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ㅣ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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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은 해결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모모가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 P25

베포는, 모든 불행은 의도적인, 혹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거짓말, 그러니까 단지 급하게 서두르거나 철저하지 못해서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거짓말에서 생겨난다고 믿고 있었다. - P49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 P51

그는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안정을 잃어 갔다.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썼지만 손톱만큼의 자투리 시간도 남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은 수수께끼처럼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의 하루하루는 점점 더 짧아졌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그 속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는가 하면, 한달이 지나갔고, 한 해, 또 한 해, 또 하한 해가 후딱 지나갔다.
그는 회색 신사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니 그 시간들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아끼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푸지 씨는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시간을 아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정말 빠르고 점점 더 빨리 흘러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라도 하면, 기겁해서 이를 악물고 더욱 더 시간을 아껴 쓰는 것이었다. - P94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 P98

"보다시피 나는 이 꼴이 되었단다. 아무리 원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 난 끝장이 났어. ‘기기는 기기인 거야!‘ 모모, 이 말 생각나니? 하지만 기기는 기기로 남아 있지 못했단다. 모모, 얘기 하나 해 줄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적어도 나처럼 되면 그렇지. 나는 더 이상 굼꿀 게 없거든. 아마 너희들한테서도 다시는 꿈꾸는 걸 배울 수 없을 거야. 난 이 세상 모든 것에 신물이 났어." - P281

"좋아. 갈게. 하지만 좀 빨리 가게 널 안고 가면 안 될까?"
모모는 카시오페이아의 등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안 돼."
"왜 꼭 네가 직접 기어가려고 하는 거니?"
이 물음에 거복은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했다.
"길은 내 안에 있어." - P314

하지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별안간 모든 사람들이 한없이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당연히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이 아낀 시간이라는 것, 그 시간이 신가힌 과정을 거쳐 되돌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58

이제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시간이 다시 풍부해진 것이다. - P360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 간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ㅅ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지." - P208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망므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모를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벌써 어느새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 P23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ㅅㅣ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 P77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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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ㅣ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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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영혼의 기호다‘
밀란 쿤데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P45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모재 속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편한 바다를 버리고 무엇 때문에 모래와 용암밖에 없는 땅 위로 올라옸을까. 천적을 피하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 정든 곳을 뒤에 두고 낯선 곳을 찾아가는 호기심. 펀한 것보다 고난에 도전하는 모험심. 지금 우리가 달나라로 가는 우주의 꿈과도 같았으리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낯선 이야깃거리는 그렇게 시작된다. 왜 울며 태어났는지. 셰익스피어와 굴드와 헤밍웨이의 상상력을 모두 모아 칵테일하면, 이런 가상의 이야기 한 편이 만들어진다. - P100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그것은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육지를 향해 단신 포복하면서 숨이 막힐 때까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엄청난 고통의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 막혔던 숨통이 뚫리는 소리가 난다. 이미 내 아가미는 허파로 변해 있었고, 지느러미는 어느새 손발로 변해 있었다. 진동하는 허파는 바다와 뭍의 바람결을 타고 돛대처럼, 깃발처럼 부풀고 있었다. 나는 용감한 해병대요, 숨비소리를 내는 환상의 해녀다. 그게 내 출생을 선언한 응애의 울음소리다. - P101

좁은 구멍을 빠져나와야만 끈적끈적한 고치 속의 이물질을 모두 빨아내어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좁은 구멍을 통해 나오는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주고 자유의 날개를 주는 필요한 장치였던 셈이다. - P111

우리말에는 아이가 태어나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그 성장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신가한 낱말 하나가 있다. ‘떼다‘라는 말이다. 태너나자마자 탯줄을 가르고 배꼽을 뗀다. 다음에는 젖을 때고 똥오줌을 가리게 되면 기저귀를 뗀다. 그리고 기어다니던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 첫발을 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옛날이라면 천자문을 떼고 요즘이라면 한글을 떼야 비로소 홀로서기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배꼽떼고, 젖 떼고, 기저귀 떼고, 발 떼고, 천자문 떼지 않으면 팽생 ‘떼‘쓰는 응석받이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 P149

나는 80년 동안 책과 함께 살아왔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은 돌상에서 집은 책이고, 책을 읽어주신 어머니가 나의 두 번째 책이다. 어머니의 말,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그 많은 모음과 자음에서 상상력을 길렀다. 내 최초의 책은 어머니의 몸이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돌잡이로 집어 들던 그 책,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미니의 음성으로 듣던 책. 그 책이 내 창조력의 씨앗이다. - P281

한국에서는 ‘잼잼‘과 ‘곤지곤지‘같은 애들 놀이에서 쇠젓가락으로 콩알을 집는 손기술까지 모두가 돌잡이의 ‘잡는 문화‘로 상징된다. 돌잡이는 ‘꿈잡이‘다. 한국인은 꿈을 꾸지 않고 손으로 잡는다. - P284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오늘을 잡아라!"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쥐라‘는 뜻이다. 우리는 기회를 잡고, 사랑을 잡고, 운명을 잡는다. 더 나아가 세계를 잡기도 한다. ‘받는다‘는 수동적 의미가 아니라 제 손을 뻗어서 제 손에 넣는 것이 잡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국인만큼 잡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민족도 드물다. 첫 생일을 맞는 아이를 ‘돌잡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돌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잡는 것으로 인생을 출발한다. 내 운명을 내가 잡는 것이다. - P285

