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얼 씽 - 문학 형식에 대한 성찰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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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쯤에 테리 이글턴의 <문화란 무엇인가>를 읽고 서평을 남긴 적 있습니다. 역자 이강선 박사는 후기에서 "이글턴이 이번에는 본연의 전공인 문학으로 돌아왔으며, 그것도 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사실주의를 옹호하고...(p235)"라며 이 책의 의의를 설명합니다. 이 문장을 읽고 새삼, 사실주의가 소설 장르의 완성, 정착에 그만큼이나 기여했었음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또 본디 마르크스주의의 지평 위에 서 있는 이글턴이기에, 그가 논하는 사실주의가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어느 정도나 상호의존, 포섭, 중첩, 길항하는지도 흥미롭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책에다가 제목을 "더 리얼 씽"이라 짓다니 과연 그답다 싶었습니다.  

어떤 명제라고 해도, 그것은 사실 진술임과 동시에 평가입니다(p48). 순수하게 어느 하나의 영역에만 속하는 언명은 비트겐슈타인의 판타지랜드에나 존재한다는 건 이미 판명 난지 오래입니다. "묘사"라는 게 철저히 기술적, 중립적으로 대상을 그리기만 한다고 여길 수 없으며, p48에서 로저 스크루턴이 말하듯, "무엇을 묘사할 때는 그것을 비난하는 힘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A 매킨타이어는 "사실 진술이 참 또는 거짓이듯, 평가 역시도 진위 판정의 대상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렇게,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게 항상 기계적이고 중립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데서, 이글턴이 옹호하는 사실주의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p63에서 이글턴은 사실주의를 중간계급이 낳은 아이라고 확인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사실주의는 귀족이 만들어낸 과장된 낭만주의, 위선적 도덕주의와 대치되어 탄생했습니다. p76을 보면, "대실재(the Real)는 본질적으로 환상적"이라는 정신분석학의 역설적 언명이 다시 소환됩니다. 사람은 원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좋아하지도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건 백일몽(reverie)이지 단단한 중력을 뿜는 대지, 부동산(realty)가 아닙니다. 대실재라니, 원 그런 건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자연주의에 대해서는 특히 이 책 p181 이하 참조). 

마르셀 뒤샹은 철물점에서 파는 변기 하나를 갖다놓고 "분수"라 명했는데 원래 인간의 인지라는 게 다 이런 식이며 발자크니 스탕달이니 플로베르니 하는 위인들도 결국은 모든 걸 오브제화(化)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재현과 반영, 배제와 왜곡(p93) 사이의 넘나듦이 여전히 불편한데, p97에서 이글턴은 근대 사실주의의 큰 업적을, 페트라르카 식의 소네트 규칙으로부터 창작자와 향유자를 해방시킨 데서도 찾습니다. p107에서 이글턴은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며 "사실주의는 조작, 왜곡, 편파"라고까지 극언합니다. 사실 진술에 가치가 개입하는 걸 넘어 아예 대놓고 왜곡이라 규정하는 과감함에 놀랄 뿐입니다. 

p124에서 이글턴은 아들뻘 매슈 보몬트(<평론가의 임무>에서 대담했죠)를 인용하며 사실주의는 순진하면서도 정직하지는 못한, 일종의 환상에 대한 집요한 추근댐, 혹은 트롱프뢰유(tromp-loeil)라고까지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글턴의 책을 여태 읽어 온 우리가 알듯, 이글턴의 타매는 나중에 칭송으로 바뀌는 예가 비일비재하죠. p134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이글턴은 카프카의 <변신>을 예거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이글턴적 관점에서 사실주의의 극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사실주의를 일러 모든 직업, 신분에 대한 환상을 깼다며 띄우고, 반대로 막스 베버는 환멸(p135)의 괴로움을 개탄합니다. 

루카치는 당연하게도 이 책 곳곳에서 이글턴의 까마득한 선배처럼 멘토처럼 모셔져(?) 결정적일 때마다 논거로 피난처로 활용됩니다. 이글턴이 할 말은 애저녁에 루카치가 다 해 놓지 않았을까요? 루카치가 불멸이 아니기에, 그가 미처 못 한 말은 우리가 이글턴에게 마저 듣는다고 간주해도 되지 않을지. 이 독후감 서두에서 제가 바람 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p163 이하에서 본격 논의되는데 재기발랄하신 이글턴도 여기서는 우리 독자의 예상 범위를 크게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p201 이하에서 이글턴은 신교와 구교의 차이까지 논급하며 구교가 다분히 생과 세계에 대해 환상을 유지하길 원했다면 신교는 금기를 해제하고 생의 불쾌함을 사람들 앞에 그대로 노출한 공(?)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실주의를 향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 책의  주인공은 사실주의이기에 (그에게서 정말 흥미롭게 들을 수 있을) 포스트모던에 대해서는 p217 이하에 아주 짧게만 논의됩니다. 짧은 예고편만이지만 이상하게 재미있는데 다 그의 썰 푸는 재능 덕인 줄 우리가 익히 압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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