던 여자는 윌에게 말한다. 날씨가 궂으니 오토바이를 타지 말고 출근하라고. 그 장면에서,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무슨 느낌이 들었던 걸까. 그 헬멧, 그 날씨, 여자의 한 마디가 무슨 복선 같아서. 위험하니까 오토바이를 포기하고 그냥 출근길에 나선 윌이었다. 비가 내렸고, 그는 바빴고, 한참 통화중이었고... 오토바이에 부딪혔다. 결국, 위험해서 놓고 간 오토바이가 그의 몸을 불편하게 만든 게 되어버렸다.

 

구직하던 루이자는 상당히 높은 보수의 6개월짜리 일을 구한다. 몸이 불편한 남자를 돌보는 일. 해본 적 없지만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던 루이자는 그 일을 하기로 한다. 루이자의 패션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지만, 참아주겠다는 표정의 윌. 그런 패션 소화하는 여자도 있을 것이니 뭐, 루이자에게만 허락되는 자연스러움인가 보다. 그녀가 찾아간 곳에,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있다.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표정, 말투, 특별히 그녀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허락한 것도 아닌 것 같은 애매모호함. 루는 진심으로 윌을 보살핀다. 그의 마음을 보려 애썼고, 그가 웃기를 바랐고, 그에게 해주고 싶은 게 많아졌다.

 

 

여기까지 봤을 땐 그저 그런, 뻔한 로맨스가 시작되는 영화인 줄 알았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만났고,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마음일 거로 봤다. 그렇게 서로에 의해 즐거워지는 시간을 보여줄 거로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오해했던 게 안락사 등장 부분이다. 여기까지 봤을 때, 왜 이 이야기에서 안락사가 언급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거다. 루와 윌. 두 사람과는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로 안락사가 등장할 거로 생각했더랬다. 이제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윌의 몸이 불편해도 그 상황을 넘어설 마음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무료한 시골에서 많은 것을 포기한 채로 살아가는 루였지만, 그래도 행복해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였던 거라고...

 

점점 서로에게 관심을 두던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골에서 가족을 부양하느라 꿈도 사라진 루에게 윌은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한다. 윌에게 어떻게 사고가 난 건지 물을 수 있는 루가 되었다. 아, 이렇게 서로에게 관심 두면서 사랑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던 내 바람에, 그 순간 영화는 배신을 때린다. 영화는 갑자기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너무 행복하면 의심이 드는 부정적인 마음을 품게 하는 거다. 아, 이래서 원작을 읽었어야 했나 보다, 하고 잠깐 후회를 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갖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얼마나 원작을 살렸는지 비교하면서 보려고 악착같이 원작부터 읽었던 게 차라리 나았을까. 휴우... 영화를 보면서 나 혼자 설레고, 나 혼자 기대했다. ‘이건 로맨스 영화니까!’ 라고 생각했던 거다. 로맨스라면 로맨스지만, 이 영화는 삶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불편한 몸의 윌이 루에게 사는 방법을 전하고 있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매력은 당당함이라고, 노랑 줄무늬 스타킹은 그냥 신으면 되는 거라고, 하고 싶은 것을 계속 생각하고 꺼내라고... 아마 원작도 그럴 테지. 이대로도 괜찮다, 이제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있다, 당신과 행복 하고 싶다, 고 말하는 루의 간절함이 그대로겠지. 무엇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이유가 루, 당신 때문인데, 이제 윌이 더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많아졌는데, 뭐가 고민이야, 윌. 그녀가 바로 앞에 있는데 말이야!

 

그는 처음 그가 계획한 대로 하려고 한다. 6개월의 시간을 정했던 이유가 그거였나?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왜 그래야 하는데? 6개월 전과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는데, 그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 조금의 고려사항도 안 되는 거야? 루가 있는데? 윌, 정말 그럴 거야?!

 

루는 윌을 설득하고 보듬고, 온갖 말을 더해보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속상하다. 서운하다. 루가 그렇게 애태우고 있는데 모른 척할 거냐고, 왜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느냐고 화를 내면서 영화를 봤다. 그때 등장한 윌의 한 마디. “루, 난 정말 내 인생을 사랑했어요.” 이 말 한 마디가 그 화를 사라지게 하고도 남았다. 그는 정말 자기 인생을 사랑했단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의 인생을 사랑했다고 한다. 일도 열심히 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했고, 온갖 스포츠를 즐기던 윌. 그랬다. 그가 사랑한 자기 인생은, 불편해지기 전 그의 몸으로 살았던 모든 것이었다. 전동 휠체어에 앉아 손가락 두 개로 버튼을 누르며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만지고 싶은데도 손가락 하나 뻗을 수 없는 지금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충분하지 않았던 거다. 그가 사랑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된다. 사랑하는 여자도 생겼지 않느냐고, 이렇게도 괜찮지 않으냐고 묻고 싶었던 내 목소리는 쏙 들어갔다. 나는 그가 말하는 ‘그가 사랑했던 삶’의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는 루를 사랑하지만, 루 때문에 지금 웃고 행복하지만, 루를 사랑하고 그 자신도 사랑할 삶을 원했던 거다. 그러니, 그를 원망할 수가 없다. 그의 선택을 나무랄 수가 없다. 그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아, 윌...

