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균형 - 이해의 충돌을 조율하는 균형적 합의 최승필 법 시리즈
최승필 지음 / 헤이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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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만인에게 공평하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법치주의", 즉 특정 개인의 자의에 의한 통치가 아닌 rule of law, "법에 의한 통치"를 헌법 원리 중 하나, 국가 운용의 핵심으로 꼽습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그래서 양팔 저울을 든 채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런어웨이 주리>를 보면, 어느 배심원이 "정의는 눈멀었지 않습니까?"라고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선입견을 배제하고 공정을 추구하기 위해 눈을 가린 것이, 어느새 기계적 맹목, 혹은 실체적 진실을 외면한 채 형식논리만 절대시하는 관료주의로 타락함을 비판한 대사입니다.

이 책 표지에는 "왜 사람마다 법을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가?"라는 질문이 적혀 있습니다. 법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이 자신의 기대를 투영하여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를 천차만별로 "주장"하는 건 그렇다쳐도, 법조경력이 오래된 법률 전문가들마저 의견이 갈리는 건 의아스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거나 심지어 황당하기도 합니다. 다원주의 국가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건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법이 지나치게 "귀에 걸면..." 식이 되어서는 권위와 안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습니다.

LH사태의 본질은 "이해상충(p66)"인데 말하자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으로, 다루는 업무의 성질, 혹은 내부 사정의 지득 가능성으로 인해 담당자가 관련 법률행위, 사실행위로부터 자진하여 손을 뗄 필요가 있을 때 거론됩니다. 민법상의 일반원칙 중에도 자기대리, 상호대리 등에 가해지는 제한이 있죠. 책에서는 특히 미국에서 강행법규, 처벌 위주로 이런 이해상충을 규율하는 연혁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른바 "강도귀족"과 의회의원 등의 결탁이 문제였는데 이때 큰 돈을 번 강도귀족(robber barron)으로는 밴더빌트, JP모건 등이 있죠. 앤드류 카네기도 이런 범주에 들 뻔했으나 대신 그는 광범위하고 파격적인 사회환원으로 훌륭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Nemo debet esse judex in propia causa." 어느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의 라틴어 법언(法諺)이며, 이 책 p69에 나옵니다. 재미있는 건 "전관예우" 못지 않게 요즘은 "후관예우"도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로펌에 몸 담던 변호사가 판사로 임관될 시, 이후 자신의 구 직장이 담당한 사건에서 그에 우호적으로 재판하기 쉽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여튼 책에서는 p72 등에서 "한번 신뢰를 상실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해도 이를 실행할 채널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 이슈는 책 저 뒤 p250 이하에서 다시 자세히 논의됩니다.

