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
훈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그려, 안 그려?! 응?! 『아이러니』

우연히 재방송으로 본 <1박 2일> 이화여대 특강에서 차태현이 그러더라. 이제껏 자기 인생이, 하나도 계획한 대로 가지 않더라는... 강당에 모인 많은 학생이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었다. 거의 두 배의 나이 차가 있는 서로에게 얼마나 공감할까 싶었는데, 그 학생들의 나이에서는 그 나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경험으로 그의 말에 알아들었을 거다.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는 또 그만큼 쌓인 연륜으로 공감했을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13년 전에 원수로 인연을 끝맺었던 준과 세진이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듯하다. 산다는 게 알 수 없는 것투성이라고. 세진의 마음속 외침은 ‘내 인생 계획에 이 녀석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거든?!’ 이라고.

방송국에서 라디오 피디 세진의 입지가 점점 줄어간다. 맡은 프로그램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기본이고, 청취율까지 저조하다. 국장은 매일 험한 소리를 하며 이를 득득 갈고 있다. 이러다 언제 패대기쳐질지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라디오 CP로 경쟁 방송사의 유능한 인재가 스카우트됐단다. 그 피디 때문에 세진의 방송 청취율이 바닥을 기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사람이 이곳에 모셔져(?) 왔다니 기분이 영 꽝이다. 그런데 이거 웬일? 스카우트됐다는 피디가 김준이었어? 아, 진짜 되는 일 하나도 없다. ‘어떻게 저 인간이 여길 와? 왜 내 앞에 보이는 거야?’ 김준은 국장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것도 모자라 세진의 갑이 되어버린다. 아, 진짜 자존심 상해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마음만 그래, 마음만). 설상가상 같은 방송국에서 만나던 연인 현민은 헤어지자고 한다. 사내 공개연애를 했는데, 공개로 망신당하게 생겼다. 개차반 애인에게 까여, 원수 같은 동창생은 상사로 와, 국장은 잘라낼 틈만 보고 있어, 휴... 인생 제대로 꼬여간다.

방송국이라는 배경, 그것도 한밤의 라디오가 주는 묘한 매력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했던 책이다. 작가의 전작을 한 번도 못 만난 터라 그 분위기를 알 수도 없었지만, 아마 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해도 한번은 읽어봤을 듯하다. 아무래도, 아직도 아날로그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라디오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다. ^^ 만약, 무인도에 TV를 가져갈래, 라디오를 가져갈래, 하고 물으면 고민도 없이 라디오라고 대답할 거다. 그만큼 그 분위기를 좋아한다. 한밤중에 라디오 켜 놓고 책 읽는 거 누가 방해하면 짜증이 날 정도로 싫어했는데, 요즘엔 그 시간에 눈이 피곤해져서 누워있거나, 아니면 PC를 켜놓고 라디오 듣느라 책이 자주 제외되지만, 어쨌든 나도 그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을 맛보며 자란 터라, 어쩔 수 없이 그 정서를 잊을 수는 없다. 요즘은 휴대폰으로도 듣고, 바로바로 신청곡을 전송하기도 하는, 아날로그지만 디지털 방식이 되어버린 라디오지만, 전파 타고 흐르는 그 공감대를 생각하면 괜히 더 훈훈해진다. 그 공간에서 함께할 남자와 여자의 케미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던 거다.

얘네들은 왜 그랬을까? 1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렇게 원수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성장했기에 여자는 쌈닭이 되어 있고, 남자는 검사를 때려치우고 나와 방송국에 터를 잡은 걸까. 방송국에서 서로 부딪히며 하루하루가 쌓여가고, 각자 자기 방송에 대한 애정과 프로의식이 탄탄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지금 상대의 모습이 왜 그런 건지 알아지는 시간이 보인다. 그 와중에 상대를 향한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물론이고. 세진에게 방송국은 더는 스트레스와 눌림을 당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꽃밭이자,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태도를 가르쳐주는 학교나 다름없다. 그동안 꼬여왔던 인생이 이렇게 풀리려나 보다. 오해가 풀리고, 사람을 보는 눈이 키워지고, 마음을 풀어놓으니 세상을 사는 법이 이렇게 달라지나? (아, 이 긍정마인드 어쩔껴. 내가 배워야긋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을 왜 그렇게 아득바득 싸우려는 자세로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죽일 듯이 미웠을 정도로 서로를 봤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서로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경쟁자였음은 인정하자. 가정의 무너진 경제에 더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었던 세진이나, 세진에게 뒤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공부했던 준이나... 드라마 <닥터스>에서 국일 병원 부원장 김태호(장현성)는 진서우(이성경)에게 ‘유혜정(박신혜) 선생은 진 선생에게 좋은 경쟁 상대가 될 거야’ 라고 말했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가 어느 정도 호흡의 흐름을 잡아주는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든 좋은 경쟁자는 그 자신을 한 뼘 성장하게 해주는 듯하다. 『아이러니』의 두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 김준에게는 세진이 그랬고, 세진에게는 김준이 그랬다. 서로 1, 2위를 다투면서 그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겠지만, 그래서 더 학업에 매진하는 정신력을 키워준 게 아니었을까. 물론 그 이면에는 서로가 알지 못했던 오해가 쌓여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와서 그 시간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의미도 없다. 지금이 좋으니, 됐다. 서로 열심히 달려서 지금 자기의 자리에 안착했고, 그 자리의 일을 좋아하고, 또 더 좋은 라디오 방송을 위해 애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니 말이다. 오해를 쌓은 채로 살아왔던 13년이 아깝고 억울하기보다, 지금의 상황과 마음이 더 애틋하고 감사하니 저절로 풀렸을 거라 믿는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연인이 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처럼, 우리 앞에 놓인 많은 것도 마찬가지. 그냥 오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마음을 채우며 살아가는 일이면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