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영화 읽기 수업 - 질문이 있는 교실 영화 이야기
지태민 지음 / 이비락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는 어린이가 세상을 배워 나갈 수 있는 좋은 텍스트 중의 하나입니다. 그저 말초적 재미만을 얻는 일회용 미디어로만 영화를 생각할 게 아니라, 영화 내적인 문법과 구조를 정석대로 배워 가며 감독과 배우가 이 작품 안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어린 독자, 관객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책 저자 지태민 선생님의 방법론이 학교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책의 편제도 참 좋습니다. 1부는 단편영화 읽기인데, 일단 어린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시청각 매체에 집중하기 힘드므로 단편이 적합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단편 영화 중에는 흥행보다 메시지 전달, 작품성 구현에 집중한 명작들이 많습니다. 이런 작품이라야, 어린이를 깨어 있는 시민으로 양성하기 위한 좋은 교재가 될 수 있겠습니다. 

2부는 주제별로 읽는 영화들입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너무 거창하거나 어렵지 않고 자신의 현실 문제에 적용해 볼수 있는 주제들인데, 학폭, 진로(進路), 환경, 지구촌의 평화, 장애인 등 소수자 이해 등 다섯 범주로 나뉩니다. 책에 실린 대부분 작품들이 제가 몰랐던 것들이었는데,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찾아서 관람한 후, 우리 주변과 세계의 현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만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3부는 학교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다. 국어, 도덕, 사회, 역사, 과학, 실과 등 여섯 과목의 공부와 관계 있는 작품들이 모였습니다. "실과"라는 과목 이름을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데, 초 4~6학년 때에만 배우기 때문입니다. 1~3학년 때에는 너무 어려서 배우지 않고, 중학교 때에는 가정/기술로 바뀌겠으며, 고등학교라면 실업계로 가야 그런 수업을 들을 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학교 교과목과 영화가 이렇게 밀접히 연결되어 교재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시적(詩的) 허용"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문법적으로 말이 안 되는 표현이라고 해도, 시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어떤 아름다운 효과를 위해 구태여 언어 규범을 따지지 않는 예외를 가리킵니다. p86을 보면 "영화적 허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역시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이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미지, 장면을 관객에게 대담히 표현하는 게 하나의 특권이며, 예외가 아닌 원칙에 가깝게 취급하고, 우리 관객들도 기꺼이 그런 영화적 허용을 감상하고 즐기기 위해 상영관에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린 학생의 성장이라는 목표와 관련하여 <라따뚜이(2007)>라는 작품이 소개됩니다(p143). 성취기준 연계(이 책은, 수록된 모든 영화 작품에다 이 항목을 부기합니다. 학교 현장에서 지도하는 교사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입니다)는, 2슬, 6도, 그리고 6실의 다섯 개 사항입니다(슬: 슬기로운생활, 도: 도덕, 실:실과). 주인공 레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에 대해 교사는 학생과 토론을 통해 밝히고, 이로부터 뽑아낸 교훈을 아이에게 내면화할 수 있게 지도합니다. 그렇다고 영화 감상과 수업이 지나치게 계도적 분위기로만 흐르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모두가 재미있게 본 장면은 무엇이고, 그런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기법이 쓰였는지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눕니다. 이런 수다 비슷한 사후 정리 시간이 없다면 구태여 영화를 보려는 이들이 없을 것입니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에서 첫걸음을 떼지만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sein)을 지양하고 어떤 이상적인 당위(sollen)으로 나아갈 것을 관객에게 촉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영화는 꼭 큰 돈을 들여 성인 예술가들만이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며 어린이도 감독이 될 수 있습니다(p221). p330을 보면 소설가 김훈의 원작을 바탕으로 윤제균이 연출한 <영웅>이, 학생들의 교육적 영화 읽기의 텍스트로 제시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역사가 개인과 특정 국면에서 어떤 접합점을 마련하여 폭발적 변용을 겪게 하는지, 소명의식이 어떻게 한 개인을 초월적 존재로 만드는지 깊이 성찰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그간 무심히 보아넘겼던 여러 영화적 독해지점을 음미하게 되어 좋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일 음대 유학 가이드북 - 입시부터 귀국까지 한 번에
김주상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인들도 너무나 사랑하는, 서양 고전 음악의 마스터들인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등은 모두 독일어권 출신입니다. 합스부르크 황실은 비록 오스트리아 일대만을 직접 통치하였으나, 두루 독일어권에 권위를 간접으로나마 미쳤으므로 저 모든 음악가들을 퉁쳐 독일 사람이라고 해도 별반 틀릴 바 없습니다. 20세기 들어서도 명지휘자 故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5년 전에 타계한 테너 가수 페터 슈라이어 등이 모두 독일어 사용자였습니다. 고전 음악을 공부할 때 명문 컨서버토리로 우리는 보통 미국의 줄리어드 스쿨을 떠올리지만, 아무래도 진정한 영재의 산실은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에도 많이 분포한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 저자인 피아니스트 김주상 대표는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에서 최연소, 최고점 졸업 기록을 남긴 분이라고 책 앞날개와 본문 p5에 적혔습니다. 수상 경력은 폴란드 파데레프스키 콩쿨 우승 등이 나오는데, 이 콩쿨이 기리는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는 우리 한국인들도 잘 아는 <소녀의 기도>를 작곡한 바로 그 사람이며,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일 뿐 아니라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후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정부에 참여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패망을 채 보지 못하고 타계했죠. 