 

 

하아...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멍해 보긴 오랜만인 듯하다. 그냥 소설일 텐데, 영화인데,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계속 생각이 난다. ‘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라고 루에게 말하는 윌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노랑 줄무늬 스타킹을 입은 채로 당당하고 자신 있게 걷는 루로 살아가라는 윌의 말. 그가 다 지켜내지 못한 삶을 루에게 전해주는 것처럼 들리는 마지막 그의 말들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기적은 이럴 때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닐까? 윌에게 또 다른 희망의 순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혼자 화를 냈다가, 울적했다가, 이해를 하기도 했다가,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더라. 영화가 다 끝났는데, 절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원작이 있는 영화를 봤을 때,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안 봤을 때,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다시 원작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미 알아버린 내용, 다시 활자로 확인하는 시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서. 그런데 안 되겠다. 이 책은 꼭 봐야만 할 것 같다. 영화로 풀어내지 못한 갈증을 활자로 눈에 담아야겠다. 원작부터 이번에 출간된 후속작까지...

(이야기의 흐름이 뭔가 구멍이 많이 보이는 듯했지만 영화는 매력 있었다. 특히 이 남자 배우 때문에 좋았다는 건 안 비밀. 보고 또 봐도 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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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질문의 답변을 생각하기 전에 질문을 쭉 읽어보다가 든 생각은, 내가 정말 평범하게 책을 읽는다는 것과 오랜 시간 그 질문들의 답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거다. 익숙하게, 때로는 어떤 목적을 두고, 때로는 그냥 페이지 넘기는 재미로, 때로는 가볍게 읽는 습관들. 문제가 많은 책 읽기 습관인데, 그게 또 잘 고쳐지지 않아서 포기하는 부분들이 생겨나고, 그럭저럭 여전히 책을 가까이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까지 그대로다. 별거 없네...

 

 

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아무 때나 집에서든 밖에서든 상관없이 책을 한 권씩은 들고 다니는데, 주로 집에서 읽는 시간이 많고, 가끔 시간이 여유로우면 밖의 커피점 같은 데서 읽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방바닥을 뒹굴면서 읽기를 좋아한다. 자세가 불량이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서 읽는 거 어렵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그냥 뒹굴면서... 그런데 이런 습관을 고쳐야 하는 절실함이 찾아왔다. 엎드려서 책 보는 습관이 눈에 상당히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무시했는데, 더는 그런 무시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얼마 전 알았다. 내 눈 상태가 그러하므로... 심각하다. 그 습관을 고치려고 애쓰고 있는 지금이다. 의자에 반듯이 앉아서 읽지는 못해도, 적어도 지금은 엎드리거나 뒹굴뒹굴하면서 읽지는 않는다. 거의 2주 정도 이러고 있는데, 습관이란 게 정말 무섭다. 안 하던 자세로 책을 읽으려니 허리가 아프다. 그래도 어쩌겠어. 고쳐야지.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종이책을 주로 선호하는데, 요즘엔 가끔 전자책도 읽는다. 전자책은 주로 가벼운 로맨스소설 정도 읽는데, 요즘 인터넷서점에서 전자책 구매할 수 있는 상품권을 많이 주기에 타이밍 맞으면 그 상품권 내려받아서 한두 권씩 사면서 즐겨 읽는다. 문제는, 사기는 하는데 읽는 속도가 따라주지 못해서 읽지 못한 책들이 더 많다는 거... 가끔 진짜 여유롭게 어디 처박혀서 가벼운 소설들 읽고 싶다. 적어도 읽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 나게.

읽으면서 메모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일단은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 읽고, 나중에 책을 다 읽고 나면 포스트잇 붙여놓은 부분 다시 펼쳐본다. 그때 필요하면 메모를 하기도 하지만, 주로 리뷰 작성할 때 열어놓은 한글 파일 안에 붙여 놓는다. 그마저도 안 하면 그냥 잊기도 하고... (여기서도 게으름이 표가 난다.)

 

 

Q3. 지금 침대 머리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와 <치킨의 50가지 그림자>가 손닿는 곳에 있다.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너무 궁금해서 구매했는데, 문학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실상은 요리책이다. 요리 좋아하는 사람은 즐길 수 있는 책인데, 나에게는 두 번 읽힐 책은 아니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는 술로 가는 그 길이 궁금해서 구매했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라고 말할 정도면 얼마나 술을 좋아해야 하는 걸까. 요즘 술 못 마시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더 끌리는 책이다. 말술로 마시던 친구가 생각나는 책이기도 하고, 진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요즘이기도 하다.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구분 없다. 그냥 높이나 공간이 맞으면 아무 데나 끼워 넣는다. 그러다가 책을 못 찾는 경우가 많은데도 이 버릇 안 고쳐진다. 책을 배열해두는 방식이고 뭐고, 사실 책 정리를 거의 안 한다. 필요한 책 찾다 보면 어디 책탑 밑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정리하지 않은 택배 박스 안에서 나오기도 한다. 내가 하는 책 정리는 딱 두 가지다. 책을 사고 아무 데나 꽂아두거나, 안 읽거나 한 번 읽은 책은 내보내는 거. 내보내는 방식도 두 가지, 중고로 팔리면 팔거나 기증센터에 보내거나. 엊그제도 늘 보내던 기증 센터에 책 한 박스 보냈는데, 박스를 가만히 살펴보니 대부분 신간이다. 담당자분 말씀이, 이용자들 반응 좋은 책으로만 꾸준히 보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한 번 읽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 터라 책이 쌓이면 바로바로 보낸다. 거의 두세 달에 한 번씩인데, 그때마다 한 박스씩, 보통 한 박스에는 책이 대략 20~30권 정도. 그때 한 번씩 하는 일이 있는데, 이 책이 나중에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다. 그때는 도서관 자료검색을 하고 비치된 자료라면 바로 기증으로 보낼 박스에 넣고, 도서관에 없는 자료라면 한 번 더 고민하기도 한다.

