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 - 진짜 연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조 (Yozoh) 외 지음 / 부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건 없다. 왜냐하면 연애가 시작되면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란 언제나 실연했을 때 시작된다. (250페이지, 다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성일)

 

그랬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정성일과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연애할 때 연애소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애소설은 물론이고 책을 가까이할 시간이 없다는 게 더 맞겠다. 집중해서 읽어도 활자가 눈으로 잘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은데, 연애라는 감정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나. 책을 읽지 않아도 하루는 너무 빨리 흐르고, 일상에 연애가 끼어들면 몸도 마음도 바쁘다. 그 사람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놓고 하루를 보낸다. 틈틈이 만나고 많은 것을 나누는 시간을 챙겨야 한다. 정말, 바쁜 거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또 익숙해진 대로 바쁜 하루의 시간이 굴러간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그 연애가 비워진 시간의 상실감이다. 하루를 쪼개 쓰던 머릿속에서 빠져나간 시간이 크다. 없을 땐 없는 대로 살아지는 것들이, 있다가 없으면 그 공백이 배가 된다. 흔한 말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게 되는 것.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굴러가는데 무료하고 지루하고, 남는 시간을 주체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은 비어 있고 머릿속은 빠져나갈 것들이 제대로 나가지 못해 엉켜 있고. 그럴 때 슬쩍 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너무 무거운 건 답답할 것 같고, 너무 가벼운 건 마음이 더 허해질 것 같고. 그래서 딱 적당하게 손이 가는 게 연애소설이 될 확률이 높다. 비슷한 경험에 공감하면서, 상실의 자리를 자근자근 밟으며 어떤 감정을 채워주기 좋을...

 

스무 명의 작가가, 그 연애의 공백에 읽어도 좋은 소설을 소개해 엮은 게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연애가 사라진 자리에 채워 넣을 '대리 연애'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다 보니 그런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됐다. 동시에,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란 실연했을 때만이 아니라 연애를 할 때도, 연애하지 않을 때도 필요한 것임을 인정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연애소설이 다가올 수 있음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그 소설들이 그들에게 다가온 건 타이밍의 문제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밋밋한 순간에 읽고 넘어갔을 그 소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연애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봤다. 그 소설들에 가득한 연애, 사람의 감정, 살아가는 배경의 문제, 삶의 자세와 같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시간임을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저자들이 겪어온 시간 속의 연애가 들려오고, 그들이 말하는 소설이 이어진다. 어떤 목적지로도 갈 수 있는 게 연애겠지만 대부분 이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소설이 더 깊게 들어올 것 같다. 상대를 얼마큼 사랑했든, 연애의 시간이 길었든 짧았든, 어떤 식으로 헤어졌든, 그들이(우리가) 나눴던 것이 소멸하고 그에 따라오는 상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건 변함없다. 그러니 이 책 속에서 저자들이 말하는 연애와 소설들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끌어줄지 궁금할 수밖에, 낯설지 않을 수밖에, 공유할 수밖에...

 

연애만큼 모두가 하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행위도 없다. 늘 사랑 아닌 다른 잡스러운 것들로 오염되고 만다. 타인의 시선이나 경제적인 계산이 제일 흔할 테고, 유년기에 해결하지 못한 온갖 불안정하고 비루한 감정들도 날뛸 것이며, 타이밍과 운의 방해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연애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개 치졸하고 더러운 파국으로 끝나며, 그 끄트머리에서 마음속의 습도계 같은 것이 사이렌 소리를 낼 때 연애소설을 찾게 된다. (289~290페이지, 연애소설 애호가를 애호하는 이유, 정세랑)

 

저자들이 소개해주는 소설이 다양하다. '이게 연애소설이었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읽었던 기억과 다른 느낌을 말하는 소설도 있다. 그때 이어지는, 저자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소설의 의미가 새롭다. 재밌다. 이런 부분에서 그의 연애를 볼 수도 있겠구나, 이때 그녀의 마음은 분노와 복수일 수도 있겠구나, 끝까지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감정도 여기 있구나, 싶은 이야기들. 연애소설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연애소설일 수밖에 없다. 취향이나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애가 빠질 수 없는 소설들이다. 그러면서 매 순간 우리의 연애 시간에 적용할 수 있는 소설들이라는 게 장점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면, 소년 김보통이 소녀와 데이트에 가기 전에 『속 깊은 이성 친구』를 읽고 갔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걸 보면 연애를 하기 전에 읽으면 좋을 소설일 수도 있다. 정지돈이 『몰타의 매』로부터 사랑이나 여자를 믿지 말 것을 배웠다면, 이도우는 마지막으로 하지 않은 한 마디를 『워싱턴 스퀘어』의 주인공의 말로 대신한다. "당신은 나에게 잘못했어요."라고. 입 밖으로 말하고 나니 약속이 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은 금방 또 번복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리는, 쉬운 감정으로 치부되는 것으로 남을 수 있음을 박현주가 말한다. 연애의 비겁함이며 동시에 연애에 신중해지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스무 명의 저자가 말한 게 연애와 소설과 삶 전부는 아닐 테지만, 그에 더 가까이 다가가 우리의 시간의 도움이 되게 하는 순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어떤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보게 하면서, 그 마음이 드러내는 온갖 감정을 표현한다. 그 안에 각자가 생각한 연애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만난 소설에서 보이는 장면들과 대화, 끝을 알 수 없는 방향에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고, 그의 태도가 괘씸해서 화가 나는 순간들. 그렇게 연애를 이어가고 연애에 마침표를 찍게 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소설 한 권쯤 있지 않을까. 쌓인 책탑 맨 아래에 눌러놓고, 마음이 텅 비었을 때 한 번씩 꺼내보고 싶은 소설. 그때가 연애가 끝났을 때일 수도 있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때일 수도 있다. 지독한 상실감에 온몸이 마비된 듯한 때일 수도, 다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심장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일 수도 있겠지. 어떤 때든, 그때 내가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가 하나쯤 가슴 저 깊숙이 숨어 있지 않을까. 저마다 사랑했던 소설에서, 현실로 연결된 연애를 품은 이야기 말이다.

 

생각보다 숭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순간의 그 마음을 표현하려면 반드시 그 시절 그 나이에 접근해야만 한다.

그런 게 바로 마음의 일이 아닐까. 어느 나이의 어느 마음이 하는 일. 다른 나이의 어떤 마음에게는 해석이나 미화가 필요한 일화일지도 모르지만, 그 나이의 바로 그 마음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온전한 무언가. 여러 경로로 '데브다스'를 접했지만 그 파멸적인 사랑에 관해 최종적인 해석을 내려야 할 때면 결국 사라트챤드라 챠토파드히아이의 원작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다. (244~245페이지, 무모하게 사랑할 특권, 배명훈)

 

이들이 말하는 소설의 분위기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정작 나에게 이 소설들이 어떻게 다가올지 금방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내게 가까이 오지 못했던 소설이 있는 걸 보면 그 소설들이 꼭 같은 의미로 작용하지는 않을 거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소설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곰곰 생각해보지만, 선뜻 떠오르는 소설이 없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아서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이 책 한 권이면 감정을 다스리고 뭔가를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만한 책을 읽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한 소설의 목록을 천천히, 더 오래 살펴보게 된다. 이 소설들이 그들에게 전했을 '어떤 순간, 어떤 감정, 어떤 토닥임'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오길, 어둠이 내려앉은 듯한 모든 순간에 만날 수 있는 소설이기를 바라면서.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건, 연애가 끝났을 때뿐만 아니라 마음이 구멍 난 모든 순간에 필요하다. 어쩌면,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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