저자도 서문에서 밝히지만 요즘은 인터넷에 워낙 정보가 많아서 독일 이민이나 유학 준비하는 분들이 각종 커뮤니티에 가입하여 궁금함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시도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커뮤에서 얻는 정보는 서로 충돌하는 것들이 많고, 수집하는 사람 머리에 큰 그림이 미리 그려져 있지 않으면 정보가 뒤섞여 뭐가 뭔지 모를 혼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영재 출신, 현지 유학을 모범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선배의 조언을 담은 책으로 체계를 잡은 후에, 다시 최신의 맞춤형 정보를 모아(인터넷에 올라 있는 사항들은 잘못된 것들도 많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학교를 고르고 구체적인 유학 계획을 짜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누가 전문 입시대비기관 도움 없이, 대학교 온라인 사이트에 찾아가 혼자 힘만으로 음대 미대 입시 준비를 하려 든다면 어떨까요? 학교 입학처에서 게시한 다양한 정보(대체로 한국의 대학교들은 그나마 이런 쪽으로 준비가 잘 된 편입니다)를 통해 지원자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척척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힘들 것이라고 전 예상합니다. 하물며 독일의 대학교라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독일어라는 언어 자체가 장벽일 겁니다. 저자께서는 자신의 모교인 한스 아이슬러의 예를 들며, 학교 홈피에서 Studienangebot(전공별 안내), Bewerbung(원서 접수) 등을 먼저 눈여겨 보라고 합니다. 서류 관련 요구사항은 주로 Voraussetzung이라고 쓰인 곳을 살펴 보라고 나오네요. 맨땅에 헤딩 격으로, 아무 독일어 지식도 없이 무작정 학교 홈피만 찾아가서 살핀다면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책을 참고도 해야 하는 거죠. 

유학을 위해서는 독일어 공인어학시험 정보도 필요합니다. 이 어학시험점수(B1 등급이 보통 필요하다고들 하죠), 그리고 이력서까지도 주한독일대사관에 가서 번역공증, 사본공증을 받아야 한다고 나옵니다(p57). 이것 말고 공문서의 경우는 한국 외교부, 법무부 등에서 처리하는 아포스티유(apostille)까지 받아야 합니다. 아포스티유에 대해서는 본문 곳곳, 권말 부록에 자세히 나오므로 꼼꼼히 읽고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하겠네요. Termin은 본래 약속, 예약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인데 이 책에는 독일 영사관 테어민 잡는다는 말이 정말 자주 나옵니다. 그만큼 힘들다는 뜻입니다. 