부모의 품 안에서 길러진 습관이나 버릇은 고스란히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두 살도 아닌 세 살이 인간의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뇌과학에서 밝혀진 이야기지만, 한국 나이로 세 살이 되면 거의 80퍼센트 이상의 뇌발달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미래가 세 살에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 뒤의 한국을 보려면, 오늘 우리는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면 된다. 아이를 잉태해서 츨산해 키우는 3년 동안 80년의 한국 미래를 품고 있는 것이다. 3년만 투자하면 80년이 달라진다. - P305

태어난 집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고향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 P317

아버지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보다 혼이 날까 검나 손가방을 더 힘껏 껴안고 울음 뒤끝을 참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근엄한 얼굴이 무너지고 아주 어색한 웃음이 지으신다. - P325

땅만 보고 나물만 캐는 사람에게는 노동만 있고, 하늘만 바라보고 종달새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궁리만 있다. 그런데 땅의 나물과 하늘의 새는 상호작용하면서 벌판의 지평에 변화를 준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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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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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5 : 팩션
정명섭 지음 / 북바이북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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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
나도 회사 다니는 동안 책 한 권 써볼까- 직장 잘 다니면서 자기 일을 우아하게 책으로 만드는 법
민성식 지음 / 바틀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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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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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ㅣ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5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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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생존해 계신 친정 어머니는 팔순을 바라보시건만도 세상 변화를 어린애처럼 즐거워하시면서 백 살을 살아도 죽을 때는 억울할 것 같다고 한탄을 하신다. 그런데 내가 직조해내는 나의 일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수없이 떴다 풀었다 다시 뜨는 듯한 낡은 실이 몇 가닥씩 어떤 때는 온통 끼어들곤 했다. - P20

나는 속에서 활활 열불이 날 것 같은 예감에 지레 괴로워하면서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유리창으로 보기보다는 차가운 날씨였다. 블라우스 소맷부리로 힘센 날짐승처럼 휘몰아친 바람이 소매를 럭비공처럼 부풀렸다. 노인정 너머로 마주 보이는 동회 옥상에 꽂힌 태극기와 새마을기와 시 마크가 들어 있는 청색기도 어찌나 세차게 펄럭이는지 무지비한 채찍질을 연상시켯다. - P37

날로 고조되어가는 나의 관심이 나도 모르게 가연이네 생활을 조금씩 간섭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침투에 가연이는 조금도 방어적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나타나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생황르 방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넉넉지 못하기로서니 그렇게 황폐를 도처에 처바르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P53

만나본 그는 우리를 가르칠 때의 송사묵 선생님을 너무나도 빼닮아 사람이 자식을 남기고 죽는 한 아주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소름이 끼치도록 분명히 깨닫게 했다. - P186

나도 방금 달을 밀어올린 숲이 웅성대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웅성거림은 미세한 바람이 되어 우리가 앉은 옥상의 공기를 소곤소곤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거 아닐까. - P358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에서 무거운 추가 아래로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내 가슴속엔 도대체 추가 몇개쯤 달린 걸까? 내려앉아도 내려앉아도 또 내려앉을 게 남아 있으니. 그 추는 내 안에 있으면서도 내 체온과는 무관하다. 무겁고도 차디차서 배창자를 뚫고 지나가는 통로를 선연히 느낄 수가 있다. - P361

전에는 중요하던 게 지금은 하나도 안 중요해진 게 또 뭐가 있냐구요? 형님이야말로 왜 안 하던 짓을 하실까? 전혀 귀담아들으실 것 같지 않은 얘기에 관심을 보이시니 말예요. 전에는 형체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그후엔 아니었어요. 눈에 안 보이는 걸 온종일 쫓을 적도 있어요. 아녜요. 육체와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건 나한테는 너무 거창해요. 장미꽃과 향기의 문제예요. 장미꽃은 저기 있는데 향기는 온 방안에 있다. 향기는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 걸까? 고작 그 정도예요. - P392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 P402

수자는 아득하게 들리는 기적 소리를 식별하려고 청각을 곤두세우듯이 그녀 안에서 웅성이는 불안한 소요를 감지하려고 신경을 모은다......수자는 마치 마음에 드는 그림엽서를 마땅한 벽면에 찾아 붙여놓듯이 싱숭생숭해지려는 마음의 갈피를 이렇게 고정시켜버린다. 창 밖의 봄은 이미 예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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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ㅣ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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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찬양을 받는 콘텐츠라고 해서 꼭 나도 그것을 찬양할 필요는 없다. 이효리가 집에서 로브를 입는 것이 멋져 보인다고 해서 나도 따라 입어 보지만 내가 입은 로브는 그저 한 조각의 넝마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서 고전이라고 인정받은 소설이라고 해서 나도 그 작품을 반드시 칭송할 필요는 또한 없을 것이다. 세상에 취향은 다양하고 다양한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니까.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25살에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주일도 훨씬 전에 다 읽었건만, 도대체 이 책과 관련하여 어떤 말로 내 감상을 끄집어내야 할지 갈팡질팡하였다. 더 이상 꾸물대다간 갈팡질팡하는 이런 마음조차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화지만 덩그러니 남게 될 것 같기에 정리 못한 내 마음이라도 남기자고 일단 끄적여보기로 했다. 


