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 신나는 새싹 15
길상효 글, 안병현 그림 / 씨드북(주)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지난 추석에 조카들에게 선물하려고 고르다가 발견한 책이다. 제목의 어감이 좋아서 눈에 담았는데, 막상 펼치고 보니 그림까지 따뜻해 보여 더 좋았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어떤 풍경이 읽는 내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럴 수밖에.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고 늙어가고 있는데, 이 시간의 기억은 여전히 나를 코 질질 흘리면서 뛰어놀던 아이의 시간으로 돌려놓곤 했으니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알기에 더 그리움을 뿌려놓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보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오래된 것들은 점점 사라진다. 편리하고 예쁜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낡은 것들이 밀려나듯 자리를 비켜주고, 새것들이 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곤 한다. 굳이 말리는 사람도 없다. 그런 변화에 익숙해지는 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익숙하게 보이고,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 바닥마저 흙이 사라진 지금, 이 동네 이야기가 선뜻 다가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이런 모습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쉽게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이런 그림책에서 보는 장면들에 시선이 한참 머문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를 모습이기에.

 

시골이나 도시라는 구분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한 30년쯤 전의 어느 동네를 그린 듯하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이어져 있고, 담장 너머로 누구네 집 이야기 소리가 흘러 넘어오고, 해가 기울고 집집이 켜진 불빛이 불꽃놀이보다 더 예뻐 보인다. 아마 그 시간에 작은 밥상을 앞에 두고 둘러앉은 식구들의 표정이 저절로 그려져서일 거다. 넉넉하지 못한 시절에 밥 한 끼 먹자고 마주하는 그 시간이 너무 귀하다. 하루에 한 번도 얼굴 마주하지 않고서도 잘 지내는 가족들이 요즘의 모습이라면, 그 시대의 가족들은 그 한 끼에 모든 것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웃으면서 하루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소박한 찬거리에 젓가락질이 재밌던 시간이다. 많은 것이 삶을 채우고 부유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그때 그 시간, 그 장소가 주는 정겨움이 있다. 소박한 삶의 풍경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애틋한 그림책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오후의 시간을 보냈을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모퉁이를 돌면 숨어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튀어나와 놀래면 그대로 놀라버리고 마는 일이 익숙하다. 개인 소유의 마당이란 개념이 없이 대문이 없는 집도 허다하고, 골목에 꺼내놓고 다듬는 채소들, 남의 집 일거리가 아니라 그냥 일상에서 수다 떨듯 모여 있는 시간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일에 웃음보따리가 터진다. 가을볕에 말리려고 담벼락 사이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의 색이 점점 진해진다. 옆집 아저씨가 술에 취해 들어와서 고음불가 능가하는 노래를 부르고, 늦은 밤에 누가 다녀가기라도 했는지 동네 개를 밤새도록 짓는다. 마을 입구의 조그마한 슈퍼 앞에 자리한 평상은 동네 어른들의 사랑방이 되고, 뜨거운 여름을 견디게 그늘을 만든다.

 

 

피곤함에 지친 사람들이 밤새 행복한 꿈을 꾸고 난 이른 아침의 풍경은 활기차다. 두부 장수가 뜨끈뜨끈한 두부가 왔음을 알리고, 청소부 아저씨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른 하루를 연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군데군데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지각할까 봐 열심히 뛰어가는 구둣발 소리, 앞집 뒷집에서 책가방 매고 나오는 아이들이 몰려가는 소리, 서로 얼굴 보며 인사하는 소리... 활기찬 아침의 풍경이 골목길의 시간을 적는다.

 

"사라져 가는 골목을 되살리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저, 골목이 있었던 이야기예요.

아직 어딘가에 이런 골목 하나쯤은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요."

다 읽고 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첫 페이지를 열면 나오는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곰곰 생각해본다. 이 글을 쓴 저자도, 읽은 나도 알고 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 골목의 시간을 살려낼 수도 없다는 것을. 그저, 우리의 시간 한구석에 이런 추억이 있었다는 걸 잊고 싶지 않다는 조용한 바람이 아닐까 싶다. 가끔 엄마가 외할머니 살아계실 적의 집, 그 우물이 있던 자리를 얘기하곤 하신다. 내 기억에도 없는 외할머니와 외갓집의 우물은 엄마의 머릿속에 저장된 채로 그렇게 가끔 추억을 소환하는 주인공이 된다. '그땐 그랬지~' 하는 그리움을 쏟아내는 단골이다. 살아가면서 그런 기억 하나쯤 깊게 새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언젠가 이 시간, 이 공간, 이 시간의 냄새를 그리워하면서 떠올리는 때가 오겠지...

 

 

가끔 조카들과 이런 그림책을 같이 읽을 때가 있는데, 아이들의 눈에 이런 풍경은 낯설다. 이런 골목이나 집들, 창문을 열면 앞집과 옆집이 보이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는 구조가 희한한 듯 보기도 하더라. 왜 땅에다가 고추를 놓고 말리고 있느냐며 묻기도 한다. 당연하다. 실내놀이터가 익숙하고, 아파트 생활만 하면서, 학교마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구조가 익숙한 아이들에게 이 그림책 속의 풍경은 정말 책에서나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아이들이 잘 듣고 잘 이해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예쁘다. 그때는 이렇게 생활했었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끄덕이는지 모르겠지만, 이 낯선 풍경이 지금의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느끼는 향수를 공감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슬쩍 들지만 뭐, 몰라도 어쩔 수 없고... 장면이 다를지 몰라도, 이 아이들이 자라고 나서 그리워하는 어떤 시간의 모습도 그리움이라는 공통점은 있을 것 같다. 외할머니 집 마당의 텃밭을 파헤치고 엉망을 만들어놔도 예쁜 건 그래서다. 언젠가,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지나서 조카들이 이 시간을 떠올릴 때, '우리 외할머니 집에 갔을 때 흙을 잔뜩 묻히고 놀아서 엄청나게 혼났었지.' 하는 기억을 꺼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때, 오래 전 얘기를 하면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일 것이기에.

 

글도 그림도 예뻐서 눈에서 금방 사라지지 않을 듯한 책이다. 아이와 어른 모두 애틋해질 수 있는 이야기다. 받아들이는 마음은 다를지 몰라도 공감이란 이름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든다. 골목이 우리를 그 시간 속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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