엘다 네볼신 교수는 이 책 여러 군데(p5, p66 등)에 등장하는, 김주상 대표의 은사분입니다. 제가 이 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대목이, 독일 음대 입시에서는 교수의 재량이 거의 절대적이며 불합격시 그 이유도 뚜렷이 설명하지 않고, 심지어 실력이 출중한데도 개인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콘탁 단계에서 거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이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당장 검찰에서 수사를들어갈 만큼 큰일이 나는 거죠. 물론 한국과 독일은 학자나 연주자들의 직업정신, 청렴도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되며 사회적 신뢰라는 게 그만큼 자리를 못 잡은 탓입니다. 아무튼 한국과는 입시 풍토가 판이하므로 정말로 충분한 준비가 없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는 게 이쪽 분야인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럼프 2.0 시대, 글로벌 패권전쟁의 미래
이철환 지음 / 메이트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럼프 2.0 시대가 한 달 정도 후면 개막합니다. 시중에 나온 책 중에는 트럼프가 11월 초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의 사정만을 반영하여 출간된 것도 있지만, 이 책은 p14:2에 나오듯 그가 카멀라 해리스 현 부통령을 적지 않은 차이로 꺾고 당선된 사정까지를 다 반영한 내용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 이철환 선생은 무협 자문위원, 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등을 역임한 경제고위관료 출신이며,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는 행정고시 재경직을 대학 재학 중에 패스했던 엘리트입니다. 한국처럼 소규모 개방경제체제를 취하며 부존자원이 전무하다시피한 나라는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수립할 때 대외정세를 면밀히 살필 수밖에 없으며, 저자처럼 정부 정책 결정 섹터에서 오래 봉직해 온 분의 갈고닦인 안목은 그만큼 날카롭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달성하는 골디락스 상태를 십수년 동안 이어온 게 세계경제였습니다(p53). 또 중국은 중국대로 세계 경제에 저물가라는 혜택을 간접 제공하면서 스스로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 등 국위를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고 많은 보조금이 뿌려지면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급상승하고, 팬데믹이 해제된 후에는 시중의 통화량을 회수하기 위해 미 연준에서 금리를 상향함으로써, 현재는 미국만 호경기일 뿐 다른 나라들은 금리역전현상(신흥국이 미국보다 금리가 높아야 함에도 오히려 낮아짐) 때문에 자본유출, 환율급등으로 고생 중입니다. 한국은 오늘만 해도 새로 1450원대를 터치했기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중이죠. 

2차대전 후에는 미국과 서유럽 중심으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을 마련하여 국제경제 분쟁을 조율하고 무역을 활성화하려 노력했습니다. 냉전이 끝나갈 무렵 우루과이라운드가 마련되어 더 포괄적인 범위에서(농산물 개방 등) 국제무역의 룰을 정했고, 1990년대 들어 당초 예정에는 없던 WTO까지 신설하였는데 이것은 유럽 측에서 미국의 일방통행에 대해 적당한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습니다. p110을 보면 이 WTO를 보완하기 위해 양국(혹은 다국)간 협정으로 등장한 게 FTA인데, 대표적인 게 빌 클린턴 시대에 체결된 NAFTA입니다. 한국도 21세기 들어 미국과 양자간 FTA를 맺은 바 있습니다. 

어제 환율이 급등하자 이창용 한은총재가 좌시하지 않겠다고 구두개입을 시도했는데 이렇게 하면 미국에서 환율조작하지 말라고 감시대상 리스트에 넣곤 합니다. p126을 보면 포치라는 말이 나오는데, 破七(파칠)을 중국식으로 이렇게 읽으며 중국 경제 당국이 환율을 달러당 7위안 이하로 떨어지게 용인하는 걸 가리킵니다. 강달러가 이처럼 일상화하면, 설령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고율관세를 부과해도 환율하락으로 인해 그 효과가 상쇄된다는 역설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에는 기름값이 정말 싸져서 다들 차 몰고다니는 맛이 난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된 건 이른바 치킨게임, 즉 사우디 같은 나라에서 미국의 신생 셰일오일 업체들을 다 죽이려고 일부러 증산을 했기 때문(p146)입니다. 이때 한국은 수출경기도 정말 좋아져서 증시에서는 이른바 차화정(자동차, 섬유화학, 정유) 주식이 하늘높은 줄 모르고 올랐습니다. 책에 나오듯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러시아가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관을 잠가 버린 게 코로나 이후 경기회복 추세에 아주 관뚜껑을 박아 버렸는데 이후 세계경제 분업체제라는 게 아직 그 꼴을 제대로 못 갖춘 셈이라 경제전망에는 먹구름이 가득 낀 상태입니다.  