결론은,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 책을 안 읽고 살았다. 우리 집에 유일하게 있던 책이 계몽사 세계문학이었는데, 그게 있어도 나는 책을 안 읽었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다. 웃기게도, 대학 때도 전공 서적 외에는,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면 책 거의 안 보고 살았다. 키다리 아저씨나 어린 왕자 같은 책도 나는 몇 년 전에야 읽었으니, 뭐 더 할 말이 있으랴... 내 주변의 독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은 사람들이던데, 나는 그게 가장 부럽더라. 그런 환경이 부럽고, 그렇게 오랜 시간 책을 읽어왔으니까 지금도 책을 좋아하는 거구나 싶어서 말이다.

고로,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없다. 그런데 만약 내가 어렸을 때 책을 읽었더라면, 아마 성인이 되어 읽은 <키다리 아저씨>를 가장 좋아하지 않았을까?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그냥 시집 몇 권, 소설 몇 권, 인문서 몇 권. 뭐 그 정도이고, 누가 놀랄 만한 책은 없는 것 같다. 아, 그런 건 있다. 같은 책이 두세 권씩 되는 책. 예전에 누가 왜 같은 책을 여러 권 사느냐고 물었는데,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았다. 내가 그렇게 산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더라. 누가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질문이 가장 난감하다. 취향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특히 책에서는 그게 크게 작용한다는 걸 알아서인지 책 추천 거의 안 한다. 누군가에게 선뜻 어떤 책을 권하고, 내 취향의 책을 선물하는 편은 아닌데, 가끔 사람들이 내가 두 권씩 가지고 있던 그 책을 궁금해하면 선물하곤 했다. 그리고 디자인이 예뻐서 두 권 세 권 구매한 책이 있다. 특별판으로 나와서 지금은 살 수 없다거나 하는 책들. 그런 책은 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보내는 내 마음이 괜히 더 좋아서. ^^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이상하게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어떤 작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독자와의 대화나 작가 팬 사인회 같은 행사도 많던데, 나는 굳이 그런 거 바란 적이 없는 듯하다. 그냥 책으로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이 질문을 받고 보니 오히려 내가 궁금하다. 나는 왜 작가나, 작가에게 궁금한 게 없을까, 하고...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돈키호테, 안나 카레니나, 나쓰메 소세키 전집, 등등 너무 많은데... 주로 고전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잘 읽히지 않아서 매번 포기했다. 다른 책에 밀리기도 했고... 아무 책도 안 읽고 오직 그 책만 읽어야 한다면서 독방에 갇히지 않는 이상 지금 그 책들을 읽는 건 쉽지 않을 듯하다. ‘이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자꾸 눈이 딴 데로 가서, 다른 책들에 손을 댄다. 깊게 읽지도 않고, 끝까지 읽지도 못할 거면서 매번 그런다.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바닷 마을 다이어리>를 영화로 못 본 터라, 책으로 읽어보려고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금방 읽힐 줄 알았는데 쉽게 안 읽히더라. 주변의 반응은 참으로 좋더만, 나에게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집중해서 읽을 수 없는 지금의 환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는데,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게 읽고 싶다. 새로 출간된 7권도 샀단 말이다.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세 권이나 가져가야 하나? 아니면, 세 권밖에 못 가져가는 건가?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는데, 세 권만 가져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다. 꼭 안 가져간 책들이 더 생각나기 마련이라 고르고 골라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책들로 챙겨야 할 텐데 걱정이다. 차라리 전자책으로 몇백 권 가져가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전기가 안 들어오는 것도 문제겠다. 충전을 못 하니 전자책도 못 볼 거고, 종이책으로 가져가자니 너무 무겁고... 그래도 고르라니 일단 종이책으로 골라보는데, 선택의 기준 가장 첫 번째가 이거다. 집중해서 읽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방대한 분량이 엄두가 안 나서 그동안 미루기만 했던 책들을 가져가야겠다. 그곳에 딱 그 책만 있다는데, 그 책을 읽기 싫어도 그 책밖에 없다는데 어쩌겠어. 고를 수 없으니 있는 책으로 읽어야지. 오직 그 책만 읽을 수밖에 없다니 얼마나 좋은 기회일까. <돈키호테>, <주석 달린 월든>, <국어사전> 이렇게 세 권. <돈키호테>는 정말 언젠가 한 번은 꼭 완독하고 싶은 책인데, 신간에 밀리고 게으름에 밀려 아직 펼쳐보지 못했다. 도서정가제 시행된 이후로 가장 먼저 산 책인데 말이다. <주석 달린 월든> 역시 마찬가지. 그 유명한 <월든>을 읽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책이 그렇게 안 읽히더라. 무인도에 갇혀 있으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어사전>은 언젠가 한 번은 꼭 처음부터 끝까지 사전에 실린 모든 단어를 읽어봐야지 싶었다. 어휘가 꽝인 내가 가장 궁금한 책이기도 하다. 한 번 읽고 시간 남으면 또 읽고 해서 늙어가는 기억력 속에서도 단어의 저장이 깊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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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잠깐 들춰봤다. 말 그대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읽으면 될 책 같았는데, 오히려 나는 저자의 말 몇 마디로 늙는다는 생각에 집중하게 됐다. 병 앞에서 죽어가는 시간에도 제대로 사는 일에 대해 말하는 듯한데, 그런 말보다, 죽음보다는 늙어간다는 것에 더 많은 부분을 떠올리다가 그 책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그날, 종일 늙음에 관한 책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너선 실버타운의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까지 구매목록에 넣게 되었는데, 제목에서부터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진리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소개 글에 써진 이 말 때문에 늙어간다는 것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노화와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비통한 심정을 25편의 시를 통해 보여주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유머로 승화시킨다’는 소개 글. 주제 자체가 어두워질 수 있음이 뻔했는데, 그 주제로 사람을 얼마나 부담 없고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기대하고 싶어져서다.

