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얼 씽 - 문학 형식에 대한 성찰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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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쯤에 테리 이글턴의 <문화란 무엇인가>를 읽고 서평을 남긴 적 있습니다. 역자 이강선 박사는 후기에서 "이글턴이 이번에는 본연의 전공인 문학으로 돌아왔으며, 그것도 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사실주의를 옹호하고...(p235)"라며 이 책의 의의를 설명합니다. 이 문장을 읽고 새삼, 사실주의가 소설 장르의 완성, 정착에 그만큼이나 기여했었음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또 본디 마르크스주의의 지평 위에 서 있는 이글턴이기에, 그가 논하는 사실주의가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어느 정도나 상호의존, 포섭, 중첩, 길항하는지도 흥미롭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책에다가 제목을 "더 리얼 씽"이라 짓다니 과연 그답다 싶었습니다.  

어떤 명제라고 해도, 그것은 사실 진술임과 동시에 평가입니다(p48). 순수하게 어느 하나의 영역에만 속하는 언명은 비트겐슈타인의 판타지랜드에나 존재한다는 건 이미 판명 난지 오래입니다. "묘사"라는 게 철저히 기술적, 중립적으로 대상을 그리기만 한다고 여길 수 없으며, p48에서 로저 스크루턴이 말하듯, "무엇을 묘사할 때는 그것을 비난하는 힘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A 매킨타이어는 "사실 진술이 참 또는 거짓이듯, 평가 역시도 진위 판정의 대상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렇게,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게 항상 기계적이고 중립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데서, 이글턴이 옹호하는 사실주의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p63에서 이글턴은 사실주의를 중간계급이 낳은 아이라고 확인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사실주의는 귀족이 만들어낸 과장된 낭만주의, 위선적 도덕주의와 대치되어 탄생했습니다. p76을 보면, "대실재(the Real)는 본질적으로 환상적"이라는 정신분석학의 역설적 언명이 다시 소환됩니다. 사람은 원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좋아하지도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건 백일몽(reverie)이지 단단한 중력을 뿜는 대지, 부동산(realty)가 아닙니다. 대실재라니, 원 그런 건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자연주의에 대해서는 특히 이 책 p181 이하 참조). 

마르셀 뒤샹은 철물점에서 파는 변기 하나를 갖다놓고 "분수"라 명했는데 원래 인간의 인지라는 게 다 이런 식이며 발자크니 스탕달이니 플로베르니 하는 위인들도 결국은 모든 걸 오브제화(化)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재현과 반영, 배제와 왜곡(p93) 사이의 넘나듦이 여전히 불편한데, p97에서 이글턴은 근대 사실주의의 큰 업적을, 페트라르카 식의 소네트 규칙으로부터 창작자와 향유자를 해방시킨 데서도 찾습니다. p107에서 이글턴은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며 "사실주의는 조작, 왜곡, 편파"라고까지 극언합니다. 사실 진술에 가치가 개입하는 걸 넘어 아예 대놓고 왜곡이라 규정하는 과감함에 놀랄 뿐입니다. 

p124에서 이글턴은 아들뻘 매슈 보몬트(<평론가의 임무>에서 대담했죠)를 인용하며 사실주의는 순진하면서도 정직하지는 못한, 일종의 환상에 대한 집요한 추근댐, 혹은 트롱프뢰유(tromp-loeil)라고까지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글턴의 책을 여태 읽어 온 우리가 알듯, 이글턴의 타매는 나중에 칭송으로 바뀌는 예가 비일비재하죠. p134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이글턴은 카프카의 <변신>을 예거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이글턴적 관점에서 사실주의의 극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사실주의를 일러 모든 직업, 신분에 대한 환상을 깼다며 띄우고, 반대로 막스 베버는 환멸(p135)의 괴로움을 개탄합니다. 

