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에 우린 어쩌면 - 여행 후에 오는 것들
변종모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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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여름이었다. (아직도 남은 여름은 진행 중이지만) 거의 한 달 동안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자려고 누우면 평균 1~2시간은 뒤척여야만 잠이 드는 나에게, 새벽 5시는 절대 눈 뜨고 있을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눈 뜨게 만드는 건 여름의 더위였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지는 시간이 되고야 만 것. 그 시간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온 집안의 문을 열어놓곤 했다. 현관문, 창문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연다. 그래도 끈적임과 잠 못 들게 했던 더위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름날 새벽 공기는 이렇게도 더울 수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을 뿐.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더 느끼게 된 건, 새벽바람의 흐름으로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알게 되었다는 거다. 그냥 단순하게 '가을이 오고 있구나' 하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불어오는 바람이 달라졌음을 그대로 느끼게 되는 거였는데, 그걸 또 말로 표현하자니 어느 한마디로 다 할 수 없는 느낌들이었다. 기분이 묘해지는 어떤 것들. 한 달 전, 일주일 전, 그제, 어제, 그리고 오늘의 새벽바람은 모두 달랐다. 시계나 달력뿐만 아니라 바람으로 직접, 한 달의 시간을 꾸준히 맞으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낀 건, 지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렇게 지금,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놓여있는 시간.

 

거의 8월 한달동안, 그렇게 눈뜬 새벽 시간에 잠깐씩 책을 읽었다. 많이 읽지는 못하고 길어야 삼십 분, 혹은 스무 페이지 정도. 변종모의 신간 『같은 시간에 우린 어쩌면』은 그렇게 조각내어 읽기에 잘 어울린다. 어느 한 곳의 이야기를 잠깐씩 듣는 게 좋다. 그곳에 두고 온 이야기가 이곳의 일상에서 떠오르곤 하는 순간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공감이 이어진다. 읽으면서 가끔은 한숨이 쉬어지기도 하고, 알람이 울리기 전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문자 작성 페이지를 열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잠들어 있을 시간인 걸 생각하면 그 누구에게도, 한 마디도 보낼 수는 없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참고 있던 할 말들을 툭툭 치고 나오게 하는 순간이 많았다. (저자처럼 엽서를 옆에 두고 있었다면 몇 자 적어서 가방에 넣어서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차마 부치지는 못하고...) 그렇게 엽서나 휴대폰 속의 전화번호부 같은 걸 옆에 두고 읽으면 위험해지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매번 알기에 순간적인 기분으로 사고 치지 않게 긴장하게도 한다. 시간이 그렇고, 그 누군가에게도 그렇다. 그걸 아니까 바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는 거겠지만.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휴대전화 문자로 보내서는 안 되는 말도 있다. 그럴 때 엽서를 써 본다. 마치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에 젖어, 가까운 이를 멀리 놓고 애틋한 마음으로 엽서를 쓴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카드여도 좋고 생일 카드여도 상관없다. 엽서를 쓰다 보면 나는 멀리 있다. 내가 떠나지 않고서도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엽서를 쓰는 일이다. 그것은 비행기 표를 사듯, 가야 할 나라를 고르듯, 여행기를 쓰듯 마음속의 일들을 적는다. (154페이지)

 

여행에서 돌아온 이의 하루를 읊는다. 길 위에서 돌아온 여행자의 하루, 스물네 시간을 담았다. 이른 새벽부터 하루가 끝나는 자정까지. 잠에서 깨어 눈 뜨는 그때부터 이어지는 하루의 시간 속에서 뛰쳐나오는 여행지의 감정들이 오늘의 곳곳에 묻어 있던 거다. 일상에서 겹쳐지는 여행지의 장면과 그때의 감정들이 기억을 소환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힘들어서, 가슴에 비워진 뭔가가 아파서 떠났을지라도, 적어도 그 길을 걷던, 그곳의 시간 속에서만큼은 행복했을 테니까. 떠나고 싶어서 떠난 자의 마음을 가득 채운 무언가가 아직도 그곳에 있을 거니까. 그런데 그곳과 이곳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마음의 거리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다르니까, 그 시간을 걷던 마음과 지금을 살아가는 마음이 다를 수 있는 거니까. 여행은 끝나고, 그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왔고, 여기에서의 시간은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 각각의 시간에 선이 있는 거로 생각하곤 했는데... 돌아온 일상에서 그곳의 기억들을 함께 가져와 생각하고 다짐한 것들로 살아가는, 밟아가는 땅을 다질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간을 이곳에 보태고 어떤 시간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그리는 것. 그러니까 여행을 떠났던 그때 그 마음과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잊지 않게 하는, 잊었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일상을 보여준 거였다. 잊겠다고 해서 잊히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우리니까, 떠올리자고 작정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들이 이렇게 된다는 것도 잘 알게 되는 거겠지.

