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박후기 글.사진 / 문학세계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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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으로 꺼내어 하는 말(소리) 대신에 글(문장)로 그 말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시간 생중계처럼 전해지는 말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정리되어 글로 써지는 시간이 만들어지면 조금 더 다른,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이유로, 가끔은 일부러 급한 마음 상태의 전화보다는 조금 생각하다가 문자를, 문자보다는 메일로 상대에게 전달할 때가 있다.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내 마음을 조금 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바람이 있을 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올곧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의미의 언어가 여기 하나 더 있다. 말과 글만큼이나 더 전달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 사진이다. 딱 그때, 그 순간의 기록처럼 보이는 한 장의 사진이 많은 말을 대신하고 있다. 종군기자의 사진 한 장이 전장의 실상을 그대로 전했던 것처럼, 사진이 말을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 사진의 말을 알아듣는 나는, 또 한 번 공감의 언어로 소통한다. 사진이라는 언어...

 

 

시인이 쓴 산문이다. 나는 아마 이런 느낌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시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시 같은 글을 통해 어떤 마음을 전달받고 싶었던 거라고. 읽고 보니 그 기대감이 틀리지는 않았다. 다만 순서가 조금 다른 듯했다. 글이 가득한 느낌 속에 사진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구성이 아니라, 사진이 먼저 자리를 잡고 시인의 글이 따라오고 있다. 사진이 걷고 발자국을 남기면 이야기가 그림자처럼 그 발자국을 밟는다. 그 사진을 찍었을 순간의 마음, 그 장면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함께한다. 뻔한 얘기 같지만, 그 안에 일상을 풀어놓고 싶은 나의 바람까지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에 반했던 듯하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이라니, 뭔가 가벼워지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잖아. 양쪽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감정의 벽돌 하나를 내려놓고 싶기도 했다. 비까지 내리는 이 가을, 그냥 지나치고 갈 리 없는 익숙한 감기가 버거웠고, 한 살 더 먹어가는 나이의 무게가 심란했다. 마음을 흔드는 많은 일이 제자리를 찾아주었으면 싶은 바람에, 종교가 없음에도 수신자가 없는 그 어딘가를 향해 기도하고 싶기도 했다.

 

 

기도는 변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르다. 또한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중략)

언제나 사람이 먼저 기도를 떠나왔던 것이다.

처음에 품은 그 절심함을 잊고, 사람이 먼저 사랑을 떠나왔던 것이다.

기도는, 어쩌면 잊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149페이지)

 

그런데 저자는 손바닥 뒤집듯, 기도에 대한 나의 마음에 너무나도 간단히 직구를 날렸다. 기도가, 잊고 싶다는 마음의 말이었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랬나 보다. 나의 진심은 ‘이런 소원을 들어주세요.’ 하는 플러스(+)의 요청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사라지게 해주세요.’ 하는 마이너스(-)의 잘라냄을 바라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려오라고 나에게 말한다. 살다가 하루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그런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시(詩)에서 내려오고 싶은 날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무엇인가로부터 내려오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 날, 저자가 어떤 찰나를 담은 사진 한 장과 그 순간을 기록한 마음처럼 눈과 귀를 열게 한다. 가을이 깊어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의 흐름, 누군가의 구부정한 어깨, 버릴 줄 아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사람, 모여서 함께 흔들리는 갈대, 오늘을 살게 하는 많은 법칙, 혼자 흔들리지 말라는 위로, 기울어지는 그리움에 기대어도 된다는 말, 깊어지는 맛을 내는 것들의 의미, 비는 내가 우는 소리라는 듯,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가는 길목의 마주침, 감정이 살아있음에 붉어지는 얼굴의 아름다움... 그 이상의 것들이 품고 있는 말들을 풀어낸다. 시처럼, 음이 낮은 노래처럼, 마시기 좋게 적당히 식은 차 한 잔처럼.