 

그게 불과 지난 주말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죽는다는 거나 늙는다는 것을 떠올리는 게 생각처럼 긍정적이게 되지 않았다. 어제오늘, 늙음에 대해 밀려오는 서글픔 때문에 도저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에 우울해졌다.

 

 

엄마 나이 쉰이었을 때, 엄마가 노래 부르듯 하던 말이 있다. ‘내 나이가 마흔이었으면 좋겠다...’ 그땐 나도 어렸을 때여서 그냥 어른들이 하는 말로 가볍게 생각했다. 항상 지나간 시간에 마음 두기 마련이니까, 그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엄마가 쉰다섯이 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내 나인 쉰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때는 느끼는 게 좀 달랐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에서 아쉬움을 찾고 있지만, 우리에게 더 해주지 것들에 미안함을 담은 말로 들렸다. 엄마로, 가장으로 사는 게 힘들었을 텐데, 부족한 많은 것에 계속 마음을 두었던 듯하다.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그때 기억에 엄마는 우리를 더 잘 키우기 위해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말을 했었는데... 아직 키워야 할 자식들이 많은데,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든데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마음이 아주 아프지 않았을까.

 

나도 점점 엄마의 나이를 따라가고 있다. 나이라는 숫자가 그렇고, 외모와 육체의 나이 듦이 그렇다. 엄마의 자식으로 살면서 의지했던 마음을, 이제는 엄마가 나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드러내곤 한다. 그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여전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사는 내가, 여전히 엄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니까. 그냥, 엄마의 뒤를 조용히 밟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서 요즘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가장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동안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다. 우리 형제들이 나이보다 어려 보이던 동안 외모는 엄마를 닮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이 부를 때 “학생~” 이렇게 부른 적이 많았다. 병원에 가서 진료받는 것만 아니면(병원은 접수할 때 이미 실제 나이가 그대로 기록되니까) 아무도 내 나이를 그대로 보진 않았다. 친구랑 같이 다녀도 한참 동생처럼 보여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곤 했는데, 올해 시작하면서 나의 외모는 내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봐도, 다른 사람이 봐도 내 나이로 보인다. 언제까지 동안으로 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게 불과 며칠 사이에 눈에 확 보일 정도일까. 엄마 나이 일흔이 넘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환갑이 지났느냐고 묻곤 했다. 엄마의 실제 나이보다 평균 열 살은 어리게 보였다. 남들이 봐도 내가 봐도 엄마의 실제 나이만큼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이제껏 늘 그랬는데, 이제는 남들이 아니라 우리 형제가 봐도 엄마가 나이 들어 보인다. 어제는, 내가 “엄마, 갑자기 왜 이렇게 늙었어?” 라고 물었더니, 안 그래도 언니랑 동생이 전화할 때마다 요즘 그 얘기를 한단다. “엄마, 지난번에 가서 보니까 많이 늙었더라...” 막내 남동생이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 그랬다. “엄마, 나 장가갈 때까지는 늙지 마. 결혼사진 찍을 때 엄마가 늙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늦은 나이에 남동생을 낳았고, 아무래도 자기가 자라는 동안 같이 나이 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 더 일찍 보였나 보다. 친구들의 엄마보다 한참 나이를 더 드신 엄마를 보는 게 슬펐을까. 다행히도 남동생이 결혼할 때 엄마는 젊어 보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런데 그때보다 몇 년이나 흘렀다고, 이제 엄마가 늙어 보인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엄마의 얼굴이 그 나이의 노인으로 보인다. 하아...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일에 나이 먹어가는 시간을 아파하고, 나이 든 사람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2년 넘게 치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별일 없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치과에 간다. 지난주 진료 때 입안에 다른 장치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고 해서 본을 뜨고 오늘 병원 가서 입안에 새로운 장치 하나를 붙였다. 최소 석 달은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말을 할 때나 뭔가를 입에 물고 있으면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발음이 정확하지도 않고 웅얼웅얼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칫 방심하면 입 옆으로 침이 줄줄 흐르고... 이걸 못해도 석 달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숨이 쉬어지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장치를 붙였다 떼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치위생사가 와서 괜찮은지 묻는다. 그에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런 질문이 나오더라. “어른들 틀니 하는 게 이런 원리인가요?” 그렇단다. 똑같단다. 이제야 틀니 하는 사람들 불편할 게 이해가 된다고, 지금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는 틀니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고 괜히 속상한 마음인데. 이런 거였구나.

