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게 다정하게, 가까이
하명희 지음, 김효정(밤삼킨별) 사진 / 시공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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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끔 꽂히는 드라마 한두 편을 보는 정도라 잘 알지 못했다. 그 당시 입소문으로 자꾸 퍼지던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를 중간부터 보게 되었는데, 이 드라마 은근 매력적이더라. 누구를 욕하고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은 있는데, 각 캐릭터들에게 한 가지 마음만 보낼 수 없던 거다. '이럴 수도 있을까?' 싶었다가, '그래, 이 상황에서 이런 마음도 있을 수 있어.' 하는 온갖 감정이 왔다 갔다 했다. 마음속에 자리한 그 많은 말이 한마디로 쉽게 나오지 않았었다. '이거 뭐지?' 하는 어지러운 기분. 그 이후로 방영된 <상류사회>는 보지 못했지만, 대신 하명희의 글을 만났다.

 

드라마와 얼마나 다를까, 혹은 얼마나 비슷할까. 몰랐다면 백지에서 시작했을 텐데, 이미 저자의 드라마를 본 터라 비교 아닌 비교를 하면서 읽게 됐다. 드라마에서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대사는 어쩌면 저자의 성격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에세이 <따뜻하게 다정하게, 가까이>를 읽다가, 드라마 <닥터스>에서 홍지홍(김래원) 선생이 유혜정(박신혜)에게 직선으로 드러내는 마음을 보는 듯한 시원함을 발견하곤 했다. 역시, 사이다 같은 기분은 잠시 잠깐 한 편의 드라마에서만 나온 건 아니었어, 하는 안도와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동시에 심어준다.

 

 

저자는 살아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며,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 중 하나가 에세이를 출간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저자의 다음 드라마는 뭐가 될까 궁금했던 정도로 이름을 기억했다. 저자의 드라마나 소설을 봤어도,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어도, 내가 이 책을 읽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휘리릭 넘기던 페이지의 한 구절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 사람의 사정은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면 정확히 모른다. 인간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모든 것에 한계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범위의 삶과 다른 삶에 대해선 공부해야 알 수 있다.

상대방을 위한다고 충고하는 것보단 밥 한 끼 사주는 편이 낫다. (81페이지)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면 정확히 모르는 것들. 때로 상대방에 대해 다 안다고 자만하는 것들. 우리는 같지 않다. 비슷하게 보이고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완전히 같을 수가 없는 거다.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거, 아닌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어쩌면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 못 한 채로 보고 있는데, 마치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경험해본 바, 말이 많아지면 실수를 하더라. 사람을 상처 내는 것도 말로 시작한다. 마치 그 사람에 대해 경험하지 않은 부분까지 다 아는 것처럼 말이 나올 때는 부담스럽고 불편해진다.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아는 만큼만 보고,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아는 만큼만 이해하고, 다가가면 정말 안 되는 건가. 다 알면 좋겠지만 굳이 그게 아니어도 괜찮잖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적당한 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아니었나? 살아온 시간과 과정이 다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 안에 자신만의 상처가 있다. 개인의 상처는 객관적인 게 아니다. 얼굴만 봐서는 그 사람이 뭐로 아파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어려운 거다. 어려운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선 우선 자신이 어떤 말을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말조심만 해도 인간관계 절반은 성공이다. (62페이지)

 

저 부분을 한참 들여다보다,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읽었다. 분량도 짧아서 읽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새삼스러운 말도 없었다. 그저, 저자의 말투가 이렇구나, 하는 정도.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말의 방향을 가만히 살펴보니, 타인을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는 거였다.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짜증 냈던 거, 내가 알 수 없어서 부담스럽고 귀찮았던 것들을 꺼내며 말하는 듯했다. 차마 말하지 않은 것들을 대신 들려주는 기분. 대부분 내가 경험했던 순간들, 감정들이었기에 조금만 더 들어보자, 하는 의미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다. 무조건 착하고 옳은 것만을 강요하는 위로가 아니라, 아닌 건 아니 거라고 말하는 그 고요한 독설이 좋았다. 독설이라고 하기에 민망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너무 착한 사람 흉내만 내면서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어서 좋았다는 거다.