 

누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날이 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내 마음의 행간(行間)까지도 읽어버린 것이다.

그런 날엔 한없이 서럽고, 또한 알 수 없는 떨림이 등피를 두드린다. (87페이지)

 

몰랐으면 싶은데 간혹 눈치 빠른 누군가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어도 마음을 알아챈다. 내 숨소리가 거기까지 날아갔나 싶게 정확히 짚어낸다. 무슨 말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읽었구나 싶은 눈치를 나도 알아채는 것이다. 서로가 말이 없어도, 딱히 어떤 손짓을 건네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고야 마는 것. 그건 불어오는 바람 때문일 수도 있고, 커피가 아닌 술을 마시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미 하나 달리한 단어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또 한 번 감정을 건드리고 흔들리게 한다. 빗물이든 눈물이든 흐르게 한다. 때로는 그런 마음을 집어내는 것이 이런 책이 되기도 한다는 게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떠리. 그대로 다가오는 그 공감을 담고 싶은 것을...

 

 

마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게 닫힐 수도 열릴 수도 있다. 문틈, 그 미세한 자리를 비집고 굳이 들어오려 애쓰는 게 마음일지도 모른다. 알면서 모른 척하기도 했고, 일부러 그 틈을 안 보이려고도 했다. 그래서 지나친 많은 것들을 이 책이 다시 불러온다. 지나가 버린 한때의 시간을, 하루살이가 비우게 하는 오늘을. 이 밤에 조용히 비추는 가로등마저 다시 보이게 한다. 그 대상이 삶이든 사람이든, 한순간이나마 한발 떨어져서 바라보게 한다. 그 관조의 시선이 가져올 어떤 여유,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조금 쉬어가는 길, 돌아서 가는 길을 이런 식으로 들려준다.

 

 

저자 박후기를 시집으로 먼저 만났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비극이 넘치는 우리 삶을 색다른 시선으로 시를 통해 얘기하는 듯했다. 시를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듣고는 했는데, 이번 책은 그가 찍은 사진과 그 시간의 말을 함께 담고 있다. 잡지사에 취직해서 본의 아니게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을 동시에 했다던 그의 이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사진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창한 소개가 아니라, 그가 뷰파인더를 통해 본 그 순간, 그 마음의 소리를 기록한 것이다. 그 사진 한 장과 그 장면을 통해 그가 사유한 마음 한 자락을 담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감정의 한순간이 있다는 것을, 다른 이에게는 평범하게 지나는 한 장면이 오직 자신에게만은 특별한 한 컷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 하고 싶은 한 마디가 그 한 장의 사진에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봄날의 햇볕처럼 내리쬐던 며칠 전의 하늘을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가 가득한 지금, 기억한다. 많은 게 흔들릴 정도로 불어대는 바람이나 거세게 비가 퍼부어대는 지금의 서늘함보다, 환하게 비추던 햇볕 아래서 더욱 추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던 그 날을, 내 마음이 기억한다. 비록 사진으로 담아두지 못했지만 아마 그날을 찍었다면 분명 사진에서 보였을 것이다. 너무도 맑았던 하늘, 봄으로 착각할 정도로 포근했던 햇살, 그 안에 자리한 내 서늘한 시선이.

 

 

한 장의 사진이 열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침묵의 언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소통하고 싶어지는 언어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의 많은 여건 때문에 때로 달리 보이기도 하겠지만, 분명한 건 사진이 감정과 표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읽어내는 사람은 그 사진과 교감하는 것일 테고. 누군가의 마음과 시선을 담은 사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 나에게 저자의 시선(사진)과 마음(문장)은 타이밍 좋게 다가온, 위로다. 내 마음이 지금 내리는 비만큼 더 서늘해지기 전에, 다시 찾아올 봄날처럼 풀어지기를 바라는 위로. 내리고 싶은 날이 있다고 말했으니, 그런 날 하루쯤은 내려도 괜찮겠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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