 

치과에서 다음 진료를 예약하고 나와서 바로 안과로 갔다. 며칠 전부터 눈이 무겁고 답답하고, 책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진료도 받아야겠고, 안경도 새로 해야겠기에 겸사겸사 진료받으러 간 건데, 눈에 무슨 질병이 있는 건 아닌데, 시력이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고, 현대인의 생활 습관이 그러하고... 우리 몸은 늙어가고 있으니 눈도 마찬가지라고. 우리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했는데, 평균 수명의 절반쯤 살아온 나는 이미 구백 냥을 모두 써버린 것 같았다. 회복이 불가능하고 다시 채워지지 않는, 말 그대로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 한 생애의 시간인 건가... 안과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설마 내가? 내 눈이? 말도 안 돼. 좋은 눈은 아니었어도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을 단 한 번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아니겠지. 시력검사표를 들고 안경점으로 가서 다시 검사에 30여 분을 소요했다. 이런 시력에, 이런 상태에, 이런 렌즈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에게 노안이 온 건가요?”

“중년안이 시작되는 거죠. 요즘엔 70대까지는 중년안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중년안이라고 할게요.”

“아아... 선생님...”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계속 울었다. 그 큰 안경점에, 직원이 열 명도 넘게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건 말건 내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한참을 꺽꺽대다 고개를 들고 보니 나를 담당했던 안경사 아저씨가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요즘엔 삼십 대 초반에 중년안이 오기도 하고, 이런 렌즈는 초등학생이 끼기도 합니다.”

“아, 그래도... 지금은 아니에요.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지금 제 안경 보이시나요? 제 안경 렌즈가 바로 그런 렌즈입니다. 하나도 표가 안 나죠?”

그 안경사 아저씨의 실제 나이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보면오십 대로 보였다.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건지 몰라도, 그냥 다 이해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그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진정되고 나니, 다시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안경 주문서를 넣었다. 기존에 사던 안경 가격의 두 배에 가까운 돈을 내면서 손이 후덜덜 떨렸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는 생각에 더 슬퍼졌다. 나빠지는 몸을 유지라도 하려면 이래야 하는구나 싶어서...

안경은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라면서, 안경사 아저씨가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면서 그제야 말을 꺼낸다. “고객님이 갑자기 우셔서 아까는 제가 너무 당황했어요. 감수성이 예민하신가 봐요.” 감수성이고 뭐고, 하나도 귀에 안 들린다. 그냥 내 눈이 너무 늙어버렸다는 진실만 깊게 새겨졌다. 언젠가, 노안은 예방할 순 없지만, 진행을 늦출 수는 있다고 들었다. 눈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몸에 찾아오는 대부분 병에서 들어온 말과 같다. 우리 몸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거였다. 예방도 불가능하고, 진행도 막을 수 없고, 다만, 그 진행을 늦추는 게 최선인 처방으로...

 

 

 

 

 

 

 

 

 

 

 

도리언 그레이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이 먹지 않는다면, 늙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건 몰라도 눈이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는데, 결국 내 몸에서 그 눈이 가장 먼저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은 점점 책을 거부하는 눈이 되어 간다. 눈물이 안경점에서 멈춘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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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가 선거인데, 그래서인지 이번 9권의 내용이 남다르게 들린다.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차에서 틀어놓은 선거 유세 녹음 방송과 선거 운동원들의 길거리 홍보를 보고 있노라면, 후보자들은 무엇을 위해 선거에 나왔나 싶었다. 개인의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올바르게 가기 위한 사회를 만들고 싶을 수도 있다. 솔직히 정치인들에 대해 호감은 없지만, 때가 되었고 필요한 자리이니 사람을 뽑는구나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봐도 선거 운동은 적응하기 힘들다.

 

학생회 간부 선거를 다룬 9권이다. 아이들은 어떤 학교로 만들고 싶어서 이 선거에 나온 걸까. 아주 단순한 마음이기도 하고, 그동안 쌓여왔던 생각들을 뿜어내는 기회로 만들기도 하는 아이들이다. 후보로 나온 아이들의 마음과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품고 나왔다. 자기 꿈을 위해 도전하고, 내신을 위한 목적으로 후보로 나오고, 학생회 자체에 즐거움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른들의 선거판과 다를 게 없는데도 분명 다르다. 아이들은 어떤 계산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솔직하고자 한다. 자기 마음이 가장 원하는 것을 목적에 두고 나선 것이다.

 

 

학생회 후보 연설 대회를 통해 아이들의 진심을 볼 수 있었는데, 저마다의 공약을 걸고 간부가 되기 위한 목적을 드러낸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아이, 현재의 선거 방식이 가진 문제를 언급하며 어떤 식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 방안을 내비친다. 무효표가 나오는 이유, 무효표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그로 인해 공개 투표에 가깝게 진행되었던 과거 어느 학교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그래서 지금 선거 방식이 어떤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지 보게 하면서 그때의 일을 대응책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물론 그 아이의 대안이 100% 옳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아무도 현재의 투표 방식에 문제가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아이의 연설은 선거를 목적에 두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문제점은 없는지, 개선해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보완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어른들의 선거판 역시 이런 게 가장 필요한 거 아닐까.