달러의 시대는 정말 저무는가? p192에 나오듯이 국제 거래에서 달러의 비중이 줄어드는 건 통계로도 이미 확인이 되는 사실입니다. p197에는 푸틴이 SWIFT에서 퇴출된 후 "위안화 사용을 지지한다"고 발언한 사실도 인용됩니다. 그런데 올해 10월말에 러시아 카잔(우리나라 축구 팀이 2018 FIFA 월드컵에서 독일을 이기기도 한 곳이죠) 있었던 브릭스 총회에서 푸틴은 마치 유로화처럼 생긴 브릭스 지폐 견양(시안)을 꺼내들기도 했는데 이건 중국한테 그리 기분 좋은 제스처가 아니었습니다. 브릭스는 국가들 사이에 너무도 이해관계가 다른데 단일통화는 고사하고 자유무역 단계라도 성사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매우 낮습니다. 

패권 경쟁의 마지막 스테이지는 우주(p308)입니다. 중국은 최초로 달 뒷면에 2019년 연착륙을 성공시켰고(p326), 이 우주선의 이름이 嫦娥(항아) 4호입니다. 중국어로는 창어라고 읽는데 고전 소설에서 선녀라든가, 혹은 왕의 궁궐에서 시중드는 자색 뛰어난 궁녀를 이르는 말이었죠. 한편 세계 최초로 우주군(宇宙軍)을 편성한 건 다름아닌 1기 트럼프 정부였는데, 이후 모든 나라들이 경쟁하듯 우주에서의 활동 에 박차를 가하는 바람에 말 그대로 전쟁이 벌어지는 판입니다. 과연 이 대결상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한 살인 계획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스테리 장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누군지 하는 요소는 작품의 재미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합니다. 프레데릭 브라운의 <The murderers>라든가, 크리스티 여사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또 ABC 살인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김서진 작가님의 이 작품은 이른바 경계선지능을 지닌 어떤 여성의 살인 완수를 위한 분투기(?)인데...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살인이라는 극한의 범죄,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최악의 악행을 꿈꾸는 화자(예비 범죄자)를, 미스터리 독자들은 간혹 응원하게도 됩니다. 시드니 셸던의 <내일이 오면(1980년대말에 MBC에서 원미경씨 주연 드라마로도 각색했었습니다)> 같은 걸 보면 젊고 아름다운 여성 주인공은 자기 인생을 망쳐 놓은 남자에 대해 복수를 꿈꾸는데, 이런 경우는 어느 정도 정당화의 근거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악당이 계획, 실행하는 범죄마저 독자들이 은근 그 완수를 격려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캐치 미 이프...> 같은 게 대표적인 예겠는데, 주인공 버프라는 게 그만큼이나 큽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피해자인데다가, 지능도 떨어지고(그렇게 태어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p25), 살해의 타겟이 아주 나쁜 녀석(주인공의 말에 의하면 일단 그렇습니다)이기까지 하니 당연 독자들의 동정을 받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그 특정 가해자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사회적 약자인 그녀를 돌아가면서("나라고 빠질 수 없지"라는 듯) 착취한다는 건데, 독자는 이 대목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소설, 영화 <도가니>를 보듯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게 신기한데, 그 폭력적인 남편이 강요를 해서입니다. 

p17, p25에 나오듯 남홍진은 절에서 20년 가까이 밥 짓는 기계로 일했습니다. 가뜩이나 나쁜 머리로 태어났는데 그런 기계적 생활에 길들여졌으니 생각이라는 걸 하는 법을 잊을 만도 합니다. 그래서 남홍진은 작품 전체을 통해 끝없이 되뇝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이 호흡처럼 습관이 된 사람한테는 어떻게 사람이 한 순간이라도 생각을 잊을 수가 있을까 싶어도 세상에는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p105에 나오듯 외모상으로도 봐 줄 것 하나 없는 그녀는 대형 전기밥솥 같은 취급을 받았을 뿐입니다. 

p120 이하에서도 알 수 있듯 서화인은 진중하고 유능하며 성실한 형사가 틀림없습니다(p38에서, 시청 직원이자 그의 연인인 오정미의 평가로는 "약간 둔한 아저씨"라고도 합니다). 이천식 목사를 만나러 가서 한 청년과 우연히 이야기하는데 뜻밖에도 목사의 아들 이동현입니다. 18년 전에 자살한 중학생(p87) 서현의 오빠이기도 한데, 아이들 이름이 하필이면 동현, 서현이라서 재미있기도 합니다. 물론 둘 다 한국에서는 최고로 흔한 이름이고, 동현이는 모를까 서현의 경우에는 서녘 서(西)가 이름자로 잘 쓰이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의미가 들어간 건 아니겠습니다(뒤의 p253 참조. "현"자 돌림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남홍진은 일종의 맥거핀이고 진주인공은 이 서화인이라는 생각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들었습니다. 

