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송지성 지음 / 로코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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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외로움이 거둬지는 시간... 『20일』

 

외로운데 외롭다고 말하지 못하는, 외로울 텐데 외롭지 않으려 애쓰는, 외로우면 안 될 것 같은 외로움. 말이 좀 안 되나? 그럼 이런 거. 외로움이 너무 익숙해서 외로운데 외로운지도 모르고, 외로움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마음. 『20일』일 속의 인물들에게 그런 걸 봤다. 섬으로 밀려 들어온 애희에게, 섬이 싫어서 떠난 윤기에게, 섬의 모든 것이 가족 그 자체라 여기며 사는 어매, 아재들. 각자의 외로움에 치여 그 외로움을 묻어버리거나, 서로의 외로움을 똘똘 뭉쳐 없애버리거나...

 

외로움의 곁에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사무치게 이기적인지. 전염병처럼 퍼뜨려 놓고 수습은 하지 않는 그런 이기적인 외로움. 윤기는 새벽녘 나가는 아배의 등에서 그 모습을 수도 없이 발견했다. (368페이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윤기는 섬으로 다시 들어왔다. 다음 배가 들어오면 나갈 거다. 지긋지긋해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섬을 떠났는데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 온 동네의 어매 아재들이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했다. 아니다. 그들이 상주 같았다. 모두가 가족처럼 지내온 사람들이니 이런 장례가 낯설지 않다. 그 풍경 속의 낯선 여자, 애희. 모두가 나이 든 사람들뿐인 그곳에 젊은 여자가 분주히 움직인다. 조용하게 움직이면서도 그 흔적을 남긴다. 관심 없다. 상관도 없다. 이 섬에도 그 여자에게도. 그런데도 자꾸만 윤기를 끌어당긴다. 어매 아재들의 정이, 애희의 이상한 흔적들이... 닷새에 한 번 들어오는 배. 그 배를 놓치면 다시 닷새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섬에서는 그의 삶이 없다. 고기를 잡고, 어망을 손보며 보내는 하루, 바다로 나간 배가 제대로 돌아올까 걱정하면서 부둣가를 서성이는 불안함 따위 겪고 싶지 않은데, 뭔가가 자꾸 윤기를 붙잡고 있다.

 

아버지가 남긴 한 문장, 스무날을 섬에서 지내고 가라는 말. 그 말을 지키려고 했던 건 아니다. 처음 들어와서 닷새만 지나면 바로 나가려고 했다. 미련도 없을 거로 여겼다. 한 번 놓치고, 두 번 놓치고... 그렇게 쌓여 스무날을 섬에서 보냈다. 스무날이 지나고 윤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숨은 것처럼 섬으로 들어온 애희가 윤기에게 전하고 싶은 건 뭘까.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해하고 싶지 않던 것들이 무엇을 보여주게 될까.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눈빛이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그래서일까. 애희가 윤기를 향하게 하는 무엇, 윤기가 애희에게 향할 수밖에 없던 것은. 민철 아재가 배에 그린 그림이 그의 진심을 대신하는 것처럼, 그 그림을 보고 단번에 알아챈 윤기처럼, 윤기를 그 배로 데려가 보여주는 게 마치 자기 할 일이었다는 애희의 표정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왜 그토록 모른 척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마음을 읽어도 의미를 담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배가 싫어 떠났고, 무엇도 남겨진 것 없을 거라 여겼던 섬이 싫어 떠났는데, 왜 자꾸 다른 감정이 침투하려는 것인지 감당할 수 없어서 화가 나서일지도. 그래서 다 모른 채로 떠나고 싶었을지도...

 

참 이상도 하지. 그런 마음으로 있을 때마다 자꾸 다른 게 들러붙어 감정을 하나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 미우면 미운 채로 남겨두지, 왜 자꾸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 미처 듣지 못한 말을 굳이 듣게 하려 애쓰는 사람들의 진심이 보이지만, 그건 그 과정을 몰랐던 사람들이 부리는 오지랖 아닐까. 이 부분에서 나는 어느 작은 마을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정을 나누는 거라는 이유로 타인의 삶에 온갖 간섭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에 화가 났다. 나는 정말 이런 거 싫은데. 가깝게 지낸다면서 거리감 제로인 삶을 강요하는 분위기. 고립된 곳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랜 시간 그런 생활이 당연한 것으로 쌓인 삶의 흔적들일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의 삶이다. 적당한 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믿는 나에게 그 섬의 분위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윤기가 섬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보기를 방해하는 많은 것 때문에.

 

어쨌든 이야기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애희와 윤기의 로맨스가 이루어지는 건 당연해 보였다. 섬으로 들어온 여자와 잠시라도 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남자의 만남이 '민철 아재'라는 매개로 무슨 운명처럼 엮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나온 결말이다. 이 소설은 오히려 그 과정과 시간의 흐름에서 매력을 뽐낸다. 취향이 아니면 읽기 힘든 소설인 듯도 하다. 이 책을 2주 동안 읽었다. 처음에는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읽다 보니 온갖 감정이 밀려들어 페이지를 더디게 넘기고 있었다. 애희의 사연, 윤기의 분노, 어매 아재들의 팍팍한 삶,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묶은' 것처럼 보이는 섬. 이 섬의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까 궁금해하면서 읽게 된다. 바닷바람과 바다 냄새나듯 들리는 어매 아재들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가, 등만 봐도 그 표정을 아는 섬사람들의 혜안에 고마웠다가, 고립되어 보이는 섬이라는 공간에 답답했다가... 그런데도 결국은 미워할 수 없는 그들 삶의 방식을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 관객이 거의 없는 상영관에서 단편 영화 한 편 보고 나온 기분이다. 장르소설이 아니라 일반소설로 만났다면 더 만족했을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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