 

명동에서 시애틀 빌딩 숲 어느 건물 뒤편을 생각하고, 부산에서 이스탄불의 바람 부는 항구는 만나는 일. 마을버스 정류장의 할머니들에게서 이란 시골 마을 할머니들의 해바라기와 같은 분위기를 그려본다. 쌀국수와 치앙마이의 뒷골목을 떠올리다 라면 물이 끓어오르고, 길바닥에 떨어진 우표 한 장에 붙이지 못한 편지를 들고 서성이던 이집트의 낡은 우체국을 그리워한다. 자신의 발자국이 새겨진 그곳들이, 잘 있을지, 괜찮을지 생각하는 시간. 이렇게 자주 떠올려도 되는지,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이 그리움을 그대로 안고 있어도 괜찮은지 계속되는 물음에, 결국은 '괜찮겠지.'라는 답을 꺼낼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는 있는 거지. 여행 후에 찾아오는 수많은 단상과 일상의 어느 순간에 포개어지는 온갖 감정들. 슬픔이나 그리움, 불신, 불편함, 감사, 웃음, 행복, 친절함, 그리고 더 많은 것.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장담하지 못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연들의 진심. 허름한 숙소에서 주인이 건네는 걱정에 떠올리는 어머니의 모습마저 그리운... 오늘도 이곳에서 보는 그곳의 이야기들은 계속된다. 여행지에 다 두고 온 것 같은 일들이 이렇게 그의 하루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다짐들.

 

여행에서 받아들인 모든 감정이 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줄 알았다. 낯선 곳에서 긁히고 상처 나고 그러다 굳은살이 생겨나면서 튼튼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끝내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일로 남는 것 또한 알았다. 잠시 따뜻한 불빛을 쫓아 들어간다고 해도 내 집이 될 수 없는 곳이 허다한 것처럼. 외로움이란 길 위에서나 생활에서나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끝까지 동반해야 할 가장 나와 가까운 감정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외롭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아무도 거둬 줄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다. 내가 다시 배낭을 메는 이유가 최소한 너 때문이라는 변명은 이제 없어야 할 것이다. 나도 나를 위해 살 뿐이다. 너처럼. (343페이지)

 

여행, 그 후에 따라오는 여운이 짙은 이야기다. 하루에 조금씩 천천히 읽어서 그런지 뭔가 계속 이어지는 기분에 이야기가 끝나는 게 서운했다. 들으면서 계속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던 것도 같은데,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다시 서랍으로 조용히 들어가 버렸다. 언젠가, 언젠가,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 '언젠가'의 시간이 오기를 바보처럼 기다리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의 연장선처럼, 그 감정을 그대로 이어가려면 누군가에게 엽서라도 한 장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오늘을 사는 '이곳'에서 길 위를 걸었던 '그곳'의 시간을 꺼내게 하는 순간들이 그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돌아왔으면 끝일 것 같은데, 여행은 그곳에서 일상의 삶은 여기서 이어가면 그만일 것 같았는데, '이곳'을 살면서 '그곳'의 기억과 시간들이 문득 가슴을 치고 나올 때마다 생각도 짙어질 듯하다. 어떤 장소, 사람들, 시간들, 묻거나 버리려 했던 흔적들, 그런데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에 시선이 머물 수밖에 없는 일. 지금 이곳으로 돌아와 있지만, 여전히 그곳의 시간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떠나고 싶어서 떠나고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왔는데 사라지지 않는 허무함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 듯하다. 시간이 잘리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여행이 끝났어도 여행의 기억들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여행은 끝도 시작도 없었던 거다.

 

짧게 계속된 이 책과의 새벽 여행은 8월과 같이 끝났다. 하지만 이 책이 끌어낸 어떤 감정들은 아직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듯하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언젠가는 잔뜩 쓴 엽서로 가방 안을 채우게 될 것만 같다. 그럼 그걸 또 비우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것도, 언젠가... 그 '언젠가'가 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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