루카치는 당연하게도 이 책 곳곳에서 이글턴의 까마득한 선배처럼 멘토처럼 모셔져(?) 결정적일 때마다 논거로 피난처로 활용됩니다. 이글턴이 할 말은 애저녁에 루카치가 다 해 놓지 않았을까요? 루카치가 불멸이 아니기에, 그가 미처 못 한 말은 우리가 이글턴에게 마저 듣는다고 간주해도 되지 않을지. 이 독후감 서두에서 제가 바람 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p163 이하에서 본격 논의되는데 재기발랄하신 이글턴도 여기서는 우리 독자의 예상 범위를 크게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p201 이하에서 이글턴은 신교와 구교의 차이까지 논급하며 구교가 다분히 생과 세계에 대해 환상을 유지하길 원했다면 신교는 금기를 해제하고 생의 불쾌함을 사람들 앞에 그대로 노출한 공(?)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실주의를 향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 책의  주인공은 사실주의이기에 (그에게서 정말 흥미롭게 들을 수 있을) 포스트모던에 대해서는 p217 이하에 아주 짧게만 논의됩니다. 짧은 예고편만이지만 이상하게 재미있는데 다 그의 썰 푸는 재능 덕인 줄 우리가 익히 압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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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위의 아이들 라임 청소년 문학 64
남예은 지음 / 라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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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단편이 실렸습니다. 대체로는 해피엔딩이지만, 주인공들이 워낙에 좋지 못한, 불리한 처지에서 시작하다 보니, 이 정도면 그래도 (독자가) 만족하고 마음을 추스려야 하는 건지 조금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여튼 모든 작품들이, 비관과 절망을 딛고 일어나 현재에 충실한다거나,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어린 독자들에게 착한 심성을 심어 줄 듯하긴 합니다. 

<나쁜 사랑>. 우리 나라에는 대성동이라는 마을이 있죠. 휴전이 된지 71년이 지났고, 그간 우리 나라는 세계적 선진국 반열에 들 만큼 발전한 데다 행정 질서도 정밀하게 정리되었다 보니, 아직도 한반도 영토 내에 이런 곳이 있냐며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TV 프로그램에서 곧잘 다루듯 휴전선 직근의 그 대성동 마을입니다. p14에서 오준구가 로운이(주인공)를 놀리며 "삼팔선에서 온 촌놈"이라 할 때 저는 이 소설의 배경이 꽤 오래 전인 줄 착각했는데, 그곳이 대성동을 가리킨다면 말이 되긴 하는 소리입니다. p20의 로운이의 대사에서 대장동은 아마 대성동의 잘못인 듯합니다. 

세상에 나쁜 사랑이 과연 있을까요? 물론 혼외관계, 불륜, 근친상간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고 비난 받는 종류도 있습니다. 그런 부도덕한 사랑은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고, 아직 어린 로운이가 지설연과의 풋사랑에 구태여 그런 부정적 의미를 덧씌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운이는 간만에 대성동을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아빠가 그걸 했는지 안 했는지, 믿을지 안 믿을지가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이미 우리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거지.(p41)" 이 말은, 무섭도록 현실에 충실한 인식, 각성의 산물일 수도 있고, 너무도 메말라 감정의 싹이 새로 피어날 여지가 없어진 황폐한 마음의 표백일 수 있습니다. 무튼, 로운이가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설연이와 잘해보겠다는 결말로 보여 안도가 됩니다. 아빠는 아빠고 아들은 아들이죠. 

<코르셋>. 보통 여권주의자들이, 강요된 여성다움을 탈피하자는 뜻에서 이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 작품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생선가게를 하는 엄마와 혼자 사는 하연수는 수영 선수로서 자질이 있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중도 포기하고 엄마 일을 돕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또래남자 친구 기선우와 사이에 애를 배게 됩니다. 선우가 그렇게 나쁜 애이거나 한 건 아닌데, 여튼 애다 보니 능력이 없고,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남친이 되었습니다. 

연수는 벼랑 끝까지 몰린 처지에서 (철없는) 친구 고지은의 엉뚱한 도움으로 탈출구를 찾게 됩니다. 이 돈으로 엄마 암도 치료하고 숨을 좀 돌리겠다 싶을 때, 결국 일이 좋지 않게 풀려 돈을 다 반납하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가 참 생각이 바르고(비록 다혈질이지만) 심지가 곧은 분이라서 연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서긴 하는데... 솔직히 독자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워집니다. "이만하면 부족할 게 없는 밤이었다.(p96)"는 마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반어입니다. 문순태의 작품 <어머니의 땅>도 생각이 났습니다. 