 

현재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 아이의 연설 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들의 마음은 예상외로 흘러간다. 별것 아닌 일을 문제로 만들어 시끄럽게 했다고, 가장 먼저 탈락할 거로 생각했던 후보가 학생회를 이끌게 된다. 다른 간부들 역시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하다고 맞는 후보들이 선정되었을 테지.

 

학생회 간부 선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다양한 사고가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서 부족하고 어긋난 방식이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게 목적이라고. 선거는 분명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방식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하는 듯하다. 학교 안에서 학교 밖 세상을 먼저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다.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이유를 그대로 드러내는 '학생회 간부 선거 편'이다. 열심히 제 자리에 맞게 일하는 후보도 중요하고 투표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투표가 왜 진행되고 있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않기를 바란다.

 

 

 

소란스럽지만 현명하게 치러낸 선거. 선거가 끝나고 아이들에게 다가온 건 히자쿠라야마 중학교 문화제다. 각자의 이름을 걸고 다양한 분야의 축제를 준비한다. 특히 이 아이들이 준비하는 연극이 주를 이루는 10권인데, 아이들이 직접 쓴 원고로 오르는 극을 준비하는 과정이 볼만하다. ‘이거 정말 아이들이 한 거 맞아?’ 하는 놀라움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누군가가 쓴 원고가 인정받고, 아이들은 그 대본을 바탕으로 오를 연극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역시나 불거진 일들이 있는데, 그건 하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내야 할 관문으로 보인다.

 

특히 스즈키 선생님 지도로 아이들은 연기를 배우는데, 그게 너무 진지해서 숨죽이고 읽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하는 문화제, 그냥저냥 빨리 해치우고 지나가야 할 숙제처럼 여겼는데, 막상 이를 대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도 자세가 너무 진지하다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십 년에 한 번이라도 잘,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임을 간과했던 거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학급 임원도 하기 싫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하다. 이게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인지, 아니면 이 만화에서 유독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문화제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너무 맘에 들었다.

 

 

연극 한 편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한지, 그 한 무대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이 어떻게 ‘함께’임을 배우는지 보여준다. 캐스팅 과정 역시 신중하고 공정하게 하려고 애쓰는 스즈키 선생님의 방식이 맘에 들었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을 거다. 역할부터 맡기지 않고, 극의 모든 과정과 분위기를 소화하는 걸 지켜본 다음, 그 배역에 어울리는 아이를 캐스팅하는 순서가 긍정으로 다가온다. 배역뿐만 아니라 연극을 올리는데 필요한 스태프 역시 존재감을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누군 하나 없어서는 안 될 구성원인 거다.

 

학교 축제가 단순히 아이들의 하루 놀이 정도로 멈추는 게 아니었다. 그 준비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겪을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현실과 조금은 동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 또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 들어주어도 괜찮다.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누구나 겪을지도 모를 일들을 언급한다. 히키코모리가 되어 방황하는 청춘,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과정, 마음이 아픈 병이 왜, 누구에게 다가올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하는 것까지. 다양한 소재로 중학교 2학년 아이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모습을 비친다.

 

공부하기에도 바쁘기 만한 시간이라고 여겼는데, 이런 행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태도에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과 내가 보는 학교의 분위기가 이 만화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서다. 배우는 목적으로 존재하는 게 학교라면, 그 배움을 끌어주는 게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이 머릿속에 담는 지식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도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문화제 편에서 줄곧 생각했던 게 그런 거다. 성적을 위한 학습,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지혜와 여유를 배우는 방법을 끌어주는 곳이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10권의 문화제가 이어진다. 아직 연극은 상연되기 전이고, 배역도 정해지지 않았다. 스즈키 선생님은 모든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 아이들 역시 어떤 역할이 주어질지 몰라 모든 연습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제들이 있다. 아니, 이건 문제라기보다는 스즈키 선생님이 아이들의 성장을 이뤄내는 교육이라고 봐도 좋겠다. 분명 연기는 잘하는데, 무대 위에 서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대역이라는 역할을 주려 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작년에도 거절한 것처럼 이번에도 거절한다.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스즈키 선생님은 그 아이가 조금 더 용기 낼 수 있도록 부담 주지 않으면서 기회를 잡아보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연극 연습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아이들은 연극에 푹 빠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그 시간의 매력에 빠진 거다. 실제 무대 위도 아니고 관객도 없는데, 그 연습 시간에 몰입하게 된다. 그 안에 있던, 대역을 맡기고 싶었던 아이. 어느 순간 역할에 빠져들면서 연극 속으로 스며든다. 아직은 완벽하게 용기가 장착된 건 아닐지라도, 그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이미 용기는 시작된 거다.

 

굳이 이 문화제에서 아이들의 연극을 두 권이나 되는 분량에 담아냈을까 궁금했다. 나의 추측이지만, 그건 아마도 스즈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다양한 가치관의 형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극의 흐름은 하나의 인생을 보는 듯했고, 각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 역할을 살아야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보여주면서도, 그 삶을 이뤄 가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건 연극 준비 과정에서부터 누누이 강조되어 보였던 점이다. 역할 분담에서부터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내용을 서로 주고받으며, 얼마나 몰입하고 이해하면서 캐릭터를 살려내고 있는지 보면, 알 만하다. 극장판 「스즈키 선생님」의 무대가 된 게 문화제 편이라는데, 그럴 만하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이 만화의 주제에 가장 걸맞은 에피소드였다. 함께 이뤄가는 과정을 배우는 일,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가는 시간, 아직은 어리지만 그래서 더 확인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기회. 거기에 선생님이란 역할로 함께 하는 스즈키까지 동반 성장하는 시간을 만든다.