p146에 나오듯 이런 경계선 지능의 주인공 남홍진이라고 해도 일단 확실한 동기가 생기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저도 이런 사람을 눈앞에서 만나본 적 있는데, 그 한심하고 시커먼 속셈이 빤히 보이건만 거짓말이 부끄러움도 없이 술술 나오는 걸 보고 경악한 적 있습니다. 참...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죄의식이라는 게 있을 만도 한데... 당대에 죗값을 받는다고 그래서 손자가 그모양그꼴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피해의식 가득한 인생은 자신이 가해자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사람 하나를 가해자로 망상 속에 세팅하고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남홍진이 계속 이지하를 죽이려 드는 건, 이미 죽은 소명(얘가 서현입니다)이 홍진에게 자신의 살해자가 이지하라고 자꾸 속삭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죽은 소명의 혼(그런 게 있다고 쳐도. p269)은 애초에 홍진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한참 뒤, p225 쯤 돼서야 그 "근거"가 나옵니다). 그런데 p180 이하에 중요한 단서가 하나 드러나네요. 소명은 원래 성씨가 강이었고, 목사는 우리가 앞서 봤듯 이씨였기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얘가 입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이 설령 이지하가 아니라도, 뭔가 억울한 죽음이었기에 혼이 자꾸 꿈에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서화인을 자꾸 괴롭히는 불길한 예감의 근원은 (이유 없이 증거로 조작된 손톱 말고도) 무엇이겠습니까. 나쁜 놈(여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은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는 존재이며, 잘못된 믿음이 흔들릴 때 더 그에 집착한다(p257, p307, p332)." 이 말은 이 목사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한 말이지만, 저는 김서진 작가가 미스터리 독자들을 향해 비판하는 걸로 들었습니다. 왜냐면, 소설 중반쯤에 이르러 이런저런 진상들이 드러났을 때, 아 그렇겠군, 이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되겠군, 타성에 젖은 독자가 성급한 결론을 내리려 들 때 작품은 기발한 반전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만에 기막힌 토종 걸작 한 편 읽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등장인물들도 낭비되지 않고 요모조모로 할 일 다 하고 들어가는 꼼꼼한 구성입니다. 전 처음부터 왜 oooo하고 그분이 서로 o이 같은지가 좀 이상하게 다가왔는데 역시(!) 결말에 가서 일종의 복선인 게 드러나, 저 자신의 빼어난 촉에 자가발전 감탄하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네요 ㅋㅋ 마지막에 ooo과 ooo가 낡은 가게 지하를 빠져나오는 장면도 실제 답사라도 하신 듯 그 묘사가 박진감 넘치고 생생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지만 범인은 역시 ooo가 맞습니다. 이 세끼 아주 악질이죠.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지어내고 말입니다(악질이지만 그럴 만한 동기는 있었습니다). 악당은 본래 죄 없는 사람한테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다며 희한한 물귀신 세뇌를 하려 듭니다. 이런 독특한 빌런을 만들어낸 것도 김작가님의 대단한 재능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렌즈 방콕 : 파타야·깐짜나부리·아유타야 - 최고의 방콕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가이드북, 최신판 ’25~’26 프렌즈 Friends 5
안진헌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여태 중앙북스에서 나온 프렌즈 시리즈 중 방콕 편은 '23년 2월, 올해 3월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리뷰입니다. 특히 25년판은 이렇게 일찍 발매되어 예년에 비해 몇 달 앞선 시점에 서평을 등록하게 되었네요. 역시 여행서는 프렌즈 시리즈가 가장 무난하며, 최고의 동남아 여행 전문가 안진헌씨의 솜씨라서 그저 믿고 읽게 됩니다. 프렌즈 태국 편도 (같은 저자의 솜씨라서) 따로 나와 있으나 아무래도 방콕 일대만 둘러보려는 관광객이 우리 나라에는 많은 만큼 방콕 편을 집중 참조하는 게 더 효율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아시아 대륙 동부에 위치한 나라들은 아무래도 쌀농사 중심 문화라서인지 좁은 지역에 대량의 인구가 모여 사는 곳이 많습니다. 책 p79를 보면 방콕 인구가 천만명이라는 말이 있는데, 스웨덴 전체 인구가 1000만명, 노르웨이 모든 인구가 540만명대이니 방콕이라는 하나의 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지 실감이 납니다. 물론 서울만 해도 900만명대이며, 중국에서 그냥 시골 비슷하게 여겨지는 흑룡강성 하얼빈 시만 해도 천만명이니 동아시아 여러 대도시에 비하면 평범해 보이기도 합니다.  