논란이 일 만한 기소, 구형, 판결이 이뤄질 때마다 포털의 댓글란에 잘 달리곤 하는 말이 있습니다. "AI 판사를 도입해야 한다." 책에서는 그러나 AI 역시 알고리즘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인풋 데이터 자체가 오염되었을 수 있습니다(p89). 법률 전문가들이 즐겨 하는 말 중에 "규범적 판단"이라는 게 있는데 아무리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내어 놓은 소견이라 해도 이를 필터링 없이 기계적으로 판결 안에 수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재치있게, 저런 알고리즘 만능주의를 가리켜 "알고리-이즘(ism)"으로 비판합니다. 원래 알고리즘은 철자를 algorithm이라 쓰죠. 이 역시 사람이 설계할 뿐인데 그에 대한 맹신이나 신격화가 이뤄져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나아가 편향된 알고리즘이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독재를 저지른다면 이를 알고크라시(p91)라 부를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퍼스널 모빌리티의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커짐에 따라 킥보드를 강남 한복판에서도 용인하게 되었죠. 배달 문화의 확산에 따라 사방에서 바이크가 출몰하는 판에 여기가 동남아냐는 탄식과 우려도 나옵니다. 이를 어떻게 규제해야 할지, 혹은 반대로 어떻게 적절히 장려하여 개인의 편의를 배려하고 생산활동을 촉진할지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p100)도 본래 취지는 좋았던 것이라서 1990년대 빌 클린턴 시대에 "탈규제" 열풍 와중에 그 단초가 마련된 것입니다. 규제를 없애다 보니 이런 대형 사고가 터졌는데 그렇다고 마냥 규제 일변도로 복귀하자면 그 폐해는 충분히 짐작가능하니 참으로 큰 딜레마입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처음에 가상화폐에 대해 마냥 무시, 혹은 범죄시하는 태도로 나가다가, 최근 참여자가 너무 늘어 이제 외면할 수 없는 대세로 바뀌자 "가상화폐가 아닌 가상자산이라면 정부는 적절한 보호, 혹은 규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쪽으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책에서는 이에 대해 선제적으로 "입법"을 통해 대응하되, 그 정신과 취지에는 "혁신 비전"이 담겨야 한다는 취지로 말합니다(p111. 워딩은 이 서평 중 다소 변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첨단 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하여 가상화폐, 블록체인 등의 토픽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다루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최근 고유 가상화폐 "리브라"를 "디엠"으로 개편했는데 계정 소유자에게 바로 보내는 다이렉트 메시지의 약자가 아니고, 라틴어 diem이라고 합니다. 사실 주격은 dies인데 왜 페이스북에서 목적격 형태를 이름으로 삼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상화폐가 결국 제자리를 못잡는 이유로 1) 가치의 변동폭이 너무 크다 2) 중앙 정부 등 권위 있는 기관의 보증이 없다 등을 꼽는데 이는 이미 낡았거나 논파된 사항들입니다. 책에서도 이런 주장은 하지 않는 대신 가상화폐의 다른 기술적 난점을 분석하는 식으로 주장을 전개합니다. 예를 들어 핀란드에서 이미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가상 화폐 실험이 있었는데 이게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p138).

반면 중국에서는 개인 간 단말의 접촉만으로도 바로 이체가 가능해지는 등 다른 나라가 성공 못 한 여러 단계를 극복했다고 하는데 더 지켜볼 일입니다. 애초에 돈은 익명성을 추구하는 게 그 본성에 가까운데 중앙은행이 이를 훤히 들여다보는 식으로 관리한다면 과연 운용이 잘 될지 의문이죠. 민간 가상화폐(코인)가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큰 매력을 갖는 이유는 은밀한 사용, 탈세 등 여러 솔깃한 유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원하는데, 독재도 아닌 민주국가에서 과연 "쓰지 마라!"는 호통과 규제 일변도로 대응이 가능하겠습니까. 가치변동이 심하다? 애초에 법정화폐 역시 인플레라는 숙명적 적수가 있기 때문에 가치 변동을 피할 수 없고 부동산, 미술품, 금, 주식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치 변동이 심한 게 문제라면 주식 투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술과 법 사이의 대화가 가장 필요한 영역(p139)." 암호화폐에 대한 저자의 멋진 요약입니다.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의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원래 주장의 참 거짓은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증명을 해야 합니다. 이게 법치주의 사회, 혹은 소송법상의 대원칙이죠. 안 그러면 무책임한 개인의 선동 때문에 사회 전체가 비용을 치르거나 혼란에 빠집니다. 어찌보면 빌프레도 파레토 식의 차가운 공리주의인데, 문제는 이 원칙을 무한정 적용하면 의료사고, 환경오염 등의 피해에 힘 없는 다중 피해자가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피해가 예상되면 무조건 입법으로 대응을 해야 하나. 여기서 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명언이 인용(p171)되는데 "비행기 시각에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공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이다."는 말이죠. 저 역시 그런 편인데 출발시각에 늦는 게 너무도 악몽 같은 일이라 그 걱정 때문에 보통 한 시간 정도는 먼저 가서 기다리는데 그게 그렇게 지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알고보면 공연한 시간의 낭비입니다. 입법이란, 혹은 법적 규제란 엄청난 사회적 비용 지출을 수반하는 게 보통이죠.