 

삶의 특별함은 시간이 흐른 후, 혹은 어느 날의 느낌표로 알게 되는 듯하다. 불행한 삶이 괴롭고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는 것도 시선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행복하기만 하면 그 외의 불행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항상 옳은 선택이라고만 믿는다면 잘못된 길을 알지 못할 것이기에. 일상에서 치고받는 순간들이 가져오는 것이 꼭 나쁘게만 작용하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 시선과 감정의 다양성은 인간관계로 이어져 삶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과 이어져 나아가는 중에도 우리가 미처 짚어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표현하는 많은 것,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리는 이중성, 사랑을 둘러싼 사람의 마음.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고 다 알 수 있는 게 없어서, 때로 그 순간이 죽을 것처럼 아프지만 또 그렇게 받아들이며 흘러간다. 그렇게 겪으며 무심코 알게 되는 것들. 사람이, 사랑이, 그 순간의 아픔을 상쇄시켜주기도 하고...

 

인류가 시작되면서, 사랑이 만들어지면서, 사랑도 함께 시작됐다. 사람에게 사랑은 유전자에 깊숙이 박힌 본능이다.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건 사랑하는 능력을 더 많이 가졌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은 굉장히 좋은 성품을 만든다. 좋은 성품은 다른 사람들도 기쁘게 하고, 자신도 기쁘게 한다. 사랑을 유지하는 건 사랑에 빠지는 거보다 훨씬 더 어렵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거다. (109페이지)

 

인생 뭐 별거 없다고 생각하지만, 살면서 겪게 되는 감정들이 특별해지고 문득 알게 되는 것들이 쌓여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할 때, '별것 있는' 인생이 될 것만 같다. 저자가 드라마와 글을 통해서,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을 하게 되는 것에서 그걸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살아보면서 알 수 있는 일이 그 순간 하나둘씩 늘어갈 때, 자신에게로 향하는 별것 있는 순간들이 하나둘씩 쌓여간다는 것을, 저자의 짧은 글에 함축된 말을, 이렇게 듣는다.

 

 

드라마 속의 대사가 저자의 에세이에 그대로 묻어 있다. 독설 같지만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직선으로 향하는 말들이 듣기 좋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 <닥터스>를 더 집중해서 보고 싶어진다. 4회에선가, 진서우(이성경)가 부원장 김태호(장현성)에게 유혜정을 디스하면서 했던 말에 김태호는 '말씀드릴 수 없는 사생활은 말할 수 있는 사생활보다 더 인신공격'이라고 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상처 입히고, 비열한 공격인지 전한다. 유혜정과 진서우 사이에 필요한 건 페어플레이다. 의사로, 인간으로 살아가는 올바른 태도. 너무 무겁지 않게 흐르는 이 분위기가 좋아서 4회까지 본방사수했다. 앞으로 이 드라마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계속 보게 될 듯하다. 의학드라마이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더 눈에 들어오고, 이미 시작된 유혜정과 홍지홍의 로맨스가 더 '심쿵'하게 하지만, 의학에 관해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하명희 특유의 그 인간적인 이야기가 돋보여도 괜찮을 듯하다.

 

 

그나저나, 나는 배우가 나이 들어가는 게 참 보기 좋더라. 김래원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을 봐도 비슷하다. <옥탑방 고양이>가 인기였을 때도 김래원이 좋다는 생각 못했는데, 이번 드라마에서는 확실히 김래원은 나이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도 그는 그때보다 나이가 더 들었겠지만, 이번 드라마에서 나이 마흔으로 등장하는 설정이 괜히 기분 좋다. 인간미 넘치고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 보여줬으면 좋겠다. 현실에서 경험한 병원이나 의사를 생각하면 홍지홍 쌤 캐릭터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듯해 유감이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만나고 싶은, 인간적이고 마음 쏟아 붓는 의사로 남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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