표제작인 <선 위의 아이들>은 학폭이 소재입니다. 주인공 서인우는 최기호라는 불량배가 주도한 학폭으로 오영수를 괴롭히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치고 지금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는 중입니다. 최기호의 부친이 택시회사 사장인데 하필이면 인우 아빠가 그 회사에서 일하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인우 아빠 역시 대단히 성정이 곧은 분인지, 직장 내 위치는 돌아보지도 않고 "영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라며 바른 증언을 할 것을 다그칩니다. 이 와중에 최기호와 그 모친은 인우를 회유하려 집에까지 찾아오는데 이런 쓰레기 양아치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아 죽어야 마땅하죠. 위층에 세들어 사는 6살 정운이가 내는 소음은 인우에게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상징하기도 하고, 그 역시 한계 상황에 몰린 가정의 일원으로서 사건의 위기를 고조하는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인우는 많은 고뇌 끝에 결국 바른 선택을 하고 그 결정은 두 가정, 아니 세 가정을 구하는 듯합니다. 

<지하철 1호선>. 주인공 서상희는 대부업을 하는 엄마 덕에 잘살긴 하지만 결함 많은 가정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친구 강민지를 은근 질투합니다. 상희는 그저 질투할 뿐이었지만 누군가는 몇 걸음 더 나아가 민지네를 완전히 파멸시킬 마음을 먹었나 봅니다. 소설에서는 "사기"라고 표현하지만 제 생각에는 양도담보 계약이었던 것 같고 여튼 이게 부도덕한 짓이었던 건 틀림없습니다. 민지는 극한 상황까지 몰려 모든 것을 잃고 그 예쁜 얼굴에 상처까지 입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새 삶을 삽니다. 청소년들이 이처럼 꿋꿋하게, 과거에 집착 않고 현재를 사는 건 물론 좋은 일이지만, 저 같으면 도저히 이렇게는 하기 힘들 것도 같아요. 여튼 감동적인 네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이 깨끗하게 맑아지는 듯해서 좋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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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당신께, 다르마 톡
영화 지음, 대지 외 옮김 / 어의운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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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 전쯤인 4월 12일에 영화 스님의 <선 명상(운주사 刊)>를 읽고 서평을 올렸습니다. 이 책은 스님이 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며 남긴 대중 법문 모음입니다. 그래서인지 문체가 매우 쉽고 형식이 자유롭습니다. 읽다 보면 스님이 특유의 그 자애로운 웃음을 웃으시며 내게 말을 건네는 듯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말씀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하고, 세상의 티끌에 찌든 마음이 깨끗이 씻어지는 듯합니다. 과연 고승의 높은 경지는 말 한 마디로 중생의 번뇌를 잠재우는 것인가 봅니다. 

p72 등에서 영화 스님은 자신의 스승인 선화상인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이 종교라는 걸 갖게 된 동기는 불멸(immortal)에의 지향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몸에 아픈 데도 없고 매일매일이 즐거우며 신체 기능도 정점에 달한 듯합니다. 물론 어린이는 근육도 약하고 잦은 전염병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대신 몸에 기운이 넘쳐나고, 쓸 수 있는 힘에 비해 몸이 참 작습니다. 그래서 열심히도 뛰어다니고, 적게 먹어도 활력이 폭발할 듯 생성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스님도 책에서, 인체는 13세가 절정이며 이후로는 그저 쇠퇴할 뿐이라고 하시는데 어떤 의미에서 정곡을 찌르신 듯합니다. 

아무튼 선화상인께서는 도교의 가르침을 예로 들며, 사람은 무려 일만년을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으며, 이는 수련자가 일생을 걸고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말씀을 했다는 게 영화 스님의 증언입니다. 만 년이라니 너무 허황되지 않은가? 게다가 정통 불도도 아닌, 인접 종교의 가르침이라니 말입니다. 다만 만 년이라는 숫자에 지나치게 구애받기보다, 바른 호흡과 명상의 수행으로 몸에 잔고장 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또 번민과 증오, 불안, 걱정, 강박 같은 것 없이 편안한 생을 영위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신선이라든가 천계인의 삶을 사는 것에 근접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성격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한 1년은, 아프고 괴롭고 불안한 십 년보다 더 가치있다고 볼 수도 있죠. 