p81을 보면 쑤쿰윗 일대에는 한인(韓人) 업소가 밀집해 있다고 하니 한국인들이 얼마나 방콕을 자주 찾는지 알 수 있으며 방콕 일각에서 한국식 풍취를 즐길 수 있는 블록도 따로 발달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방콕은 짜오프라야 강이 남북으로 흐르는데 서울의 한강이 동서로 흐르는 것과 대비됩니다. p82를 보면 쑤쿰윗의 교통을 설명하면서 운하 보트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는 물의 흐름이 잠시 동서로 바뀌고(사행천 비슷하게요) 그래서 책에서도 동서방향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운하 보트는 그저 교통 수단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현지 낭만 체험의 핵심 코스 중 하나입니다. 

방람푸 일대를 설명하는 섹션에서 p152를 보면 10월 14일 기념비가 나옵니다. 이때 태국은 타놈 장군이 사실상 다스리고 있었는데 1973년 10월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 정권이 무너지고 라마 9세 국왕도 일시적으로 도피합니다. 잠시 민주 정부가 들어서지만 무능을 노정하여 2년 후 군부가 재집권하고, 19년 뒤인 1992년에도 유혈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과정 내내 라마 9세가 왕이었으며 다소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태국의 헌정질서 최소한을 지키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10월 14일 기념비는 1973년의 그 사건을 기리는 뜻에서 제작되었습니다. 현재는 그의 장남 라마 10세가 재위 중입니다. 

영화 <왕과 나> 같은 고전을 보면 싸이암이라는 나라가 나오는데 바로 태국의 옛 이름입니다. p227을 보면 "싸얌"이라는 태국의 옛 이름이라는 정보가 박스편집되어 나오는데, 안진헌 선생의 책들은 관광 실용 정보 외에도 이런 인문지식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게 좋습니다. "싸얌"이 맞는 말인데 Siam이라는 로마자 표기 때문에 종종 시암이라 잘못 읽히는 것이라고 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렇다면 태국(泰國)은 어디서 온 말인가. 예전부터 자유인이라는 뜻의 타이 종족이 있었고 조송(趙宋) 시대에 수코타이 왕조가 성립하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기록에서 타이는 한자로 泰라고 표기된 게 꽤 오래되었습니다. 

한국의 강북 일대처럼 다소 노후하고 골목이 즐비한 구역이라면 방콕에는 아리(p304)라는 블럭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 은근 맛집이 많은데 p307에 보면 (프랜차이즈인) 나나 커피 로스터의 한 지점이 나오며 다음 페이지는 카민 퀴진이 소개됩니다. p299에는 쑥 싸얌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책의 설명대로 수상 시장의 푸드 코트 형태입니다. "쑥(สุข)"이 바로 행복이라는 뜻이라고 책에서는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태국 고유의 직조 제품 나라야 쇼핑을 위해서라면 p326을 참조할 만합니다. 

프렌즈 시리즈는 주제 지역 외에도 그 인근 명소를 간략하게 짚어 여행 계획에 도움이 되게 합니다. p417을 보면 전쟁 박물관, 죽음의 철도 박물관 등 2차 대전 관련 역사문화 시설이 소개되는데 여기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의 한심한 흔적이 짙게 남아 있습니다. 또 여기도 방콕 인근이다 보니 ถนนคนเดิน(타논 콘 던)이 많은데, 방콕의 특징적인 워킹스트리트에 대해서는 제가 쓴 프렌즈 태국 25년판 리뷰를 참조하십시오. 

항상 느끼는 바지만 프렌즈 시리즈는 컬러사진들만 봐도 눈이 즐겁고, 텍스트도 텍스트지만 다양한 여행 지도들 자체가 보물 덩어리입니다. 너무 좋아서 껴안고 잠들고 싶기까지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