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은 영혼의 기호다‘
밀란 쿤데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P45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모재 속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편한 바다를 버리고 무엇 때문에 모래와 용암밖에 없는 땅 위로 올라옸을까. 천적을 피하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 정든 곳을 뒤에 두고 낯선 곳을 찾아가는 호기심. 펀한 것보다 고난에 도전하는 모험심. 지금 우리가 달나라로 가는 우주의 꿈과도 같았으리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낯선 이야깃거리는 그렇게 시작된다. 왜 울며 태어났는지. 셰익스피어와 굴드와 헤밍웨이의 상상력을 모두 모아 칵테일하면, 이런 가상의 이야기 한 편이 만들어진다. - P100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그것은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육지를 향해 단신 포복하면서 숨이 막힐 때까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엄청난 고통의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 막혔던 숨통이 뚫리는 소리가 난다. 이미 내 아가미는 허파로 변해 있었고, 지느러미는 어느새 손발로 변해 있었다. 진동하는 허파는 바다와 뭍의 바람결을 타고 돛대처럼, 깃발처럼 부풀고 있었다. 나는 용감한 해병대요, 숨비소리를 내는 환상의 해녀다. 그게 내 출생을 선언한 응애의 울음소리다. - P101

좁은 구멍을 빠져나와야만 끈적끈적한 고치 속의 이물질을 모두 빨아내어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좁은 구멍을 통해 나오는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주고 자유의 날개를 주는 필요한 장치였던 셈이다. - P111

우리말에는 아이가 태어나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그 성장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신가한 낱말 하나가 있다. ‘떼다‘라는 말이다. 태너나자마자 탯줄을 가르고 배꼽을 뗀다. 다음에는 젖을 때고 똥오줌을 가리게 되면 기저귀를 뗀다. 그리고 기어다니던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 첫발을 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옛날이라면 천자문을 떼고 요즘이라면 한글을 떼야 비로소 홀로서기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배꼽떼고, 젖 떼고, 기저귀 떼고, 발 떼고, 천자문 떼지 않으면 팽생 ‘떼‘쓰는 응석받이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 P149

나는 80년 동안 책과 함께 살아왔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은 돌상에서 집은 책이고, 책을 읽어주신 어머니가 나의 두 번째 책이다. 어머니의 말,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그 많은 모음과 자음에서 상상력을 길렀다. 내 최초의 책은 어머니의 몸이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돌잡이로 집어 들던 그 책,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미니의 음성으로 듣던 책. 그 책이 내 창조력의 씨앗이다. - P281

한국에서는 ‘잼잼‘과 ‘곤지곤지‘같은 애들 놀이에서 쇠젓가락으로 콩알을 집는 손기술까지 모두가 돌잡이의 ‘잡는 문화‘로 상징된다. 돌잡이는 ‘꿈잡이‘다. 한국인은 꿈을 꾸지 않고 손으로 잡는다. - P284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오늘을 잡아라!"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쥐라‘는 뜻이다. 우리는 기회를 잡고, 사랑을 잡고, 운명을 잡는다. 더 나아가 세계를 잡기도 한다. ‘받는다‘는 수동적 의미가 아니라 제 손을 뻗어서 제 손에 넣는 것이 잡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국인만큼 잡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민족도 드물다. 첫 생일을 맞는 아이를 ‘돌잡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돌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잡는 것으로 인생을 출발한다. 내 운명을 내가 잡는 것이다. - P285

부모의 품 안에서 길러진 습관이나 버릇은 고스란히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두 살도 아닌 세 살이 인간의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뇌과학에서 밝혀진 이야기지만, 한국 나이로 세 살이 되면 거의 80퍼센트 이상의 뇌발달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미래가 세 살에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 뒤의 한국을 보려면, 오늘 우리는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면 된다. 아이를 잉태해서 츨산해 키우는 3년 동안 80년의 한국 미래를 품고 있는 것이다. 3년만 투자하면 80년이 달라진다. - P305

태어난 집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고향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 P317

아버지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보다 혼이 날까 검나 손가방을 더 힘껏 껴안고 울음 뒤끝을 참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근엄한 얼굴이 무너지고 아주 어색한 웃음이 지으신다. - P325

땅만 보고 나물만 캐는 사람에게는 노동만 있고, 하늘만 바라보고 종달새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궁리만 있다. 그런데 땅의 나물과 하늘의 새는 상호작용하면서 벌판의 지평에 변화를 준다. - P3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