감염병 역시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새로운 중요성을 갖고 주목됩니다. 원래 감염병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급속히 확산되는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인더스 유역 등에서 초기 문명이 형성된 건 이들 지역이 감염병 확산에 상당히 불리한 기후 조건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p209)고 합니다. 감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CCTV의 확충, QR코드를 통한 동선 파악 등 개인정보, 사생활의 침해가 어느 정도는 용인되어야 하는데 두 가치의 형량조절을 어떻게 할지가 문제입니다.

법학의 본고장인 독일 답게 미세먼지 피해를 갖고도 국가에 소송을 거는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미세먼지로 건강 피해를 주장하는 소송도 있고, 당국에서 교통 통제를 하자 이에 대해 반대하는 주민이 소송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문제의 심각성에 "비례한(p231)"조치이냐 그렇지 않냐는 겁니다.


p246에서 "점유와 소유 사이의 긴장"이 잠시 언급됩니다. 독일 등에서는 게르만의 유목적 전통 때문에 점유가 중시되었고, 미국에서는 서부 개척 등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토지를 중심으로 소유권 제도가 세밀히 발달했다고 말합니다. 점유는 법률행위가 아니라 사실행위이며 하나의 현상인데도 법은 이를 제법 크게 보호합니다. 소유권 절대의 원칙이 있긴 하나 일정 단계까지 법은 이에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데 점유는 그 중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죠.

"양질전화"라는 말이 있는데 단순히 양에 불과한 것도 일정 양(量) 이 축적되고 어느 정도를 넘기면 질(質)적인 발전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유물론 쪽에서 즐겨 사용하는 경향도 있는데 저자는 "적어도 법 쪽에서는 양질전화의 원칙이 그리 잘 통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p258). 법학에서 그리도 강조하는 "규범적"이란 말은, "결코 양으로 대체할 수 없는 질의 우위"라는 사고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p275에는 재미있는 농담이 나오는데 "대법관님, 정의를 실현하세요!"에서 대법관도 justice고 정의도 justice인 데에 펀치라인이 있습니다(일반 법관은 그냥 judge이죠). 모든 기관이 어떤 독재적 권위에 굴하여 수직적으로만 기능한다면 이는 거버넌스의 붕괴나 같습니다. 반대로 모든 기관이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각개행진만 한다면 이는 질서의 파탄입니다. 한국의 경우 오랜 식민통치와 군부독재의 악몽 때문에 막연히 공권력에 대한 거부감과 피해의식을 갖는 수가 있는데 국가 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당연히 요구되는 사항이지만 그 선을 넘는 건 모두가 좋자고 만든 국가의 기능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책 p334에서는 영화 <오리엔트 특급>의 예를 들며 과연 범죄자와 정의의 실현 사이를 칼로 두부 자르듯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를 두고 성찰을 요구합니다. 이 작품은 1970년대에 초호화 캐스팅으로 한 번 영상화되었고 2017년의 작품(셰익스피어 극 전문 배우 케네스 브래너, 또 조니 뎁 주연의)은 두번째 시도죠. 여튼 죽은 사람(피해자)는 극악무도한 인간이고 가해자는.... 사연을 알고 보면 누구나 이해할 만한 사람(스포일러)둘에 의한 중첩적 인과관계가 작용한(독일 형사법학의 핵심 토픽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란 말이 있습니다. 애초에 아무런 오류 없이 만인에게 공평무사히 적용, 해석되는 법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완벽하지 못할 바에는 파괴하자!" 같은 무책임한 결론에 이르러서는 안 되고, 불완전한 것이라도 중지를 모아 고쳐 쓰고 타협하며 대화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 또 그래야 할 의무가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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