관음보살은 세상 사람들의 근심과 고통과 신음과 애로를 멀리서 눈으로 보듯이 들으며 챙기신다고 해서 이름이 그리 지어졌습니다. p126에서 영화스님은 스승인 선화상인에 대해 회고하며, 자신만 아프다고 힘들다고 울면서 불평하는 속 좁은 염원을 관음께 보낸다면, 과연 이를 보살님이 미쁘게 보시겠냐며 이기적이고 소견이 좁은 우리들을 비판, 질타합니다. 세상 곳곳에서는 부조리와 잔인함과 탐욕이 판을 치며, 간악한 자들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괴롭히고 착취합니다. 부처님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며 세상에 나만의 의지, 욕망, 집착이라는 게 다 허상임을 일찍부터 가르치셨거늘, 자신의 작은 불편을 침소봉대하여 떠드는 짓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미숙합니까. 

참된 행복이란, 그래서 일체를 놓아버려야 비로소 내 손에 남는다고 스님은 말합니다. 안 잡히는 걸 애써 쥐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행복은 나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선 명상>에서도 스님께서는 결가부좌의 미덕을 설명하며,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수록 몸의 고통은 점차 잊혀지는 놀라운 이치를 체험하라고 권했습니다. 이 책 p175에서도, 스님은 우리가 몸을 꼬아 가부좌로 앉을 수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이냐고 가르칩니다. 아파서, 혹은 그렇게 태어나서, 몸 하나 뜻대로 가눌 수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다르마라는 게 알고 보면, 우리한테, 일체의 잡되고 삿된 걸 버리고 진리를 향해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인 줄 알게 된 우리한테, 다 이익을 주게끔 애초부터 설계가 된 것(p242)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출산의 고통이 그렇게나 심했는데, 아이를 또 낳을 수 있겠어요? 부처님이 산모에게 이리 묻자, 산모는 "내 아이가 다르마를 말할 수 있다면, 앞으로 일곱 번은 더 낳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답니다. 아이가 바르게 자라고 순수함을 지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어떤 아픔과 고난도 감내하겠다는 게 어머니의 마음이요, 또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함입니다. 스님은 지극히 오묘한 궁극의 이치를 가장 쉬운 말로 전달하며, 청중들도 행간에서 군데군데 등장하여 열렬히 영화스님에게 호응하는 듯한, 어떤 현장감까지 담긴 멋진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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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그렇게 왔다 - 나는 중증장애아의 엄마입니다
고경애 지음, 박소영 그림 / 다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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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세상에 우리가 생명을 갖고 태어난다는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대부분의 갓난아기들은 부모, 다른 주변 인물들의 기대와 환희 속에 고고의 성과 함께 태를 열고 이 세상에 나옵니다. "그날은 벼락같이 왔다(p10)." 이 대목은 독자인 제가 참 충격적으로 읽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의료진이 "건강하다"며 가족과 산모를 안심시킬 때, 그런 당연한 말을 왜 하는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낮은 확률이긴 하나 이 책에 나오는 준영이의 사례를 볼 때 그 당연함이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준영이는 원래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생후 6개월에 폐렴에 걸려 갑자기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렴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고 위험한 병이지만 예측이 어려운 다양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어서 더욱 신생아, 유아들에게 위험합니다. 이어 급성 패혈증이 생겼고 뇌부종도 발견되었습니다. 아직 어려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도 아기지만, 엄마(이 책의 저자인 고경애씨)도 얼마나 충격을 받고 놀랐겠습니까. 이렇게 어린 단계에서 뇌에 상처를 입으면, 그 좋지 않은 영향이 평생 간다고 합니다. 준영이는 생명에 지장이 생길 단계는 다행히 지났으나, 대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때 이미 준영이한테는 위로 두 (어린) 누나들이 있었고, 친정아버지께서 항암치료를 받는 등 매우 힘든 처지였다고 나옵니다. 책만 읽어도 저자께서 얼마나 고통스럽고 걱정이 많으셨을지 그 무게가 페이지 밖으로 밀려오는 듯했습니다. 이 와중에 기어이 부친이 돌아가셨고 준영이는 슈퍼항생제가 투약되고 나서야 간신히 중대 고비를 넘기는 등 저자에게는 거의 산 너머 산과 같은 불행과 불운이 닥칩니다. 어떤 사람한테 아무 잘못도 없이 이처럼 나쁜 일이 휘몰아치는 걸 보면 과연 세상에 정의가 있나 하는 짙은 회의감이 듭니다. 