소설을 쓴 괴테와 같은 25살로 설정된 주인공 베르테르는 불구하고 오해와 게으름이 불러일으킨 많은 갈등과 다툼을 뒤로하고 발하임이라는 조용한 마을로 내려간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베르테르의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지상과 하늘을 품고 있는 발하임 계곡의 언덕배기에 앉은 베르테르는 호메로스를 읽으며 이따금 상념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무한한 신의 영혼의 거울인 자신의 영혼을 신이 발하임을 그린 것처럼 자신도 종이 위에 잘 그려서 종이를 자신의 영혼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행복하게 고민하곤 하였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발하임 마을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길에 그만 그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가장 매혹적인 것을 보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마을에 살고 있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여인 샤를로테였다. 첫 만남에서부터 샤를로테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의 약혼자가 출장을 나가 있는 몇 주동안 샤를로테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였는데 이것은 해와 달과 별들은 고요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베르테르는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그를 둘러쌌던 세계가 사라져 버린 듯하였다. 


로테와 함께 하는 충만하고 행복한 나날은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토가 돌아오면서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로테는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지하고 있던 베르테르는 이제 그 사실을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25살의 피 끓고 감성 충만한 성정의 베르테르는 이미 너무 깊이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다.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헤라이자 아프로디테였고 아르테미스이자 아테나였다. 사랑과 숭배와 헌신을 이미 바쳐버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렇듯 감성이 지배하는 성정을 지닌 베르테르와는 달리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토는 훌륭한 인품에 근본적인 성실함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당시 독일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계몽의식의 영향을 받았던 듯 이성이라는 것이 그를 대부분 잠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베르토와 베르테르의 아주 다른 성향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잘 지내는 듯했던 그들의 관계는 점차 부딪히게 되고 게다가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마음이 줄기는커녕 점점 더 켜져 가면서 두 사람의 대립은 한번 크게 부딪히게 된다.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현실 속에서 괴로움을 잊으려 일 속으로 자신을 던져보지만 속세에 찌들어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은 그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안식처인 로테에게로 다시 돌아간 베르테르. 하지만 이미 유부녀가 되어버린 로테는 이제 베르테르의 안식처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종교와도 같이 되어버린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숭배는 공존할 수 없었다. 얄궂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이 베르테르의 영혼에 뿌리내리며 잠식해갔고 그의 생기와 명민함은 소멸되갔다. 베르테르는 신변을 정리하고 알베르토에게서 빌린 권총으로 자신의 서재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출판사의 거절을 겪은 다음 가까스로 출판된 처지였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판되자마자 독일과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가져왔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지독한 이성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억눌려 있던 젊은 감성들은 베르테르의 내면이 말하던 감성과 감정의 솔직함 풍부한 감수성에 열광했다. 냉철한 이성과 지식을 당연한 진리로 여겼던 당시의 풍조에 그들은 지쳤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사조이든 경향이든 하나의 시간과 공간을 그것으로만 채워지게 되면 반드시 반대편의 억눌린 기류가 빈 곳을 비집고 나오게 되어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당시 사회에서 반대편 억눌린 기류였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말할 때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어떤 행동에 특별한 속사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나 했나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 P89

충분히 이성적인 알베르토에게 베르테르는 이와 같이 항거하며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이 어찌해서 나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아마 베르테르의 이 주장은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목소리였을 수도 있겠다. 


'젊은 베르테르'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나 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나는 너무도 늦게 읽어나보다. 

베르테르의 우유부단함에 못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처음부터 샤를로테가 약혼자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유부녀가 되어 버린 로테에 대한 사랑을 계속 키워가고만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베르테르가 나는 불만이었다. 

그 끝이 해피엔드가 아님을 베르테르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인데 '로테'라는 여신에 대한 숭배는 여전하고 스스로 초조함과 불만과 불안을 내부에서부터 키워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모든 비관적인 감정 덩어리는 독자들이 예상한 바 그리고 현대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베르테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인공은 초조함과 불안과 그리운 사랑으로부터 구원하는 방법으로 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감정은 이미 과거 저 편에 묻어버리고 오로지 현실과 이성만이 살 길이라는 듯 2020년 이 해를 살고 있는 나는 베르테르를 이해는 하지만 용납하지는 못하겠다. 예상되는 결말이 오기 전에 나를 보호해야만 했다, 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로테는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베르테르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야 했다. 베르테르는 로테와는 거리를 두고 알베르토와만 사교를 지속하여야 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그는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베르테르의 처연한 사랑과 끝 모를 슬픔을 용납하지 않고 '안전'부터 생각하는 나는, 이제  정말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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