 

 

궁금하지만 낯설게 다가왔던 이 시리즈가 11권으로 다 끝났다. 다 읽었지만, 여전히 이해 못 할 설정도 있고, 다양한 면을 보게 하는 장점도 있다. 문화의 차이라고 봐도 좋고, 세대 차이라고 봐도 괜찮다. 무엇보다 일어나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선생님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데, 어떻게 일어날 일이라고 예상한 일만 생길까. 언제 어디서든 기존의 생각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게 당연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라는 건 정해진 대로 일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이 만화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 이 아이들의 행동이나 다른 설정들이 때로 과격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그 정도의 마음을 가진 이들을 지켜보게 하면서, 나와 다른 면면을 경험하게 하는 것. 가르침은 계속된다고 말하며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의미도 충분히 전달된다. 그 배움, 그 가르침이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제법 긴 호흡으로, 나와 다른 마음을 알아가는 마음으로, 배우는 시선으로 읽게 된 책이다. 언제 또 시리즈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제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겠다. 이 아이들과 스즈키 선생님의 성장이 여전히 궁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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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김밥을 못 싼다. 초등학교 소풍 때부터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간 적이 없다. 지금에야 드는 의문인데, 분명 유치원 때도 소풍을 갔고, 엄마도 같이 따라갔는데, 그때는 어떤 도시락을 싸갔던 걸까?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 소풍 도시락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그런 기억에서 엄마가 김밥을 싸주지 않은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실인데 어쩌랴. 가까이 사는 친구 엄마가 내 것 김밥까지 싸주시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소풍 도시락을 거의 안 가지고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가방도 안 들고 소풍을 다녔으니 뭐, 도시락이 문제였겠나. 그런데도 유독 초등학교 소풍 도시락이 생각나는 건, 누구나 다 싸서 왔던 그 '김밥'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 나이의 소풍 도시락에 김밥이 없다는 건 큰 슬픔이었고, 창피함이었고, 엄마를 원망할 만한 일이었던 거다. 지금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싸는 김에 우리 딸 것도 하나 싸줘.'라고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고, 친구 엄마가 도시락을 싸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김밥을 못 싼다는 게 무슨 큰일인가 싶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은, 가끔 밥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동네 분식점에서 김밥 두세 줄로 한 끼 때우는 엄마와 나를 떠올려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말이다. (여기서 살짝 투정을 더 부려보자면, 우리 엄마는 김밥도 못 싸지만, 떡볶이도 못 만들고, 카레도 못 한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ㅠㅠ) 나를 슬프게 했던 김밥이 이제는 그저 그런, 한 끼를 채우는 음식이 되어버렸다는 게 웃음 날 뿐.

 

 

 

 

 

 

 

 

 

<바나나 우유>저자 김주현의 기억 속, 세월 속 음식들도 그런 걸까. 어떤 간절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이다. 좋아서 같이 먹고 싶었던, 따뜻해서 포근했던,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서 생각나는 맛. 오늘을 사는 모든 순간에, 그렇게 한 번씩 치고 올라오는 감정이 동시에 따라오는 음식이 있던 거다. 가족, 사랑, 일상, 여행. 삶을 채우는 어떤 테마를 떠올려도 따라오는 음식이 있다. 오늘의 절망을 목으로 넘기며 진한 한숨의 캬아~ 소리 내고 싶은 소주 한 잔, 너무 짧게 왔다 가는 벚꽃이 아쉬워 차로 마시는 봄날의 시간, 기어코 나오려고 하는 그 울음을 참아야만 했던 날 마시는 아포가토, 청춘의 사랑이 상큼하게 혀끝에 닿는 아이스티, 어려운 시절 최고의 음식이었던 탕수육과 비프가스, 늦은 밤 퇴근길 부모님이 품에 안고 왔을 뜨끈한 만두, 그리고 빨간 소시지 달걀말이. 아, 나도 잊을 수가 없다. 분홍 소시지...

 

나는 그걸 분홍 소시지라고 부르는데, 어렸을 적 항상 도시락 반찬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음식이다. 지금이야 몇 천원이면 큰 거 하나 사놓고 몇 날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땐 그거 한 조각이 왜 그렇게 간절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무 날에도 생각나지만, 특히 명절날 더 생각이 난다. 핑계 삼아 큰 거 하나 사두려고.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전 부친다고 엄마가 장 볼 때, 나는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카트에 넣는다. 엄마는, 입안에서 달라붙고 밀가루 범벅이라 맛도 없는데 뭐하러 그걸 사냐고, 먹을 사람도 없다면서 잔소리를 한다. 그렇다고 안 살 나도 아닌지라, 내가 혼자 다 먹겠다며 기어코 하나 사서 명절 전 부칠 때 같이 부쳤다. 그러고 나서, 명절날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는데, 제부가 분홍 소시지를 엄청 맛있게, 많이 먹는 거였다. 엄마가 놀라 제부에게 물었다. “아무개야, 그 소시지가 그렇게 맛있냐?”, “어머니, 저 이거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저희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엄마가 이걸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신 적이 거의 없어요. 너무 맛있네요. (쩝쩝~)” 와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분홍 소시지를 보고 나만 그런 기억이 있는 게 아니었던 거다. 내 눈은 찌릿~ 엄마를 한 번 향했고 엄마는 의외라는 듯 웃고 말았다. 그 후로 엄마는 명절이 되면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장바구니에 넣는다. 늙어서도 말 안 듣는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뭘 먹어도 예쁘기만 한 막내 사위를 위해서... 엄마의 예쁜 막내 사위가 좋아하는 분홍 소시지의 발견 내가 했거든?!