준영이처럼 중대 고비를 넘긴 아이들에게는 재활치료가 필요합니다. 이런저런 병원들이 있긴 했는데 아이한테 딱 맞다 싶은 시설은 또 그리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준영이는 재활치료를 힘들어 했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 치료도 힘든 판에 금전적인 부담, 주위에서 갖곤 하는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 질시 등 때문에 더욱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고 나옵니다. "온몸의 강직이 심하고 전신마비에 경기약을 복용하는 아이들은, 치아가 제 자리에 나기 힘들다.(p50)" 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실은 또 처음 알았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이미 이런 심각한 증상이 발현되기 전에 예측이 되나 봅니다. 이가 제 자리에 가지런히 나지 않고 제각각으로 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가 보기에도 가슴이 찢어질 뿐 아니라, 아이 본인의 고통은 또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5년의 간병 끝에 저자 가족은 정말로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p98). 가족끼리 여행 떠나는 게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별것아닌, 많은 추억 만들기 노력 중 하나이지만, 간병 때문에 운신 자체가 자유럽지 못한 이들에겐 여행 중에 맞는 모든 순간이 특별하고 새롭습니다. 이 대목 역시 참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아무리 일상적인 체험과 과정이라고 해도 이 순간이 다시 오기 힘들다는 깨달음이 오는 순간 모든 동작, 소통, 공감이 새롭고 소중하다는 점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심한 장애를 겪은 것도 힘들지만, 의사 선생님이 처음에 말했던 대로 준영이는 결국 오래 살기가 힘들다는 게 엄마를 더욱 마음아프게 했습니다. 결국 준영이는 여기저기가 아프면서도 회복이 안 되고 매일매일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에게 엄마라고 단 한 번도 말해 주지 않고, 그렇게 내 품을 떠나 멀리 날아갔다(p131)." 숨을 거두었을 때 평소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던 그 표정이 안 보이고, 그렇게 편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그때 이랬으면, 이렇게 했으면 달라졌을까?" 아이 생일, 세상을 떠난 날이면 더욱, 내가 지금 누리는 편안함, 편리가 아들 준영이의 죽음과 맞바꾼 건 혹시 아닌지 자책이 안 느껴질 때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도 없지만(p152), 엄마의 마음은 또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아이의 가래 등을 빼 주는 작업을 석션(suction)이라고 하는데(p16, p164 등), 엄마가 아니면 도저히 기민하게 임할 수 없는 어려운 간병 중 하나입니다. "이젠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가 없다(p198)." 그러나 딱지가 앉았다고 막 떼어버리면 상처가 덧나며, 남은 이들은 그렇게 상처를 달랠 수밖에 없다며 담담히 말씀하십니다. 모정이란, 모성애란 무릇 이런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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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바로쓰기 속담편 저학년 2 - 개정2판 글씨 바로쓰기 경필 시리즈
컨텐츠연구소 수(秀) 기획 / 스쿨존에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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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초등 저학년용 속담으로 바른 글씨쓰기를 가르치는 교재입니다. 1권 표지에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가 적혔는데, 이 둘째 권에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며 문장 끝에 느낌표까지 붙었습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깔끔하게 쓰인 글씨 안에 담겨야 더 진정성 있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뜻 같습니다.  

전 우촌초 교장 김연숙 선생님의 서문(p3)을 보면 "경필"이라는 단어 뜻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붓과 대비된, 딱딱한 필기도구를 사용하여 궁서체로 쓰는 펜글씨." 경필(硬筆)에서, 앞의 경이라는 글자는 단단하다는 뚯입니다. 붓은 그와 반대로, 대단히 부드럽지 않습니까. 김연숙 선생님은 "어린이들은 꼭 궁서체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도 하십니다. 글자 크기가 들쭉날쭉함 없이 일정한 크기만 유지하게 써도 성공이라고 하시네요. 또 경필 연습 텍스트로 속담을 고른 것도, "속담 속에 든 풍자와 유머를 보고 언어적 통찰력과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며 그 고유한 교육적 효과를 지적합니다. 독자로서, 과연 그렇겠다며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p29에는 "손도 안 대고 코 풀려 한다."가 나옵니다. 행(=줄)이 바뀌긴 했어도, "풀려"와 "하다"는 분명히 띄어서 쓰였는데, 본용언과 보조용언 관계여서 그렇습니다. 1권에 등장했던 두 캐락터가 또 보이는데, "설거지"가 맞는 표기이겠습니다. 페이지 중간에 보면 "손도 안 대고 남의 도움만 바라는, 노력 없는 뻔뻔한 행동을 비판하는 교훈"을 독자들에게 상기합니다. 국어를 배움과 동시에, 사회 생활에 더 잘 부합하는 바른 심성, 인성까지도 교육할 수 있는 소재이겠습니다. 또, 이 교재가 손을 부지런히 놀려 바른 글씨를 가르치는 목적인 만큼, 글씨 잘 쓰려는 근면한 습관 배양과도 연계되는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업은 자식에게 배운다."라는 속담이 p38에 나옵니다. 이 교재에 나온 모든 속담은 그 속뜻에 대해 바로 당해 페이지에서 쉽게 풀어 주는 난이 마련되었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겸허하게 배울 것은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업은"이란 말은 "자식"을 꾸미는 관형어이며 등에 업었다는 뜻입니다. p44를 보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가 나오는데, 아래 두 캐릭터가 어제 싸운 급우와 짝이 되었다며 이 속담을 인용합니다. 어렸을 때는 옆 친구와 자주 싸우며 감정이 상하기도 하죠. 원수라는 단어의 뜻을 모를까봐 역시 설명을 친절하게 달아 놓았습니다. 

1권도 그랬지만 이 교재는 가끔 콩트를 실어 학생들의 지루함을 피하고자 합니다. p57을 보면 토끼와 거북이가 등장하여 경주를 벌이던 지난날을 회고합니다. 이들은 경주만 한 게 아니라, 용왕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봐서 토끼의 간 이야기에 나온 그 당사자들이기도 한가 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인 셈인데, 실제로 이 콩트에서 둘은 외나무다리에서 딱 마주쳐 누가 먼저 건널 지를 놓고 실랑이 중입니다. 그러나 결말은 해피엔딩인데, 지난 사연을 감안하면 재미있는 구성입니다.   

1권의 굼벵이처럼, 이 2권에는 베짱이(p67)가 등장하여 초등 저학년들에게 맞춤법의 난도를 높입니다. 콩트 도중에는 속담이 부호로 가려져서, 어떤 문장이 들어가면 뜻이 잘 통하겠는지를 묻습니다. 앞선 콩트에서, 갈등하던 두 인물, 아니 동물들이 결국 화해하고 대립을 해소한 반면, 개미와 베짱이는 끝까지 의견을 달리하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상황을 떠올리며" 답을 맞혀 보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교재는 학생들의 문맥 파악 능력을 증진시키려 합니다. 

p70을 보면 "형만 한 아우 없다"가 나오는데, 이 역시도 띄어쓰기에 유의해야 합니다. p75에 "혹 떼려 갔다가 혹 붙여 온다."가 나오는데, 그 베짱이처럼 생긴 캐릭터가 다시 등장하여 이 속담에 걸맞은 재미있는 경험담(?)을 들려 줍니다. p78 이하에는 경필 연습란 없이, 여태 나온 모든 속담들을 가나다순으로 총정리합니다. 

"글씨를 바르게 쓰는 것은 곧 마음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김연숙 선생님의 말씀을 두고두고 새기게 되는 교재 공부였던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교재를 초등 저학년에게 공부시킨 후, 어른이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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