 

먹는 것에 관심 없어 하면서도 가끔 허기질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배고파...’ 하고 혼잣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더라. 평소 먹던 양의 몇 배를 먹어도 배부름을 느낄 수가 없다. 늘 그렇듯,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때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픈 거다. 그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유명 맛집의 소문난 음식도 아니다. 그때 그 순간, 내가 기억하는, 나를 데워줄 음식이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라 불러도 좋을 것들. 저자도 마찬가지였겠지. 웃고 울던 시절의 그리움에 음식을 부른다. 서글펐던 사랑이 끝나고도 어김없이 위로의 음식을 떠올린다. 뒤늦게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채곤 미안함에 후회도 한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눈물 나려고 할 때, 뜨거운 국물 한 모금에 오늘을 견뎌내기도 하는, 그런 일상. 특별할 건 없지만 어느 순간 특별해지고야 마는 마법을 일으킨다. 저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던 그때, 저자만의 특별함이 시작되었을 때, 공감을 일으키며 읽는 이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세월이 흘러서 뒤를 돌아보면,

아, 그때, 그 시각, 그 1초가 생각나.

그때 그 말을 할 걸, 그때 시원하게 화를 낼 걸, 그때 웃어줄걸…….

타이밍을 놓친 파스타는 형편없지. (111페이지)

 

2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꺼내며 노란 표지와 바나나 우유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느낌에 잠깐 당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냥 흐르는 시간 속 맛있는 음식들로 다가와서 웃음 나고 재밌었고,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며 눈과 입이 행복하기만 했다. 이번에 다시 만나는 이 글에서는 담담하지만 조금 더 깊어진 울림이 있더라. 지금 내 마음이 그때보다 더 고요해져서 그런지 왜인지... 그냥, 막연하게 떠올리는 음식이 아니라, 나에게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흘러서 되돌아보면 오늘을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음식이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우리가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또 생길 텐데, 그 매개가 음식이라니 글이 더 맛있어진다.

 

작년에 접했던 어떤 글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광하느냐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맞다. 사람이 자꾸 뒤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데,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 긴장했었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만 떠올리고 그리워한다면 좋을 건 없을 거다. 내일을 살기 위해 우선 앞을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오늘을 조금 더 버티게 하고, 어제의 추억으로 오늘이 웃는 날이 된다면 가끔은 이런 그리움을 불러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여전히 앞을 보고 살아가고 달려야 하는 게 우리 삶이지만, 우리 추억 속에 이런 음식 하나 없다면 사는 게 너무 서늘하잖아. 맛있는 위로가 뭔지 모른 채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건 별로다. ^^ 저자를 위로해준 게 팔 할이 음식이었다는 게 나와는 좀 다르지만, 그 위로의 지분이 좀 다를 뿐이지 음식이 그 위로에 들어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지나간 사랑도, 울고 웃으며 묶여있는 가족도, 힘들어서 잘라내고 싶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힘든 세 세상살이에서도, 음식이 불러오는 화해와 뜨끈함, 개운함, 쫀득함, 쌉싸래함이 있어서 다행이다. 삶을 아우르는 다양한 맛을 이렇게 알아간다...

 

아쉬워서 그리운 것들,

혹여 한번 다시 찾을 날이 있겠거니, 그렇게 그리워하며

사진 한 장 품고 사는 거. 심장에 그런 아쉽고 그리운 순간들을

진 한 장처럼 품고 사는 거. 그게 꼭 바보 같기만 한 일은 아닌 듯하다. (248페이지)

 

노트를 펴고 먹고 싶은 목록을 하나씩 채우는 요즘이다. 얼마 전부터 치과 진료를 받고 있다. 이 치료가 다 끝나려면 빠르면 1년, 길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릴 거라는 말에 ‘음, 그렇구나.’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삼겹살까지 먹고 싶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전에 엄마가 삼겹살 먹고 싶다고 할 때 못 이기는 척 먹으러 갈 것을. 엄마와 나는 식성이 달라서 같이 외식하기가 쉽지 않은데, 삼겹살도 그중 하나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상황이 되고 보니 엄마가 먹고 싶다던 음식부터 평소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던 음식들까지 떠오르곤 한다. 거기에 보태져 항상 맛있게 먹던 음식까지 덩달아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바삭한 튀김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셔야지. 절반쯤 익힌 스테이크도 먹고 싶은데. 엄마가 맛있게 담근 총각김치도 손으로 집어 먹어야겠고. 아주 진~한 초콜릿무스 케이크도 목록에 올렸다. 아, 김밥도 꼭 먹을 거다. 이번엔 사 먹지 않고 내가 직접 싸서 엄마에게도 줘야지. 하아, 슬프게도,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배고픔도 커진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을 떠올릴 때, 나는 무슨 음식을 소환하고 있을까.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웃음 나게 했던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데, 꼭 그게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시간을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그 음식은 충분히 맛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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